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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함께 먹기 영혼을 만드는 원료, 집밥
사람들은 남자 혼자 산다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밥이나 제대로 챙겨 먹고 사는지를 묻곤 한다. 하지만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어떤 이보다 더 잘 챙겨 먹고 산다고 자부한다. 아직까지 보약 한 첩 먹어본 적 없는데도 내가 건강한 이유는 오직 ‘밥심’ 때문이라고 믿고 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끼니만은 거르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밥을 보약 삼고 ‘밥심’을 근력 삼아 사는 사람이 어찌 그 귀한 밥을 거를 수 있으랴. 사람들은 또 밥을 먹더라도 내가 대부분 식당에서 사 먹을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보다 식당 밥을 적게 먹는 것이 확실하다.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나는 식당 밥을 먹지 않는다. 밥은 대부분 집에서 해 먹는다. 내 요리에는 화학조미료나 설탕이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집밥을 먹으면 몸이 편해지는 것은 아마 그런 까닭일 것이다. 혼자 먹는 밥이지만 대충 먹는 법은 없다. 늘 정성껏 밥상을 차린다. 해물된장국이나 조개미역국을 끓이거나 생선구이를 하거나 생선조림을 하거나 단 한 가지라도 주요리를 장만한다.

집에서 요리하는 일은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한 사람분이나 여러 사람분이나 시간은 비슷하게 소요되고 비용도 사 먹는 것보다 더 든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위해 혹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의 생명 활동을 위해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아무리 많다 한들 어찌 낭비일 수 있겠는가. 천하도 생명보다는 가볍다 하지 않던가! 나는 요리하는 일이 즐겁고 내가 만드는 음식이 맛있다. 물론 어릴 때는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이 최고였다. 아직도 가끔씩 받는 어머니 밥상은 ‘어머니라는 신’의 손맛이 느껴질 정도로 천상의 맛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손수 차리는 밥상이 더 좋다.

아마도 내 몸이 원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하는 즐거움이 더해지기 때문이지 싶다. 늘 하는 요리여도 나는 내 음식에 대한 기대가 크다. 항상 그 맛에 감탄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니 혼자 먹는 밥이라 해서 즐겁지 않을 까닭이 없다. 물론 맛있는 음식일수록 여럿이 함께 먹어야 더 맛있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다른 이들이 나를 방문하면 꼭 한 끼쯤은 밥상을 직접 차려 함께 먹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내가 만든 요리를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하물며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직접 요리하는 일의 기쁨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집밥 예찬론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나는 유소년기에 외식을 해본 기억이 없다. 늘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을 먹고 자랐다. 그때는 밥이 사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밥은 당연히 집에서 먹는 것이지 어떻게 사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대학에 들어가서야 처음으로 식당 밥을 먹기 시작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식당 밥은 그저 몸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의무감으로 먹었을 뿐이다. 늘 어머니의 집밥이 그리웠다. 식당 밥은 육체의 허기는 메워줄 수 있지만 영혼의 허기는 채워주지 못했다. 영혼은 늘 집밥을 갈구했다. 사 먹는 밥이 단지 육체의 양식이라면 집밥은 영혼의 양식이기도 했다.

“죽기까지 떠나지 않을 노릇이 바로 이거죠.” 조르바는 냄비를 불 위에 얹으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염병할 여자(이 또한 끝없는 전쟁이지만)뿐만이 아닙니다. 먹는 짓거리 또한 끝없는 전쟁이지요.” 그 크레타 해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먹는다는 게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를 깨달았다. 조르바는 두 개의 바위 사이에다 불을 피우고 음식을 장만했다. 먹고 마시면서 대화는 생기를 더해갔다. 마침내 나는 먹는다는 것은 숭고한 의식이며 고기, 빵, 포도주는 정신을 만드는 원료임을 깨달았다. _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중


내 고향은 다도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다. 지금은 다시 타향을 떠돌며 살고 있지만, 어린 시절 떠나온 고향 보길도에 어른이 된 뒤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다. 그때 나는 마을 어른들을 고용해 내가 살 집을 직접 지었다. 몇 달 동안 매일같이 10여 명이나 되는 사람의 점심 식사를 혼자서 차렸다. 다들 맛있게 잘 드셨다. 내가 음식에 소질이 있는 것을 발견한 건 아마 그때였지 싶다. 보길도에 살면서 나는 참 많은 사람에게 밥을 해 먹이기를 즐겼다. 그래서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이들 중에는 보길도보다 내 요리가 먼저 생각난다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나는 직접 메주를 만들어 띄우고 된장과 간장을 만들어 먹었으며 김치도 직접 담가 먹었다. 대놓고 자랑 좀 하자면 큰 항아리에 숙성시킨 동치미 맛은 지인들에게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뛰어났다.

그 동치미 국물 한 사발이면 술병도 다스릴 정도로 명약이었다. 초봄 꽃대가 올라온 야생의 돌갓을 뜯어다 담근 돌갓물김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내가 만든 음식 중에는 밴댕이와 비슷하게 생긴 마른 뒤포리로 국물을 내고, 텃밭에서 키운 늙은 호박을 썰어 넣고,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늙은호박된장국이 단연 최고의 인기 메뉴였다. 이탈리아나 캐나다, 미국 등 외국에서 온 친구들도 정말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몇 그릇씩 비우곤 했다. 그때 쌓은 음식 공덕 때문이었을까. 나는 다시 고향을 나와 10여 년 동안 수많은 섬을 떠돌며 살고 있지만 끼니를 거른 적이 없다. 특히 식당이 없는 작은 섬마을에 찾아가서도 늘 따뜻한 밥상을 대접받았다.

집을 떠나서도 집밥을 먹고 다닌 것이다. 그것이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섬들을 떠돌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섬의 어머니들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붙들고 밥을 먹이는 것이 일이다. 영광의 낙월도에서 만난 어떤 어머니는 황석어젓과 김치, 매운탕까지 올라온 푸진 밥상을 차려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고생하고 살아서 배고픈 설움을 알아. 나는 아무한테나 밥 먹으라고 해.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내 밥 먹고 가. 내가 밥을 다 해줘.” 어머니는 지나가는 누구에게나 밥해 먹이는 것이 일과였다. 함께 집밥을 나눠 먹으면 낯선 사람도 식구가 된다. 혈족이 아닌 마음의 식구 말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밥인가. 집밥이 영혼들끼리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만드는 영혼의 양식인 것은 그 때문이다.

낯선 나그네에게도 선뜻 밥상을 차려주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풍습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가족끼리도 함께 집밥을 먹는 시간이 적다. 집에서 밥을 같이 먹지 않으면 가족도 식구가 아니다. 집밥을 함께 먹어야 진정한 식구다. 한동안 ‘저녁이 있는 삶’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일과가 끝나고 가족이 모여 따뜻한 집밥을 함께 먹고 휴식을 취하며 정을 나누는 ‘영혼이 있는 삶’을 말하는 것이기도 할 터. 몸은 비대해져가는데 영혼은 메말라가는 시대. 나는, 우리 가족은 과연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영혼을 살찌울 집밥을 먹고 있는가? 이는 또한 우리 사회가 응답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글을 쓴 강제윤 씨는 시인이자 섬 여행가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이다. <걷고 싶은 우리 섬><섬을 걷다><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섬을 걷다 2><바다의 황금 시대, 파시><통영은 맛있다><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편집부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4년 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