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를 본관으로 하지만 허씨 집안이 터를 잡고 집성촌을 이룬 곳은 다름 아닌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이다.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조용헌 선생이 ‘백가기행’(<행복> 2010년 6월호)에 “손꼽히는 풍수 명당에 지은 의로운 부잣집”이라 소개한 곳이 바로 승산마을의 효주 허만정(현재 GS그룹 허창수 회장의 조부) 고택으로 “만석꾼 집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소박하나 정지(부엌)에는 손님을 접대하느라고 매일같이 소다리가 걸려 있었다고 하며, 특히 생선인 대구탕을 많이 끓여 접대하였다”고 들은 바를 전했다. 효주 어른은 취향이 소박했는데 음식에는 관심이 남다르고 미각이 뛰어났다고 한다.
그 덕에 허씨 집안의 음식 문화가 고유하게 성숙할 수 있었을 터. 미각은 대물림되어 자손들 중에서도 특히 다섯째 허완구 선생이 유독 입맛이 섬세했는데, 후손들을 위해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음식>을 기획한 이도 그이다. 할아버지, 아버지 때부터 1백20여 년을 내려온 집안 음식인 일명 ‘묵동댁 음식’이 잊혀가는 것이 안타까워 집안 후손에게 선대의 음식 문화를 실용적으로 알려주기 위해 요리책을 내기로 한 것이라고. 묵동댁은 그의 모친, 그러니까 효주 어른의 처로 묵동은 택호宅號다. 본디 가풍이란 집안 어른의 말에 귀 기울일 때 이어지는 법 아니던가. 이 요리책에는 음식을 통해 선대의 가풍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전달하려는 집안 어른들의 속내가 담겨 있다.
집안의 아낙들이 함께했으나 그 중심에서 진두지휘한 이는 허완구 선생의 아내 김영자 여사다. 남편 입맛이 까다로우면 아내의 음식 솜씨는 자연스레 빼어날 수밖에 없는 법. “본 적도 없는 음식을 남편이 찾으면 동서 댁에 가서 먹어보고 ‘이거 어떻게 만들어요?’ 물어서 받아 적은 것을 집에 와서 또 해보고…. 그렇게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집안 음식을 배웠지요.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시집을 살면서 어른들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쉽지 않으니,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집안 음식을 모은 요리책이 필요할 것 같았어요. 요리에 관심이 많은 후손들에게 ‘해보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집안의 내림음식은 계속 명맥을 유지해나갈 테니까요.”
그저 집안의 맛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이 책이 의미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서부 경남 지역의 음식 문화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것. 선대의 음식 문화를 지켜온 것이 자연스레 우리나라 음식 문화의 맥을 계승하고 보존해온 셈이다. 그러니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영하 교수의 말마따나 “지역별로 이런 책 몇 권만 나와도 우리나라 음식 문화가 자연히 정립될 것”이다. 이 책은 김해 허씨 집안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면서 우리 선조의 식문화에 대한 이야기다.
진달래화전으로 봄 잔치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청명淸明이 가까워지면 동네 사람들 불러다가 진달래화전을 지지며 봄의 절정을 즐겼다. 꽃으로 무늬를 놓는 화전이 아니라 꽃과 함께 반죽해서 만드는 화전이다. 야생의 진달래를 소쿠리로 한가득 따다가 찹쌀가루를 엉길 정도로만 넣는데, 이때 진달래와 찹쌀의 비율이 적어도 10:1 정도 되어야 반죽 색이 진달래색이 된다. 보통 녹두소를 넣지만 팥소를 넣기도 했다.
기운 돋우는 담백한 도미찜
허씨 집안에서는 생선을 즐기는데, 집안 어른들이 고기라 하면 으레 생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효주 어른 때부터 통영, 삼천포 등 포구가 가까이 있어 철마다 각종 해산물과 ‘고기’를 즐겼다. 3월 말부터 시작해 봄철에는 도미가 가장 맛있는 때라 회로도 먹고 찜으로 해 먹었다. 쇠고기, 표고버섯, 당근, 콩나물, 죽순, 싸리버섯,
파, 마늘, 생강, 잣, 은행 등을 손질해 집간장으로 간하면서 참기름, 후춧가루, 깨소금, 달걀 등을 넣고 버무려 속을 만든 후 배 쪽에서 등 끝까지 길게 칼집을 낸 도미에 배가 터질 정도로 속을 꽉꽉 채운 다음 깨끗한 짚이나 무명실로 묶고 김이 오른 찜통에서 15~20분간 찌면 된다
초봄의 맛 속대기무침
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으로 속대기무침이 있다. 속대기는 김의 뿌리로, 진주에 가서 비빔밥을 먹으면 꼭 속대기가 들어 있다. 초봄이면 으레 해 먹는 음식인데, 허씨 집안에서도 비빔밥을 해 먹을 때 반드시 넣는다. 구워서 무쳐 먹으면 씹히는 맛이 좋아 밑반찬으로도 즐긴다. 특히 파가 좋을 때 조선파와 함께 무치면 아주 맛있다. 그릇에 파 데친 물(혹은 멸치 국물), 집간장, 통깨, 고춧가루, 들기름, 구워서 부순 속대기를 넣고 조물조물 무치다가 마지막에 조선파를 넣는다. 진주 승산마을에서 5백여 년 가까이 터를 잡고 살아왔으니 허씨 집안에는 이 지역의 소박하고 토속적인 음식이 많다. 무침용 그릇은 68년 된 것으로, 일명 ‘다라이(양푼이)’다. 원래는 세숫대야인데, 밥 비벼 먹는 그릇으로도 사용했다.
집안의 고유한 여름 국밥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으며 제철에 나는 풍성한 식재료로 요리해 먹는 것이 허씨 집안 음식의 특징이다. 진주가 각종 식재료의 집산지이다 보니 다양한 재료를 풍성하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 여름에 몸이 아프거나 지칠 때 먹는 여름 국밥은 허씨 집안만의 음식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 그릇을 비우고 나면 비로소 기운이 솟는다. 여기에도 쇠고기에 오이, 가지, 애호박, 감자, 고춧잎, 고추, 석이버섯 등 갖은 제철 채소가 들어가는데, 멸치 국물로 끓이다 집간장으로 간하고 마지막에 달걀을 풀어 넣는다. 삼복더위에 몸이 허하면 무더위에 지치고 건강이 상하기 쉬우므로 맵고 칼칼한 닭찌개도 영양식으로 즐겼다.
여름철 별미 우무장아찌
여름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음식은 단연 우무장아찌다. 우무는 주로 해안가에서 많이 먹는데, 진주 지역이 바다와 가까워 그 옛날에도 우뭇가사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우뭇가사리를 물에 푹 고아 1시간 30분가량 끓인 뒤 고운체에 걸러 틀에 넣고 묵처럼 굳으면 적당한 크기로 네모나게 잘라서 진간장에 하룻밤을 재어놓는다. 하룻밤 지나면 딱 짙은 갈색의 간장 색깔로 물드는데, 그것을 꺼내 고추장과 물엿 섞은 것에 다시 박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둔다. 이 과정을 두어 번 반복한다. 먹을 때 꺼내어 얇게 저며서 내는데, 찬물에 밥을 말아서 같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집안 어른들이 입맛 없을 때 즐기던 여름철의 참별미 장아찌다.
어른 생신상에 올리는 찜국
허씨 집안에서는 어른 생신상에 꼭 찜국을 올린다 (미역국은 어린애들 생일상에나 올라간다). 귀한 손님상에도 찜국을 올리니 그 자체가 ‘귀한 국’이다. 국물이 초계탕 같기도 하고 크림수프와도 비슷하다. 이 국에 들어가는 닭, 들깨, 버섯은 원래 궁합이 좋은 재료로 토란이 꼭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토란 이외에도 우엉ㆍ연근ㆍ무ㆍ버섯ㆍ당근 등 제철에 나는 것이 죄다 들어가는데, 토란이 없을 때는 죽순을 넣기도 한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이다 마지막에 쌀과 들깨를 5:5 혹은 6:4 비율로 갈아 체에 밭쳐 넣은 뒤 뚜껑을 열고 식힌다. 한눈에 봐도 영양식으로, 한 그릇이면 밥을 따로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든든하다. 닭 대신 쇠고기를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을 살리는 집장
집장은 집집마다 다르다. 그만큼 그 집안 음식 철학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기도 하다. 허씨 집안 음식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집장이다. 이 집의 집장은 채소로 만든 것으로, 늦가을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 대신 늦가을까지 살아남은 끝물 채소라야 한다. 생명력이 응축된 것이니 집장이 병을 고치는 음식인 것이다. 효주 어른을 비롯해 집안의 남자들이 한의학에 조예가 깊어 건강을 중요시 여겼기에 음식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집장 같은 음식을 만들 수 있었다.
나누고 싶은 겨울날의 맛 굴떡국
흔히 쇠고기나 양지머리를 넣고 푹 고아서 육수를 우려내는데, 허씨 집안 떡국에는 굴, 두부, 새우가 들어간다. 겨울을 맞아 싱싱한 해산물이 넘쳐나니 떡국에도 넣어 즐긴 것. 이렇듯 떡국 한 그릇에도 고기, 생선, 산채를 고루 넣어 영양의 균형을 이루었다. 멸치 국물이 끓으면 떡을 넣어 끓이다가 새우와 굴을 넣고 끓인 후 제일 마지막에 두부를 넣는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다진 마늘도 넣지 않는다는 것. 쑥국, 미역국 등에도 사용하지 않는데 해산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특히 마른 홍합은 꼭 넣어 맛과 향을 더한다.
정성스러운 콩나물겨자채
허씨 집안 음식은 소박한 음식 일색이지만 어느 하나 만드는 과정을 소홀히 할 수 없이 손이 많이 가고 준비하는 이의 정성과 수고가 깃들어 있다. 철이 아닌 음식은 먹는 법이 없었는데, 콩나물겨자채는 겨울 대표 식재료를 그대로 담아놓은 듯하다. 겨울에 가장 많이 해 먹은 음식으로, 냉장고가 흔치 않던 시절에는 음식을 단지에 넣고 바깥 장독 위에 올려두고 먹었다. 조리법 또한 삶거나 데치거나 쪄서 먹는 음식이 많은 것이 이 집안 음식 특징인데, 콩나물겨자채 역시 재료들을 일일이 밑 작업한 것으로, 번거롭긴 하지만 원재료의 훼손이 적고 소화 흡수가 잘된다.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음식>
경남 진주 지역에 승산마을의 터줏대감 격인 김해 허씨 집안의 내림음식을 담은 책. 문중에서 후손을 위해 제작한 요리책으로, 시중에서는 구하려야 구할 수 없는 귀한 책이다. 계절 음식을 모두 담아 2년 2개월여에 걸쳐 완성했다.
술맛 돋우는 약대구
생선과 어패류를 사용한 요리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으뜸은 대구 요리다. 대구로 만든 음식이 많은 것은 주변 바닷가에 풍부하기 때문이다. 겨울의 한가운데인 동지冬至가 가까워오면 추위를 끌고 동장군이 밀어닥치면서 대구에 알이 꽉 차고 맛이 든다. 그때 가덕도 대구를 가져다 약대구를 비롯해 대구알젓, 장자젓(아가미젓), 대구살을 이용한 멸짝, 대구매운탕, 대구머리탕, 대구알찌개 등으로 다양하게 즐긴다. 그중 술안주나 밑반찬으로 1년 내내 쓰는 약대구는 말리는 방식부터 독특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이 많이 가지만 식재료 본맛을 살리기 위한 것. 배를 가르지 않고 아가미 쪽으로 속을 꺼내어 손질해 내장은 버리고 알은 씻어서 다시 아가미 쪽으로 넣는다. 여기에 간장을 부어 며칠 동안 스며들게 두었다가 다시 간장을 부어 매달아두고 한두 달간 얼렸다 녹였다를 반복하며 말린다. 아가미 위를 창호지로 잘 싸둔 것은 먼지가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거의 말랐다 싶으면 토막 내어 냉동고에 보관한다.
캘리그래피 강병인
- 음식으로 가풍을 잇다,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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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는 살아온 내력이 담겨 있다. 따라서 집안의 음식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단지 요리법만 후대에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문화를 아우르며 전달하는 의미를 지닌다. 2년 2개월여를 꼬박 준비해 펴낸 <진주 허씨 묵동댁 내림음식>은 후손을 위해 만든 김해 허씨 집안의 내림음식 책으로, 선대가 즐기던 일상의 음식을 통해 가풍을 후손에게 올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이 집안 아낙들의 사려 깊은 마음이 담겨 있다. 진주 지역과 집안의 특색이 그대로 살아 있는 허씨 집안의 내림음식 중 특색 있는 열 가지를 소개한다. 봄부터 겨울까지, 음식 따라 계절을 맛보시길.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