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김장만큼 든든한 가을 갈무리
땅에서 싱싱한 것이 생산되는 마지막 계절. 따가운 가을 햇볕 아래 갖가지 채소를 채반에 널고 줄에 꿰어 말리는 모습이 정겹다. 다양한 채소를 이렇게 갈무리해놓으면 겨우내 반찬 걱정이 사라진다. 잊혀진, 그러나 다시 따라하고픈 갈무리 풍경.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주변 동네를 내려다보노라면 많은 삶의 풍경들이 스쳐지나간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어느 집 옥상을 빨갛게 덮어버린 고추에서 문든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드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온갖 채소들을 채반에 널어 말리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1년 내내 바쁘지 않은 때가 없었던 할머니와 어머니였지만 특히나 가을이면 좋은 볕을 놓치지 않으려고 더욱 분주해지셨다. 푸성귀가 나지 않는 추운 겨울을 대비해 가을 이맘때쯤이면 온갖 채소들을 정성껏 갈무리해 반찬거리를 마련해두었던 것이다. 땅에서 싱싱한 것이 생산되는 마지막 계절이 바로 ‘가을’ 아니던가. 일반적으로 갈무리란 끝마무리를 뜻하지만 살림살이에서 갈무리한다는 것은 제철에 나는 반찬거리를 두고두고 먹으려고 잘 저장해두는 것을 말한다. 엄동에 먹을 김장 준비, 한 해 동안 음식 맛을 낼 장을 담그기 위한 메주 쑤기, 밑반찬인 장아찌, 부각, 젓갈들을 마련하는 일은 모두 갈무리의 범주 안에 든다.

볕 좋은 날 장독대 위에 놓인 대나무 채반마다, 빨랫줄마다 널리고 걸린 채소들이 때깔 좋게 바싹 말라가는 모습은 수확의 계절 가을의 부산하고 풍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정다운 풍경이었다. 추석 즈음에는 붉은 고추를 필두로 가지와 애호박 말리기가 시작된다. 가지와 애호박은 날것을 그대로, 고구마순, 토란대, 고춧잎, 아주까리잎 같은 것들은 깨끗하게 손질해 데쳐서 말려야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껍질 있는 도라지를 사서 껍질을 벗긴 뒤 결대로 찢어 널어 말리기도 하고, 식혜의 천연 단맛 재료인 엿기름을 길러 말리기도 한다. 겉보리를 사다가 며칠 동안 푹 불려서 우묵한 바구니에 담아 축축한 면보자기 같은 것을 덮어놓으면 뾰족하게 싹이 뜨기 시작한다. 싹이 트기 시작하면 바구니 속 온도가 너무 올라가 자칫 썩어버릴 수 있으므로 자주자주 바구니를 흔들어 뒤섞어주어야 한다. 하얀 뿌리와 뾰족한 싹이 6~7mm 정도 자라면 채반에 쫙 펴서 바짝 말린다. 이렇게 말린 나물과 엿기름은 이듬해 설날부터 대보름, 입춘 때까지 톡톡히 제몫을 한다. 또 10월 말에는 늙은 호박을 사다가 꼭지를 떼고 껍질을 벗겨 씨를 빼낸 다음, 두께가 1cm 되게 칼로 둥글게 돌려가며 오려서 줄에 널어 말린다. 호박오가리는 찹쌀가루와 버무려 호박떡을 만들어 먹으면 달고 맛있다. 11월 하순 김장철이 가까워 오면 무가 맛있어지니 썰어 무말랭이를 말린다. 김장할 때는 무청이 싱싱한 것으로 골라 동치미를 담그고, 깨끗한 무청을 골라 한 묶음씩 엮어 죽 걸어 말린다. 무청은 비타민과 철분이 충분히 들어 있어 겨울철에 좋은 영양 공급원이 된다. 고추부터 시작된 가을 갈무리는 이렇게 무청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런 건조 채소들은 말리는 동안 수분이 빠지고 세포액의 농도가 짙어지며 미생물 번식이 억제돼 오래 보관하고 먹을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속성 재배나 하우스 재배 등 농업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사시사철 싱싱한 채소들이 가득 나기 때문에 갈무리의 의미가 예전 같지 않다. 그러면서 정겨운 풍경들도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재래시장에서 잘 말린 나물들을 볼 때면 할머니나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지곤 한다. 파, 마늘 다져 넣고 간장이나 참기름을 눈대중으로 찔끔 넣어 대충 무쳐내는 것 같아도 그렇게 맛깔스러울 수 없었던…. 그 맛을 추억하며, 정감 있는 풍경을 기억하며 가을 햇볕 아래 갈무리 풍경을 재현해보면 어떨까? 싱싱한 무나 호박을 가지런히 썰어 채반에 쫙 펴 널어놓고 한나절 바짝 말려 무말랭이나 호박고지를 만들어도 좋고, 싱싱한 표고버섯을 한 상자 사다가 굵은 실로 듬성듬성 꿰어 햇살 좋은 창가에 걸어놔도 좋다. 내친김에 우려먹고 난 녹찻잎이나 토마토 같은 갈무리에 생경한 채소 말리기에도 도전해보자. 어른들 살림살이에 비하면야 소꿉장난 수준이지만, 마음만은 어느덧 겨울 준비를 다해놓은 듯 든든해질 것이다.
말리는 데도 개성이 있다! 말린 채소는 생채소보다 비타민 D가 풍부하다. 비타민 D의 역할은 우리 몸에 칼슘의 흡수를 돕는 일. 채소를 잘 말려야 영양가도 파괴되지 않는다. 채소는 종류별로 성질과 용도에 따라 ‘동그랗게’ 혹은 ‘길쭉하게’. 써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또 중요한 요소는 바람. 아무리 햇볕이 좋아도 선선하게 바람이 통하지 않으면 잘 마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채소가 썩는 경우도 있다. 성공적인 가을 갈무리를 위한 채소 손질법.


1 애호박
연둣빛의 작은 애호박을 골라 5mm 두께로 동글납작하게 썬다. 채반에 펴놓고 말리는데, 한쪽을 완전히 말린 다음 뒤집어 말려야 파랗고 깨끗하다. 호박고지는 궁중떡볶이에 빠지지 않던 재료. 정월대보름에 먹는 호박고지나물은, 씻어 건져 부드러워진 호박고지를 파, 마늘과 함께 볶다가 국간장, 참기름, 깨소금을 넣고 고루 무친다.

2 무 무는 계절에 상관없이 늘 재배하지만 선선한 가을에 나오는 김장 무가 가장 달고 맛있다. 무는 골패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썬다. 실과 바늘로 줄줄이 꿰어 매달거나 대나무 채반에 고루 펴서 말리면 도시락 반찬으로 애용되던 무말랭이가 된다. 찬물에 1시간 정도 담갔다 건진 무말랭이는 고춧잎 말린 것과 함께 무치면 잘 어울린다.

3 우엉 너무 건조하지 않고 굵기가 균일하며 껍질에 흠이 없는 우엉을 골라 껍질째 수세미로 문질러 깨끗하게 씻는다. 2~3mm 두께로 어슷하게 썬다. 물에 5분 정도 담갔다가 건져서 물기를 걷어내고 채반에 겹치지 않게 펴 널어 한나절 바싹 말린다. 말린 우엉을 물에 넣어 끓이면 쌉싸래한 향이 좋은 우엉차가 된다.


4 가지
껍질이 얇고 육질이 연하며 윤기가 도는 가지로 골라 꼭지는 그대로 둔 채 길이로 4등분한다. 줄에 길게 매달아 날것을 그대로 말려도 되고, 찜통에 살짝 찐 후에 말려도 좋다. 불린 가지로 나물을 볶을 때는 마지막에 들깨가루를 넣어야 맛이 고소하고 좋다.

5 토마토 사실 우리 옛 갈무리에 토마토 항목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식으로 예쁘게 말려보자. 미니토마토 꼭지를 따고 반으로 잘라 자른 단면이 위로 올라오게 펴놓은 뒤 소금을 약간 뿌린다. 가을 햇볕 아래 꾸덕꾸덕하게 말려놓으면 이탈리아 요리할 때 긴요하게 쓰인다.

6 단호박 꼭지를 떼어낸 단호박을 반으로 잘라서 두꺼운 겉껍질을 살짝 벗겨낸다. 씨를 파낸 뒤 깨끗하게 씻어 2~3mm 정도 두께로 반원 모양을 살려서 썬다. 말린 단호박을 떡이나 케이크 등에 넣으면 단맛이 좋고, 기름에 살짝 튀겨 소금 ?설탕을 뿌리면 고소한 단호박칩이 된다.

구선숙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