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남도 음식의 기본, 멸치젓 물 밖으로 나오자마자 죽어버린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멸치. 워낙 크기가 작아서 볼품없는 생선이지만 갓 잡은 멸치에 소금을 넉넉하게 뿌려 오랫동안 발효시킨 멸치젓만큼 깊은 맛을 내는 음식이 있을까. 숙성시키는 과정 중에 파리가 달려들 정도로 좋지 않은 냄새가 나지만 먹어본 사람은 그 맛이 얼마나 구수하고 중독성이 강한지 잘 안다. 우리나라에서 멸치젓을 애용하는 곳은 해안을 끼고 있는 따뜻한 남쪽 지역. 이곳 사람들에게 멸치젓은 소금이나 간장보다도 더 빈번하게 손이 가는 양념이다. 쿰쿰한 멸치액젓이 들어간 국은 소금으로 간한 것보다 한결 오묘한 맛이 나고, 나물 무칠 때 간장 대신 넣으면 가볍게 느껴지던 채소의 풋내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입맛 없을 때 멸치육젓을 넣은 쌈장은 특별한 별미가 된다. 남쪽에서 유명한 멸치 산지로 충무와 삼천포, 대변과 기장을 꼽을 수 있다. 그중 동남쪽 해안에서 잡히는 것은 길이가 10cm 이상 길고 살이 통통한 편이며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맛은 크게 차이가 없다.
멸치에 천일염을 뿌려 3개월 이상 숙성시킨 후 고운 체에 밭친 액체를 액젓, 남은 건더기를 육젓이라고 한다. 건더기를 곱게 간 것은 생젓이라 하며, 멸치가 통째로 발효된 것은 마리젓갈이라고 한다. 최근 서울에서도 ‘진짜배기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멸치젓을 음식에 넣는 이들이 많다. 진정한 멸치젓 맛을 잘 몰라‘물미원’이라고 부르는 화학조미료를 탄 물이 들어간 제품을 간혹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속지 않기 위해 일일이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요즘에는 갓 잡은 멸치에 소금을 뿌려 잘 밀봉해서 그대로 서울에 보내주는 젓갈 전문점이 있다. 기장에 위치한 청해식품(051-722-0230)도 그중 한 곳. 20~22kg 단위로 배송하며 가격은 시세에 따라 2만~10만 원이다. 택배로 받은 다음 서늘한 곳에 100일 이상 두었다가 꺼내어 먹으면 남도의 진한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2 남부 유럽 식탁의 터줏대감, 안초비 우리나라에 멸치젓이 있다면 지중해를 접하는 스페인과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등의 남부 유럽에는 안초비anchovy가 있다. 안초비란 멸치류에 속하는 작은 생선을 의미하는데 이를 소금에 절여서 오일에 담아둔 것도 안초비라 한다. 발효 식품인 멸치젓과는 달리 소금에 3~4개월 절여두었다가 꺼내어 머리와 내장을 떼어낸 뒤 기름을 채워 보관하는 안초비는 절임(또는 염장) 식품으로 구분된다. 안초비는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멸치젓보다 냄새는 덜하지만 맛이 짭짤하기 때문에 음식에 간할 때 많이 쓰인다. 사람마다 장 담그는 솜씨가 모두 다르듯 집집마다 안초비 맛도 제각각이다. 뿐만 아니다. 시골에 사는 부모님이 오랜만에 놀러온 자녀들에게 된장과 고추장을 바리바리 싸주듯 안초비를 손에 들려 보내는 풍경도 닮았다. 그러나 요즘은 서울에서 멸치젓 담그는 집을 찾기 힘든 것처럼 유럽에서도 안초비 담그는 가정은 찾아보기 힘들다.
10년 전만 해도 안초비는 외국에서 요리 공부를 한 사람들이 찾는 이국적인 식재료였지만 3~4년 전 이탤리언 음식이 유행하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해졌다. 이제는 많은 이탤리언 레스토랑에서 안초비를 기본으로 한 시저샐러드나 스파게티를 맛볼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식에 안초비를 빼달라는 분들이 있었는데, 요새는 따로 주문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라며 유로피언 홈메이드 레스토랑 ‘예환’의 배예환 사장은 안초비의 인기를 실감한다고 했다. 이같은 변화는 레스토랑뿐만이 아니다. 좀 더 대중적인 장소인 백화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매년 백화점 수입식품 코너에서 크래커나 빵 등에 잘게 자른 안초비를 올려 시식 행사를 합니다. 많은 주부들이 관심을 보이더군요. 해마다 음식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를 갖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식재료 무역 회사인 ‘보라티알’의 임정웅 과장은 한국 사람들에게 안초비는 더이상 낯선 식재료가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