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노영희의 철든 부엌 봄기운에 흥겨운 삼짇날 음식
입춘立春에 돋아나기 시작한 봄나물이 쇠면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청명淸明이 가까워집니다. 이즈음에는 삼짇날도 있지요. 이날은 음력 3월 3일로, 봄기운이 왕성한 때이니 흥이 절로 날 수밖에요. 옛사람들은 산과 들로 몰려나가 맛난 음식을 지어 먹으며 봄을 즐겼답니다. 삼짇날 무렵 즐기던 음식으로 봄을 만끽해보세요.


때는 늘 어김이 없다. 마른 나뭇가지에 새싹이 돋고 들판에 싱그러운 봄기운이 성큼 다가오면 삼짇날이 머지않다. 삼질 또는 삼샛날이라고도 하는 이날은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다. 그래서인지 시골에서는 이즈음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처마 밑을 올려다보는 일이 잦다. 어릴 적 우리 집에는 제비 둥지가 서너 개 있었는데, 겨우내 벌레 생긴다고 혀를 끌끌 차시던 할머니도 이날만큼은 잡초 섞인 진흙을 부지런히 물어 날라 밥그릇 모양의 둥지를 짓고 새끼를 치는 제비를 흐뭇하게 보시곤 했다. 그렇게 온 가족의 관심 속에서 제비 새끼가 태어나고 짹짹거리는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어느새 봄이 한가운데 들어서 있었고, 봄꽃이 피기 시작했다.

봄꽃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산에 들에 흐드러지게 피는 진달래였다. 진달래꽃으로 산천이 붉은 옷을 갈아입으면 오빠를 따라 꽃잎을 따러 산에 가곤 했다. 진달래 꽃잎을 곧잘 뜯어먹었는데, 풋내도 나고 맛도 쌉싸래했지만 보들보들한 꽃잎을 고스란히 먹는 느낌이 좋았다. 그 때문에 산에 진달래꽃을 따러 나가려 하면 “철쭉꽃 먹으면 죽는다”는 엄마 말씀이 늘 뒤따랐다. 얼핏 진달래꽃과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색이 좀 더 옅은 철쭉꽃은 먹지 못하는 ‘개꽃’이었기 때문인데, 엄마의 염려와 달리 진달래와 철쭉은 금세 구별할 수 있었다. 꽃과 잎이 함께 피거나 잎이 먼저 나오고 꽃이 피면 철쭉이고, 꽃이 먼저 피고 꽃이 지면서 잎이 나오면 진달래인 것.

삼짇날 무렵이면 동네 아낙들이 무리 지어 진달래 꽃지짐인 화전을 부쳐 먹으며 ‘화류놀이’라 하여 꽃놀이와 함께 봄을 즐기기도 했다. 오죽하면 삼짇날을 ‘여자의 날’이라고 했을까. 진달래꽃을한 아름 따오면 할머니께서도 종종 화전을 간식 삼아 부쳐주셨다. 대표적인 풍류 음식인 화전은 보통 찹쌀가루 반죽으로 동글 납작하게 빚어 지질 때 진달래 꽃잎이 잘 보이도록 참기름을 두른 팬에 지진다. 이때 진달래꽃이 붙은 쪽이 팬에 직접 닿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할머니의 화전 만드는 방식은 남달랐다. 할머니의 화전에는 헛된 욕심이 없었다. 진달래 꽃잎에 녹말가루를 묻혀 끓는 물에 살짝 데치듯 담갔다 건진 다음 찬물에 헹궈낸 뒤 물기를 없앴다.만들기는 손쉬워도 진달래 꽃잎 모양이 아무래도 덜 살지만, 건강에 이로운 약이 되는 음식이기는 매한가지다.

화전만큼 봄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으로는 탕평채가 있다. 초봄이면 할머니께서 으레 해주시던 별미였는데, 주재료인 청포묵을 보노라면 마치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는 듯했다. 여기에 보통은 집에서 키운 숙주나물과 미나리, 고기를 채 썰어 넣지만 우리 집에서는 김치의 빨갛고 매운 기를 살짝 걷어낸 뒤 넣었다. 가끔 귀한 손님이 오시는 날에는 녹두 녹말에 치잣물을 풀어 둥글고 바닥이 평평한 놋그릇인 반병두리에 담아 굳힌 황포묵을 청포묵 대신 올리기도 했다. 식재료에 노랑, 초록, 흰색, 검정, 빨강의 오색을 다양하게 써서 고루 어우러지게 한 것이 어린 눈에도 귀해 보였다. 탕평채는 오미와 오색이 조화를 이룬 대표 음식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겨우내 그저 그런 것들만 먹고 살던 입에 봄기운 완연한 재료로 호강시켜주는 것. 맛과 색은 물론 영양적으로 조화를 이뤄 입맛을 돋우는 전채 요리로도 제격이다. 1870년경 황필수의 <명물기략名物紀略>에 의하면 정조 때 사색당파의 탕평을 바라는 마음에서 갖은 나물을 섞은 것에 탕평채란 이름을 붙였다. 이렇듯 탕평채에는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함께 어우러져 균형을 이루며 살라는 옛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다. 그리고 내게는 할머니와 엄마의 손끝에서 완성되는 봄날의 특별한 음식으로 맛있게 각인되어 있다. 나는 지금도 봄이 되면 탕평채를 즐겨 만들고 즐겨 먹는다. 갖가지 재료를 모두 한데 무치는 것이 아니라 담음새에 재미를 준다. 청포묵에 김이 묻는 것이 싫어 숙주, 미나리, 쇠고기만 원형 틀에 담아 쌓고, 김은 따로 내어 섞어 먹을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담으면 보기에도 예쁠 뿐 아니라 식감도 좋다. 여기에 아작아작하게 씹히는 무초절임을 더해도 색다르다. 이렇듯 전통 음식의 의미를 알고 취향껏 즐긴다면 일상식으로도 더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

오감이 즐거운 계절이 바로 봄이니 이런 날엔 별식도 해 먹고 싶다. 봄철 양지바른 들판 위에 들쭉날쭉 돋은 쑥도 향긋한데, 야들야들 연하디연한 어린 쑥을 캐서 고운 멥쌀가루에 섞어 켜 없이 쪄낸 투박한 쑥설기를 삼짇날의 으뜸 음식으로 꼽기도 한다. 손끝이 야무지셨던 엄마는 남은 두부에 쑥과 고기를 넣고 완자를 만들어 애탕을 별식으로 만들어주기도 하셨다. 오미자가 한창이니 오미자를 물에 담가 끓여서 식힌 후 하룻밤 불렸다가 면포에 걸러 국물을 우린 뒤, 상큼한 창면을 넣으면 후식으로도 좋고 간식으로도 손색없다. 창면은 얇은 녹두국수 같은 모양으로, 차를 마시듯 먹으면 창면이 입으로 호로록 들어가 먹는 재미가 있다. 삼짇날은 완연한 봄기운을 즐기는 때다. 계절을 즐길 수 있는, 소박하나마 참한 음식으로 입과 눈을 호강시키는 것은 어떨는지.


탕평채
재료(4인분)
청포묵 200g, 쇠고기 60g, 숙주 100g, 미나리 30g, 구운 김 1/2장, 소금·참기름 약간씩
쇠고기 양념 진간장 1작은술, 설탕·다진 파 1/2작은술씩, 참기름 1/4작은술, 다진 마늘·후춧가루 약간씩
초간장 식초·설탕·국간장 1큰술씩, 참기름 1/2큰술, 마늘즙 1작은술
만들기 1 청포묵은 가늘게 채 썰어 끓는 물에 데친다. 말갛게 되면 건져서 찬물에 헹군 뒤 물기를 걷는다.
2 쇠고기는 가늘게 채 썰어 분량의 양념 재료를 모두 넣고 볶은 뒤 식힌다.
3 숙주는 머리와 꼬리를 떼어내 다듬은 뒤 데친다. 미나리는 줄기만 손질해 4cm 길이로 썰어 데친 뒤 찬물에 헹궈 물기를 걷는다.
4 ①의 청포묵에 소금과 참기름을 약간 넣어 조물조물 무친다. ③의 숙주와 미나리는 한데 섞은 뒤 소금과 참기름으로 무친다.
5 분량의 재료를 모두 섞어 초간장을 만든다.
6 접시에 지름 10~12cm의 원형 틀을 놓고 그 안에 쇠고기, 숙주와 미나리, 청포묵 순으로 얹는다. 그 위에 ⑤의 초간장을 뿌리고 구운 김을 부수어 얹거나 옆에 곁들인다.

애탕
재료(4인분)
쑥 100g, 다진 쇠고기 100g, 두부 50g, 국간장·참기름 1작은술씩, 육수 3~4컵, 녹말가루·소금·후춧가루 적당량
쇠고기 양념 국간장·다진 마늘·다진 파·참기름 1작은술씩,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만들기 1 쑥은 다듬어 씻은 뒤 끓는 물에 소금을 약간 넣고 데친다. 그런 다음 찬물에 헹궈 물기를 꼭 짜고 곱게 다진다.
2 다진 쇠고기에 분량의 재료를 모두 넣고 양념한다.
3 두부는 마른 면포 위에 놓고 칼날을 눕혀 으깬 다음 물기를 없앤다.
4 볼에 ①의 다진 쑥과 ②의 다진 쇠고기, ③의 으깬 두부를 넣고 국간장과 참기름, 소금을 넣어 오래도록 치댄다. 이것을 지름 1cm 크기로 완자를 만들어 녹말가루를 고루 묻힌다.
5 육수를 센 불에 올려 끓으면 ④의 완자를 넣고, 둥둥 떠오르면 소금과 후춧가루로 간한다.

창면
재료(4인분)
녹두 녹말 2큰술, 물 180ml, 소금 약간
오미자 물 오미자 시럽·물 1컵씩
만들기 1 녹두 녹말에 분량의 물을 넣고 숟가락으로 잘 저어 응어리가 지지 않도록 푼다.
2 깊이감이 약간 있는 평평한 그릇에 ①의 녹말물을 2mm 정도 두께로 붓는다.
3 냄비에 물(분량 외)을 넣고, 끓으면 불을 약하게 줄이고 물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면 ②의 그릇을 물 위에 띄운다.
4 그릇의 녹말물이 말갛게 변하면 그릇째 물속에 집어넣어 5~7분 정도 익힌다. 다 익으면 그릇을 꺼내 흐르는 찬물을 끝 쪽에 흘려 넣어 창면을 조심스레 떼어낸 뒤 채 썬다.
5 오미자시럽에 물을 넣고 섞은 뒤 볼에 담고 ④의 창면을 띄운다.

진달래화전
재료(20개분)
진달래꽃 20개, 찹쌀가루 2컵, 꿀 3큰술, 끓인 물 2큰술, 식용유 약간, 설탕 적당량
시럽 설탕·물 1/2컵씩
만들기 1 찹쌀가루에 꿀을 넣고 싹싹 비벼 섞는다.
2 ①에 끓인 물을 부어 대충 섞은 다음 여러 번 치대 매끈하게 반죽한다. 반죽 상태를 보고 물을 더 넣어 말랑하게 반죽한다.
3 진달래꽃은 수술을 떼어내고 꽃잎째 씻은 다음 물기를 제거한다.
4 센 불에서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약한 불로 줄인다.
5 반죽을 20등분(15g 정도씩)해서 동글납작하게 빚어 팬에 넣고 지진다. 한 면이 익으면 뒤집어서 진달래꽃을 붙이고 숟가락으로 살짝 눌러 모양을 잡아 말갛게 되도록 익힌 다음 꺼내 시럽을 묻힌다.


 요리 노영희(스튜디오 푸디)

구술 정리 신민주 기자 | 사진 김용일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2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