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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농사꾼 홍쌍리의 음식인연
전남 광양 백운산 자락에 있는 청매실농원, 그곳에 가면 언제나 들꽃 향기 그득하다. 홍쌍리 여사가 야생화와 매실을 자식같이 키우며 약상 같은 밥상을 차려내니 향기로운 서정에 이끌려, 구수하게 맛이 든 밥상에 이끌려 마치 정해진 약속처럼 인연들이 찾아왔다.


“내 고달픈 몸과 서러운 마음을 세상에 붙아준 게 꽃이었어예. 꽃이 아니면 나는 죽었지 싶으요.
꽃이 맺어준 좋은 인연 덕에 도타운 정 나누며 부질없는 세상도 정답게 살고 있소.
요즘은 꽃딸들 보살피고 인연들에게 먹을거리 해서 보내는 재미로 산다 말이지예.
나이 들고 보믄 객지에 있는 피붙이 같은 이들에게 먹을거리 해 보내는 재미가
얼마나 맛있는지 안 해보면 잘 모를 겁니데이.
보고 싶은 인연들이여.눈 내리고 비바람 부는 그 아픔도 이겨낸 야생화 뿌리처럼
해마다 다시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인생의 꽃이 되이소. 이 여인은 고향 같은 농민이 될께예.”


(왼쪽) 봄날에 가신 매화꽃 천국의 아버지 법정 스님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스님이 뒷짐을 지고 이곳에 오셨다. 워낙에 매화꽃을 좋아하셔서 여기저기 많이 다니셨는데, 곱고 기특한 내 꽃딸들이 스님 마음을 맑게 해주었나 보다. “저 꼭대기에다 매화꽃을 다 심어서 여기를 천국으로 맹글어라. 마음에 찌꺼기가 있는 사람 다 버리고 갈 수 있게.” 덜컥 겁이 나 “스님, 나 못혀요” 했지만, 내 할 일이다 싶어 그날 이후로 밤나무를 다 베어내고 그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고 구절초를 심었다. 스님이 매화꽃을 보러 오실 때마다 친정아버지 기다리는 마음으로 설레고 시아버지 맞이하는 마음으로 긴장되어 음식에도 신경 썼는데, 땅콩죽과 백김치를 꼭 냈다. 대쪽 같고 말간 스님 성품에 맞게 하얀 그릇에, 은수저로 정갈하게 차려냈더니 맛나게 잘 드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재작년 매화꽃이 필 적에 오셔서 산을 빙 둘러보고 섬진강 바라보며 쉬다가신 게 스님의 마지막이었다.
그러고는 이듬해 봄에 우리 곁을 영영 떠나가셨다. 왜 하필 매화꽃이 한창인 봄날에 돌아가셨을까. “이 매화꽃이 스님 보고 싶어 어찌 견디라고요. 이 매화꽃 딸들이 스님 그리워서 어떻게 견디라고, 이 봄날에 가셨능교.” 이 글귀를 써놓고는 찔찔 울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흙이 다독여주었다.
“마음껏 울어삐라. 눈물이든 콧물이든 다 받아두었다가 매화나무 물 마시고 싶을 때 줄란다.”

땅콩죽과 백김치. 땅콩죽은 보통 닭백숙 삶은 국물에 끓이는데 스님 밥상은 땅콩만 곱게 갈아 묽게 쑤었다.

(오른쪽) 엄마 찾아 먼 길 간 내 동생 <오세암> 동화 작가 정채봉
채봉이는 참 아이 같다. 잘 웃는 것도,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도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을 가슴 가득 안고 사는 아이 같다. 눈만 몇 번 끔벅끔벅하면 그새 눈물이 맺혀서 “니 눈은 언제고 이슬 마를 날이 없노” 놀리기 일쑤였지만, 한 팔로 얼굴을 가리고 훌쩍훌쩍 우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도 울적해져서 눈시울이 젖곤 했다. 채봉이도 나처럼 엄마 없이 살아와서 그리움과 서러움이 가슴 한구석에 한恨으로 쌓인 모양이었다. 한 번이라도 엄마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오세암>의 길손이는 딱 채봉이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엄마를 묻은 채로 남매가 되어 서로를 보듬고 살았다.
가끔 샘터출판사 직원들을 데리고 왔는데 나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채봉이는 매실농축액으로 무친 겉절이나 서대 생선구이, 콩장을 아주 잘 먹었다. 특히 부추전을 어찌나 맛있게 먹는지 채봉이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절로 불렀다. 반찬이 떨어지면 “누님, 반찬 떨어졌소”하고 전화하던 채봉이가 간암으로 투병하던 어느 날엔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는 법정 스님 하고 누님 말 좀 들을 걸 그랬어. 법정 스님이 ‘풀 이파리만 먹어도 사니까 강원도로 오니라. 이 천국에 오면 내가 니 수발해줄게’ 하셨거든” 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하더니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법정 스님을 아버지같이 섬기며 살아온 그 옛날이 정말 그립다. “동성아, 아프지 말고, 술도 많이 마시지 말고 행복하거라. 이제 다 가버리고 내 혼자 남았으니 외로워서 우짜노.”

서대 생선구이와 콩장, 온갖 풀 이파리 다 들어간 매실농축액 겉절이, 그리고 부추전. 부추전은 홍합과 재첩,
바지락 등 조개 세 가지에 청양고추, 부추, 양차, 당근, 마늘 등 갖은 채소를 다져 넣고 밀가루를 개는데, 늘 멸치 다시마 국물에 개어 구수한 맛을 냈다.


밥상이 작품이라던 아름다운 이
<뿌리 깊은 나무> 발행인 한창기
한창기 사장은 좀 특별한 사람이었다. 멋진 모자와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오면 저만치 들어설 때부터 매화나무도 그 바람결에 신이 나서 춤추며 반겼다. “매화 가스나들 마음까지 살랑살랑 설레게 할 만큼 멋진 분이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나 같은 촌댁도 쉬이 읽히는 좋은 잡지 맹글 생각을 어쩌코롬 했을까.”

한 사장은 밭에서 나는 것보다 가죽이나 응개같이 나무에서 나는 걸 좋아하셔서 제철이 아니면 얼려두었던 것을 무쳐 밥상에 올리곤 했다. 당신 생김새와 달리 음식도 투박한 항아리
뚜껑같이 생긴 그릇에 담아내면 허허 웃으시기에 일부러 손때 묻고 이가 나간 그릇에 모양새나마 정갈하게 담아내곤 했다. 하나같이 시간이 오래 걸리고, 손님상에 내놓기에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음식들인데도 입에도 대기 전부터 “밥상이 작품이다” 칭찬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귓전에 남아 있다. 밥상을 차려내면 동행한 이들에게 “한 번 잘 보고 먹어라” 이르곤 하셨는데, 밥상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맵고, 짜고, 시고, 떫고, 쓰고…오미오색이 여기 다 들어서였다.

“사장님예, 그 먼 곳에서 매화꽃이 보고 싶어도 잘 계시지예. 매화꽃 피는 봄날에 가끔 사장님 생각나면 꽃반지, 꽃왕관을 만들어 쓰고 열아홉 살 바람난 가스나같이 오늘도 흙 묻은 호미 들고 산을 오릅니데이.”

가죽 매실고추장무침과 살짝 데친 응개와 초고추장, 더덕 꿀 절임과 고추장 도라지구이. 더덕과 도라지는 물에 담갔다 물기를 빼고 마른 팬에 수분이 없어질 정도로만 살짝 구우면 아삭아삭하다. 그렇게 구운 더덕은 어슷 썰어 꿀에 재운 뒤 냉동실에 두고, 납작 구운 도라지는 끓인 고추장 양념장을 고루 발라 재운다.


(왼쪽) 나는 바늘, 너는 실 탤런트 고두심
내가 ‘아주 예뻐라’ 하는 이가 고두심이다. 벌써 20년지기인데, MBC 다큐멘터리 <자연밥상>을 함께 촬영하며 우리 음식 알리는 데도 한몫하려고 하니 안 그래도 고운 이가 더 곱다. 게다가 음식을 차려주면 잘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들여다보고 이러쿵 저러쿵 하나라도 배워가려고 품평도 잘해서 예쁘다.
우리는 천생연분인지 “언니, 나 아무래도 넘의 된장 못 먹겠다. 와 이렇게 씁스룩하노.” 그 길로 김치랑 된장,
고추장을 싸 보내면, “내는 산에서 아지메들하고 일할 때 종일 재미있다” 한마디에 새참하라고 제주도 보리빵을 듬뿍 보내준다.묵은지에 시골 장맛 좋아하는 이답게 성품도 구수해서, 가끔 내려오면 초가집 툇마루에 퍼질러 앉아 쌈밥 먹는 것을 그렇게 즐거워한다. 호박잎이며 깻잎, 양배추잎을 쪄 가지고 자소겹, 질경이,
씀바귀에 제비꽃 잎파리까지 떡 하니 얹어서 막된장까지 떠 얹고 입이 째지도록 넣는 모습을 보면 여지없는 촌 아낙네다. “동성아, 너가 내 동생이 됨이 정말 행복해. 된장 고추장 다 떨어지면 언제든 말하고 건강해다오.”

제철 채소 쌈에 막된장, 묵은지.

(오른쪽) 참하고 소박한 스타 배우 배용준
배용준 씨는 포토 에세이집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이 인연이 되어 만났다. 내심 ‘아주 깔끔허게 생긴 게 촌 음식을 먹겠나’ 생각했는데, 죽순나물이며 매실장아찌에 촌 강된장을 밥에 쓱쓱 비벼 맛있게 먹던 모습이 제법 폼새가 났다. 꾹꾹 눌러 담은 밥 한 그릇까지 싹싹 비우기에 저 음식이 새같이 가벼운 몸 어디로 다 들어가나 했는데, 나중에 책을 받아보니 약상 받은 소감이 이렇게 쓰여 있었다.
“배는 불러 죽겠는데, 손이 배신하지 않는다.”
책 쓸 때는 매큼한 게 좋겠다 싶어 잘 먹던 것으로 반찬을 해보냈더니 단주 선물과 어머니같이 따뜻한 마음이 고마웠다며 답장을 보내왔다. 용준 씨도 아무도 없는 산속에서 악 한 번 써뿔고 흙냄새 한 번 맡아보면 마음 한구석 막힌 곳 없이 시원할 텐데.
“용준 씨야, 마음의 찌꺼기 과감하게 버리고 이 좋은 가을 들판에서 흐드러지게 핀 향유와 구절초 향기 속에 자연과 얘기해봐라. 가슴이 후련하도록 소리 내어 크게 웃어도 보고 크게 소리도 질러봐라. 용준 씨야, 옷에 흙 묻으면 어떻노? 좀 더러워지면 어떻노?”

죽순나물, 매실장아찌와 청매실절임 황금알.


(왼쪽) 맛난 것만 먹이고 싶은 내 아들
드라마 작가 최완규

완규는 아들이나 다름없다. 드라마 <올인> <주몽> <아이리스> 때도 시간에 쫓기며 집필하는 일이 고된지 담배를 입에 물고 살아 늘 잔소리를 하게 한다. 글은 아들이 쓰기보다는 담배가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덩치에 안 맞게 입맛은 꼭 아이 같아서 애미가 해주는 반찬 중에 김치가 제일 맛없고, 멸치볶음이 제일 맛있다고 하니, 내 눈에는 천생 마음 쓰이게 하는 막내아들만 같다. 가끔 우리 집에 오면 매실 아이스크림만 다섯 개를 먹기도 한다. 먹는 게 부실한 처지가 딱해 밑반찬이며 약이 되는 먹을거리를 열심히 챙겨 보내는데, 좋아하는 멸치볶음을 만들 때는 땅콩이며 아몬드며 잣이며 견과류를 되는 대로 넣는다. 달기만 하지 않도록 씁쓸한 맛도 나게 몸에 좋은 재료를 서른세 가지나 넣은 수수조청을 넣어 만든다. 꼭 챙겨 먹으라고 꾹꾹 눌러 쓴
손편지도 매번 같이 넣는다.“아들이 책상이 아닌 밥상에 앉아 먹을 생각만 해도 이 애미는 콧소리가 절로 난다. 밤 한 알 한 알 까면서, 이 밤을 먹으면서 담배 한 개비 덜 피우겠지, 잇몸이 여물어 치아도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니 이 애미는 기분이 만당고다. “아들아, 맛있고 먹고 싶은 거보다 맛없는 것 먹고 건강한 생각하자. 건강한 몸으로 세상 사람 다 보듬을 수 있는 국민 작가로 영원히 시들지 않는 인생의 꽃이 되어다오.”

매실 아이스크림과 수수조청 넣은 견과류 멸치볶음.

(오른쪽) 나누고 싶은 시골 인심
밥 도둑놈, 촌 강된장
“사람을 딱 보면 ‘저 인품은 음식을 이렇게 해봤으면 좋겠네’ 그게 딱 생각나더라고예. 워낙 사람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근데 이상하게도 강된장은 다들 좋아하더라고. 도시에 사는 사람도 촌 음식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는 거 같으요. 촌사람은 자고 일어나면 세수하고 바로 밭으로 가지예. 고추 따고, 콩잎 따고, 깻잎 따고, 호박잎 따고…. 아침마다 그러요. 그거 딱 씻거 놓고, 물 좀 빠지게 해놓고, 오목한 그릇에 버섯에다 죽순에다 당근, 양파, 대파, 재첩이며 홍합 등 조개에 땡초, 된장, 마늘까지 섞고 멸치 다시마 국물을 좀 부어 강된장을 만드요. 강된장 그거를 물 안 붓고 그냥 밥 안친 솥 안에 딱 넣고, 불 때면 밥물이 넘어 들어가지예. 밥이 어느 정도 되면서 밥물이 넘어 들어갈 때쯤에 밥솥에 호박잎이나 깻잎, 양배추잎 뜯어넣고 푹 찌면, 찬은 김치 하나면 되지예. 남들은 소박하다고 하지만 내한테는 진수성찬이 따로 없소. 그라고 누구나 때 되면 같이 밥 먹여 보내는 시골 인심이 좋아 나는 촌댁이 됨이 아주 행복합니데이.”


요리 홍쌍리(청매실농원 식품명인) 스타일링 서영희 일러스트 김진이  캘리그래피 강병인

진행 신민주 기자 사진 김정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