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이전 거룩한 꽁보리 주먹밥의 추억
‘찢어지게’ 가난하던 이 시절에는 전쟁 후 미군에서 원조받은 옥수숫가루를 주식으로 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루 한 끼도 겨우 때우는 학생이 많아 학교에 빈 도시락에 숟가락, 소금만 챙겨가 옥수숫가루로 쑨 죽을 배급받곤 했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으면 보리밥에 장아찌나 고추장볶음을 소로 넣고 똘똘 뭉쳐 주먹밥으로 먹거나 고구마나 감자 찐 것에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는 정도인데, 보잘것없던 꽁보리 주먹밥 하나가 거룩해 보여 꼭꼭 씹어 아껴 먹곤 했다. 입가에 밥풀이 한두 개 묻어 있어도 창피하기는커녕 얼른 떼어 입에 넣을 만큼 먹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이런 때 ‘신선로표 미원’의 등장은 식품업계에 개벽이나 다름없었다. 주방 찬장에 놓인 미원 통은 오브제가 되어 ‘좀 사는 집’이라는 부의 상징이었다. 특히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지만, 미원의 전신인 ‘아지노모도’는 일본의 인공 조미료로 그 시절 주부에게는 로망이었다. 아지노모도가 듬뿍 들어가면 고급 요리 대접을 받았다니 오죽했을까.
1960년대 마음 졸이던 도시락 검사 시간
‘넷만 낳아 잘 키우자’는 가족계획 구호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던 1960년대에 학교를 다닌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학생들로 빽빽한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에서 도시락을 ‘까먹던’ 추억이 남다르다. 교실에는 단골 메뉴였던 김치볶음과 콩자반 등 반찬 냄새가 늘 진동했고, 난로에는 양은 도시락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제일 아래는 밥이 타버려서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명당이었는데, 하도 도시락 자리를 두고 신경전이 심해서 당번을 정하기도 했다. 매일 점심시간 벌어지던 ‘도시락 검사’도 진풍경인데, 1960년대는 초반부터 실시한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보리 30%와 쌀 70%를 혼합한 보리밥으로 도시락을 싸야만 했다. 검사 시간이 가까워오면 친구에게서 보리쌀알을 빌려 쌀밥에 하나하나 박아 넣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분식의 날’도 있어서 이날에는 밀가루 찐빵이나 옥수수술 찐빵을 만들어 도시락을 싸야 했다. 전날 밤, 허연 밀가루빵이나 노란 술빵이 그릇 위에 놓여 있을 때면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고.
1970년대 반찬 짱이 인기 짱
분식 장려로 오히려 밀가루값이 비싸지자 1974년에는 종래의 혼분식 장려 계획을 바꾸어 ‘혼식’만 장려했다. 이른바 ‘보리쌀 더 섞어 먹기’ 시민운동이 전개되었을 정도로 툭하면 대국민적인 식생활 개선 운동을 하던 시절이다. 그만큼 식량 부족이 심각하던 때였다. 빈부 격차도 심해 도시락을 보면 사는 모양새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점심시간이면 허리를 꼿꼿이 펴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슬그머니 없어지는 아이도 있었다. 부추김치같이 냄새 나는 반찬이나 고작해야 고추장볶음을 싸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색깔도 고운 분홍빛 소시지에 달걀물을 입혀 전을 지지거나 달걀말이를 해 오는 아이도 있었다. 맛있는 반찬을 싸 오는 아이가 얼굴 예쁜 아이보다 인기 있고,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선망의 대상인 시절이다. 서민들의 현대 구황음식인 라면도 이때 쏟아져 나왔는데, 거버 이유식병에 김치를 담아 라면 봉지에 넣어 노란 고무줄로 꽁꽁 싸맸는데, 그래도 김치 국물은 어김없이 흘러 책에 붉은 자국을 선명하게 남기곤 해 말끔한 교과서가 오히려 귀했다.
1980년대 유행의 선도자, 고속 식품과 코끼리표 보온도시락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경제가 고속 성장하자 도시락 반찬은 물론 용기에도 일대 변화가 일었다. 먼저 ‘고속 식품’이란 별칭답게 조리 시간이 짧은 인스턴트식품이 대거 등장했다. 소시지가 줄줄이햄으로 바뀌고, 스팸은 귀한 ‘미제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자동판매기도 이때 등장했다. 1970년대까지 대접받던 밀가루와 더불어 설탕, 소금이 1980년에 들어서자 백색 유해 물질 취급을 받았는데, 그 와중에 떠오른 별이 다시다다. “그래, 이 맛이야”라는 광고 문구는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되었을 정도. 특히 80년대에는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중동의 건설 현장으로 외화 벌이를 갔는데, 신기하게도 귀국길에는 저마다 일본에 들러 한 손에는 코끼리표 밥통으로 불리던 조지루시 압력밥솥을, 다른 한 손에는 소니 스테레오를 사 들고 왔다. 그 영향은 도시락에도 이어져서 코끼리표 보온 도시락 하나 갖는 것이 학생들의 소원이었다. 보온 도시락 하나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던 시절이니, 오늘날의 명품 가방에 비할까.
1990년대 도시락의 화려한 시절은 가고
1990년대에 이르자 그토록 희구하던 지구촌 시대가 도래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다국적 기업의 더욱 강해진 파워다. 패스트푸드 전문점이 부쩍 많아졌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온 가족이 외식 한번 하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가 되었다. 외식 문화가 발달하면서 또 한 가지 변화가 생긴 것은 요리 전문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다는 것. 그만큼 이제는 생활이 윤택해져 먹고사는 것이 문제이던 시절에서 ‘잘 먹고 살고 싶은 욕구’가 커진 시기였다. 도시락 용기도 스테인리스나 양은 일색이던 시대는 가고, 가지각색 플라스틱 용기가 대부분이었다. 반찬도 닭강정이며, 샐러드, 전 등으로 보다 화려해졌다. X세대로 대표되는 이 시대의 개성이 도시락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른바 ‘도시락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한 시절은 짧았다. 도시락도 이즈음에 퇴락의 길로 들어섰다. 학교 급식이 본격화되어 학생들이 도시락 대신 식판에 밥을 담았다. 그 때문에 도시락은 소풍 날 김밥을 싸는 정도의 의미로 전락했지만, 도시락에 대한 추억은 여전하다.
2000년대 미식 즐기는 슈퍼 도시락
우리는 영웅에게 ‘슈퍼 SUPER’라는 칭호를 쓴다. 인스턴트식품과 패스트푸드로 ‘한 끼 때우던’ 현대인의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고,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음식에도 이른바 ‘슈퍼푸드’가 등장했다. 눈에 띄게 소비가 는 것은 브로콜리와 샐러드용 채소였다. 각종 스트레스와 잘못된 식습관으로 성인병과 바이러스에 시달리자 음식을 약으로 삼는 이들이 늘어난 것. 생활 전반에 웰빙이 트렌드로 떠오르면서 ‘잘 먹고 건강한’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는 인식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었다. 매 끼니를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식문화 자체를 즐기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대장금> <식객> 등 트렌드에 민감한 드라마와 영화는 물론 만화까지 식문화를 다루면서 미식을 즐기는 내용이 ‘대박’을 터뜨렸다. 특히 그간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한국의 전통 음식에 관심이 커져 선조들이 즐기던 쌈밥이나 연잎밥 같은 음식이 도시락 메뉴로 등장했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건너온 마크로비오틱의 영향으로 현미가 밥상 위는 물론 ‘도시락의 스타’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현재 내 마음대로 도시락 시대
날씬한 몸매를 향한 여성들의 욕구는 다이어트 도시락으로 이어져 회사에 도시락 가방을 싸 들고 다니는 이들이 제법 늘었다. 그마저도 귀찮은 이들은 주문 도시락을 이용한다. 영양의 균형에 맞게 메뉴를 짜주는 전문 업체가 속속 생겨나 입맛대로 도시락을 주문할 수 있는 것. 그중에서도 요즘 트위터나 인터넷에 올라오는 이른바 ‘아이돌 서포트 도시락’은 주문 도시락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팬들이 자신의 우상을 위해 맞춤 도시락을 주문하는 것으로, 메뉴와 담음새에 아이디어가 넘쳐난다. 그뿐인가. 마트는 물론 편의점만 가도 저렴한 가격의 도시락이 눈에 쉽게 띄는데, 식재료값이 인상하면서 덩달아 오른 식당 음식보다 깔끔하고 식감도 우수하다는 반응이다. 2천~4천 원대 가격으로 주머니가 가벼운 20대 젊은이나 학생, 알뜰한 싱글족이 즐긴다. 그와 정반대로 고가의 식재료로 만든 럭셔리 도시락도 떠오르고 있는 추세다. 고급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으로 한 번에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인기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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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 박경미(동병상련 대표 02-391-0077) 스타일링 서영희 어시스턴트 임지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