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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명요리 학교]이탈리아 미식학대학에서 유학 중인 <조선일보> 김성윤 기자 더 넓고 더 깊게 들여다보기
요즘 도심에서 잘나가는 레스토랑의 요리사를 만나 보면 해외 유명 요리 학교 출신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외국의 요리 학교에 유학 중이거나 요리 유학의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음식에 관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선일보> 음식 담당 김성윤 기자와 다큐멘터리 <누들로드>로 방송대상을 거머쥔 KBS의 이욱정 PD도 현재 요리 유학 중입니다. 대체 무엇을 어떻게 가르치기에 ‘음식에 미친’ 이들을 그 멀리까지 날아가게 했는지, 두 남자의 생생한 유학 일기가 지금 시작됩니다. 유학 준비생을 위한 세계의 요리 학교 정보 모음도 놓치지 마세요.


1 생파스타 만들기 시연.
2 요리의 기초 원리 강의 및 시연.
3 2년 숙성한, 돼지목살로 만든 생햄.


음식 기사를 마감 중이었다. 강원도 어느 지역의 별미 소개 기사로 기억한다. 뭘 보고 베끼는 것도 아닌데, 어디선가 본 듯한 문장이었다. 이상해서 내가 쓴 과거 기사를 찾아봤다. 이럴 수가, 2년 전 쓴 기사에 같은 지역 같은 음식을 실은 똑같은 문장이 있었다. 나 스스로를 표절했구나. 새로운 글이 나오지 않는구나. 완전히 고갈됐구나. 떠나거나, 재충전해야겠다. 2008년 그러니까 <조선일보> 입사 9년 차, 음식 담당 기자 5년차 때 일이다. 다른 분야나 업종으로 떠나기 전 재충전해보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연수를 준비해 2010년 3월 이탈리아에 왔다. 미식학대학 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s의 ‘음식 문화와 커뮤니케이션 Food Culture and Communications’이라는 1년짜리 석사 과정에서 공부 중이다. 미식학대학은 이탈리아에 본부를 둔 세계 슬로푸드 Slow Food 협회에서 설립한 대학이다. 학교 이름을 ‘미식학대학’이라고 번역하는 경우도, ‘미식 과학 대학’이라 번역하는 경우도 봤다. ‘science’는 좁은 의미에서 ‘과학’이지만 넓게는 학문을 뜻하고, 학교에서 음식을 다루는 시각이나 방법도 과학보다는 학문 전반적으로 다룬다. 그 때문에 개인적으로 미식학대학이 더 정확하다고 본다. 이름 자체가 생소하고, 정확한 번역이 없을 만큼 설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이탈리아 사람들도 잘 모른다. 미식학대학 다닌다고 하면 대개 “아, 이탈리아 음식 배우러 온 요리사세요?”라고 묻는다. 2004년에 대학이 세워졌고, 대학원 과정은 2007년에야 만들어졌다.


4 밀라노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서, 이탈리아를 찾아온 후배가 찍어준 사진.
5 베로나에서 맛본, 토끼 간을 넣은 페투치네.


슬로푸드 운동의 철학 위에 세워진 학교 음식을 공부하지만 요리를 배우지는 않는다. 손에 물 묻히거나 칼 쥐는 일도 없다. 그렇다고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미각의 사치를 가르치는 학교도 아니다. ‘무엇을 먹느냐’보단 ‘어떻게 먹느냐’에 얽힌 가치를 찾는 데 초점이 맞춰진 학교이다. 현대인이 잃어가는 음식의 가치를 찾으려는 슬로푸드 운동의 기본 철학을 학문적으로 풀어내는 교육 기관이다. 역사, 기호학, 사회학, 인류학, 생물학, 화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해 음식을 접근하고 이해한다.
음식에 관심이 있지만 요리사가 될 생각은 없는,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맞춤한 대학이고 과정이다. 커리큘럼 중 특히 ‘음식 글쓰기(Food Writing)’에 관심이 갔다. 앞으로 한식을 해외에 소개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듯싶다. 실제로 수업은 훌륭한 영어 글쓰기 훈련이고, 자신감도 얻었다.
새로운 개념의 학교라 그런지 학생을 뽑는 방식도 색다르다. 추천서, 영어 점수, 졸업증명서 따위의 일반적인 대학원 입학에 필요한 서류 외에 ‘동기 테스트(Motivational Test)’란 걸 작성해 제출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왜 우리 학교에 지원했나요”를 물어보는 것이다. 여기에 포함된 질문이 독특하다. ‘식사에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는가?’처럼 음식과 관련된 질문은 그나마 평범하다. ‘휴가 때 하기 싫은 일은?’처럼, 도대체 왜 이런 걸 묻는지 모를 질문까지, 무려 24가지 질문에 서술형으로 답해야 한다. 처음에는 ‘질문의 의도가 뭘까’ 고민하다가, 15번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그냥 질문을 즐기면서 생각나는 대로 답했다. 돌아보니, 학생 개개인의 성격과 성향을 파악하는 질문이 아니었나 싶다.

대학원은 이탈리아에 있지만, 수업은 100% 영어로 진행된다. 영어로 진행되는 과정과 이탈리아어로 진행되는 과정이 구분돼 있다. 3년제 대학(undergraduate) 과정은 이탈리아어 중심이다. 대학과 이탈리아어 대학원 과정이 있는 본교는 피에몬테 주의 브라Bra에 있고, 영어 대학원은 에밀리아 로마냐 주의 파르마 Parma에 있다. 브라는 슬로푸드 본부가 있는 도시이고, 파르마는 ‘파르메산 치즈’로 널리 알려진 파르미자노레자노 치즈와 ‘이탈리아 햄의 왕’이라는 프로슈토의 고향이다.
외국에서 유학온 대학원생들은 당연히 영어 과정에 집중된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음식 환자’들로 가득하다. 내가 공부 중인 과정에는 미국, 프랑스, 독일, 그리스, 멕시코, 대만, 일본 등 14개 국적 26명이 등록돼 있다. 이렇게 국적이 다양하기는 개교 이래 처음이란다. 그 때문에 교직원들은 우리 반을 ‘유엔 UN’이라 부른다.

1 미식학대학의 파르마 캠퍼스 전경.
2 음식을 만든 후 "왜, 어떻게 만들었나"를 설명하고 서로 맛본 수업.


요리 기술 빼고 다 배운다 학교로부터 많은 걸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어쩜 이렇게 체계가 없고 엉성할까’ 싶어 신기할 정도다. 수업이 예고 없이 취소되거나 연기되는 건 다반사. 대학원은 저명한 학자를 초빙해 수업을 하는데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외지의 교수들이 수업을 위해 도착하면 항상 놀란다. 교수는 “수업 전 읽어야 할 자료를 두달 전에 학교 측에 보냈다”는데, 정작 학생들은 강의가 시작되고 나서야 자료를 받는 경우가 반 이상이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학사 일정은 강의 내용은 고사하고 제목도 없이 교수 이름만 달랑 있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학생을 ‘고객으로 모시는’ 대학에 익숙한 미국 학생들이 특히 그렇지만, 다른 나라 학생들도 불만이 많다. 하지만 이탈리아 학생과 교수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음식을 더 넓고 깊게 볼 수 있는 단서와 계기, 동기부여를 원한다면 여기보다 더 좋은 학교는 없다. 쉽게 ‘미식학 대학’이라고 번역했지만, 흔히 생각하는 미식 美食은 수업의 일부이다. 물론 이틀 동안 여섯 시간에 걸쳐 햄과 소시지 50가지를 맛 본다거나, 하루에 30가지의 치즈를 평가하는 ‘평범한’ 미식 수업도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는데, 미국에서는 비만이 질병으로 규정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 까닭은? ’‘중국의 부상과 세계 곡물 가격의 변화’ 등 음식과 관련된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이슈를 배우고 토론한다. 대학원 과정에 여섯 번의 여행이 포함되는데 가장 즐겁고, 또 가장 많이 배우는 기회이다. 이탈리아 내의 세 지역과 유럽 세 나라를 찾는다. 올해 우리 반은 이탈리아에서는 칼라브리아와 프리울리, 토스카나 지방을 방문했고, 유럽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과 벨기에,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을 다녀왔다. 포커스는 음식, 유적 관람이나 쇼핑은 포함되지 않는다. 일반 관광객이 가지 않고 가지 못하는 시골을 찾아가 치즈, 햄, 올리브유, 와인 따위의 지역 특산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배운다. 세계적으로 관심 높은 ‘지중해 식단’의 본고장인 크레타 섬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학생들끼리 서로 배우는 것도 수업 시간에 배우는 것 못지않다. 주말이면 여러 기숙사 중 한곳에 모여서 파티를 하는데, 이때 자기 나라 음식을 하나씩 만들어 참석한다. 음식에 관해선 웬만큼 안다고 생각했는데, 동기들과 얘기하다 보면 못 먹어본 음식도, 처음 듣는 음식도 너무 다양해 자극을 받게 된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학생도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다가 새로운 커리어를 찾으러 온 이들도 꽤 된다. 그 덕에 여러 업종에서 쌓은 지식과 식견을 공유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앞으로 음식과 관련된 분야에서 일할 이들이니 어디서건 만날 테고, 슬로푸드를 통해 세계적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1 꿀을 테이스팅 중인 캐나다 요리사 출신 린지.
2 스페인 안달루시아 수학여행 중 맛본 하몽과 셰리.
3 지중해 식단의 고향인 크레타 섬의 산골 마을.


파스타 취재하며 이탈리아 종단 여행 중 학교 수업은 지난해 12월 크리스마스 휴가를 앞두고 모두 끝났다. 1월부터 3월 10일 졸업 전까지 약 2개월 동안 학생들은 각기 인턴십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음식과 관련된 일, 학생이 관심 있는 일이면 뭐든 가능하다. 단, 자신이 선택하고, 연락하고, 인턴십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논문으로 정리해서 제출해야 한다. 일본에서 간호학을 전공하다 음식과 건강의 상관관계를 깨닫고 배우러 온 유이는 토스카나의 올리브 농장에서 일하고 있고, 오스트리아 광고 업계에서 일하던 카롤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유명 요리사들의 프로젝트 진행을 돕고 있고, 독일인 아버지와 이탈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산드로는 대학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다.

개인 프로젝트도 가능하다. 나는 ‘단일한, 통일된 이탈리아 음식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이탈리아 종단 여행 중이다. 이탈리아에 살다 보니 지역과 지역은 물론이고, 자동차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이웃 도시 간에도 음식이 달랐다. 이 다양하고 다른 음식을 ‘이탈리아 요리’라는 하나의 단위로 간편하
게 뭉뚱그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의문을 풀기 위해 지역별 음식을 비교 분석하기로 했지만 그 많은 음식을 모두 비교할 수는 없는 일. 파스타라는, 이탈리아 대표 음식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남부 네댓 지역의 대표 파스타를 하나씩 뽑았다. 파스타의 재료와 만드는 방식, 요리법, 소스, 서빙 순서와 방식 등을 비교하며 과연 ‘이탈리아적 특성’을 공유하는지 살펴보는 중이다. 1월 7일 이탈리아 최북단 볼자노에서 시작, 중부 볼로냐와 피렌체, 로마를 거쳐 2월 20일 현재 시칠리아 팔레르모에 있다.

곧 나폴리에 갔다가 3월 초에 이탈리아 반도의 ‘발가락’에 해당하는 레조 디 칼라브리아에서 여행을 끝낼 계획이다. 한 도시에 2주 정도 머물면서 지역의 대표 파스타를 포함한 전통 음식을 악착같이 먹고 마시는 중이다. 여행이 끝나고 졸업을 하면 이탈리아 음식 전문가가 될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이탈리아 음식이 뭐라는 감은 희미하게나마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번 연수에서 얻은 가장 중요한 소득은 아니다. 연수 오기 전, 음식이라면 지겹고 심드렁했다. 새로울 것이라곤 없는 것 같았다. 음식 기사를 쓰기 싫었다. 글쓰기 자체가 싫었다. 연수 와서 6개월 정도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여름이 지나자 ‘이건 써보고 싶다’는 의욕이 조금씩 살아났다. 그리고 지난 일 년을 정리하는 글을 여기 쓰고 있다. 음식과 글쓰기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났다는 것, 미식학대학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인 듯싶다.

미식학대학 University of Gastronomic Sciences
2004년 세계 슬로푸드 협회에서 이탈리아에 설립한 학교. 음식과 함께 과학, 역사, 경제를 접목해 미식학을 가르치는 형식의 독특한 커리큘럼이다. 3년의 미식학부 과정과 대학원 1, 2년 과정이 있다.
홈페이지 www.unisg.it
주소 폴렌조 캠퍼스 Piazza Vittorio Emanuele, 9 fraz. Pollenzo - 12042 Bra(Cn)/ 콜로르노 캠퍼스 Piazza Garibaldi, 23 43052 Colorno (Pr)
전화번호 +(39) 172 45 85 11/+(39) 521 81 11 11

글과 사진 김성윤(<조선일보>음식 담당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1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