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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차의 거칠 것 없는 생명력과 절개 금둔사 지헌 스님의 자생차
초파일이 들어 있는 5월은 절이 가장 분주하고 바쁠 때다. 연등을 만들고 청소를 하며 불자와 참배객을 맞을 차비를 한다. 올 초파일에는 도심을 떠나 산 속 깊이 자리한 좋은 절을 찾아가 차 한잔을 마심으로써 ‘차공양’을 해보면 어떨까. ‘차 한잔에 모든 행복이 깃들어 있다樂在一碗中’고 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만들어주는 사찰의 명차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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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청에 자리를 잡고 차를 마시는 금둔사의 주지인 지허 스님. 스님은 이 차를 한국인다운 ‘다정다감한 맛’이라 하셨다. 2, 3 절의 주변으로 야생으로 자라고 있는 차나무가 꽤 여럿이다. 절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9천여 평에 이르는 야생 차밭이 있다. 차를 만드는 어린 순은 아직 자라지 않았고 5월 말이 되어야 차를 수확한다. 4 지허 스님의 손에 차나무 씨가 들려 있다. 한국에서 5% 정도밖에 안 되는 순수한 토종 차나무의 귀한 씨다. 5 전통적인 덖음의 방법으로 만든 자생차.
 
photo01 서울은 이제야 벚꽃이 시작되고 있었는데, 계절을 앞서가는 금둔사는 봄꽃들로 이미 치장을 마쳤다. 객을 맞아주는 지허 스님의 첫 이야기도 꽃 자랑이다. 이곳의 매화는 음력 12월, 전국에서 처음으로 몽우리를 터트린다. 매화 중에서도 가장 먼저 피는 홍매화는 국내에서는 금둔사에서 유일하게 만날 수 있는 꽃이라고 한다. 한국 토착종인 홍매화는 일본에서 들여온 종과 달리 향이 진하고, 겨울이 추울수록 그 향을 더한다. 불교에서 이곳 홍매화를 특히 중요시 하는 이유는 음력 12월에 피기 때문. 12월은 부처님이 성도하신 달로, 세속의 나이와 상관없이 스님들이 입적한 때부터 따지는 ‘법랍’에 한 살을 더하는 달이다. “올해 나는 법랍 51세요.” 허허 웃음과 함께 스님은 차를 시작한다.
제일 먼저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다관이 데워지면 물을 모두 따라내고 빈 다관에 찻잎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한참 있다가 다관의 뚜껑을 비스듬히 열고 그 향을 맡아본다. 차의 향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비로소 뜨거운 물을 붓고 차를 우린다. 따뜻하게 데워진 다관에 찻잎을 넣고 향을 맡으면 적당한 습기와 열로 차향이 농축되어 올라온다. 스님은 이 향을 맡아 차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냄새가 나지 않는 것은 50%는 썩은 차요, 묵은내가 나는 것은 90% 썩은 차다.
기다리던 지허 스님의 자생차를 맛보았다. 자생차는 한국 고유의 차로, 야생으로 자라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전통적인 덖음의 방법으로 만든 차다. 지허 스님의 차는 차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데 과연 깊고 그윽한 구수한 맛이 다른 차와 견주기 힘들 듯하다. 절 주변에서 야생으로 자란 차나무의 잎으로 만드는데, 잎의 질이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자생차 만들기는 차나무 가꾸기부터 시작된다. 사람의 손길을 최소화하여 화학비료나 농약을 전혀 주지 않고 키워야 야생차를 만들 수 있다. 지허 스님의 말씀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의 차나무 중 85%는 일본에서 들여온 ‘야부기다’라는 종이고, 10%는 우리 전통 차나무이기는 하지만 비료를 주어 변종된 것이라고. 순수 자생차를 만드는 차나무는 겨우 5%뿐이다. 겉모습이나 생산량은 육종 실험으로 만들어진 야부기다를 따를 수 없지만 순수한 우리의 자생 차나무는 기개가 대단하다.
 
photo01 “훈민정음에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뮐세’라고 했는데, 차나무의 뿌리는 지상으로 올라온 나무 높이의 3~4배에 달하니, 이런 나무가 또 없지. 왜 이리도 뿌리가 깊은지 아시오? 저 깊은 땅속에 담백한 수분과 지구가 처음 생길 때의 무기질. 이것을 가장 좋아하는 것이 차나무라.” 예부터 차나무는 다른 곳으로 옮기면 죽는다고 했다. 그 깊은 뿌리가 땅이 바뀌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딸이 시집을 가면 시댁에 뿌리를 내리라고 차나무 씨를 가마에 넣었다고 한다.
금둔사 주변으로는 10년이나 가꾼 야생 차밭이 9천여 평이나 있다. 절의 본당을 둘러싼 산에 있는 차나무들은 야생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절에서 500m쯤 떨어진 곳의 양지바른 산기슭에 수천 평의 차밭이 펼쳐진다. 하지만 이곳의 모양새는 흔히 알고 있는 동그랗고 예쁘게 깎아놓은 차밭이 아니다. 그런 차나무는 찻잎을 따기 좋도록 기계로 깎아놓은 것이라고. 스님이 차나무를 다듬는 것은 길쭉하게 위로 나온 가지를 자르는 것이 전부다. 비료나 약 한번 줘본 적 없어도 차나무는 튼튼하다. 차나무는 벌레와 공존공생한다는 것이 스님의 설명이다.
“6월에 차를 다 따고 나면 잡초가 커서는 나무를 감싸버리지. 그러면 벌레가 나와서 억센 차나무 잎이 아니라 부드러운 잡초를 먹는 거요. 그러면 벌레도 살고, 차나무도 살고. 10월부터는 이듬해 봄까지 나무가 태양열을 받아야 하니 그때 잡초를 베는데, 벌레가 까놓은 알은 잡초랑 함께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니 잡초 제거하려고 농약 치면 어찌되겠소?” 인간은 자연을 제압하려고 제가 놓은 덫에 걸려들고 있는데, 느긋하게 자연의 섭리를 기다리는 불자는 가히 자연과 더불어 하는 것이 아닐까.
 
1. 지허 스님의 차는 향이 구수하고 깊다.
2.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금둔산 금둔사의 일주문.
 
사월 초파일이 지나면 절의 온 식구와 불자들이 총동원되어 찻잎을 딴다. 이 무렵은 차의 새순에 가장 원숙한 맛이 돌 때. 가운데 뾰족한 순이 하나 있고, 그 옆으로 벌어진 두 개의 잎이 있는 상태가 최고의 맛을 낸다. 이런 잎을 창 하나에 깃발이 두 개라는 뜻으로 ‘일창이기一槍二旗’라 부른다. 스님은 이 원숙한 맛이 ‘한국차의 이정표’라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따온 차는 그날로 멍석에 널어 말리고 가마솥에 덖기 시작해야 한다. 차는 만드는 법에 따라 찐차, 완전발효차, 반발효차, 덖음차로 나뉘는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덖음이다. 찐차는 자칫 비릿내, 풋내가 날 수 있고, 발효차는 발효한 향이 날 수 있는데 무쇠 솥에 덖어서 만든 우리 차는 고소하고 담백하며 맛이 깊다. 그 향을 스님은 ‘다정다감한 향’이라 이른다. 차는 5월 20일쯤 되어야 따기 시작한다는데, 시기를 맞추지 못해 그 과정을 눈으로 보지는 못해도 이야기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롭다.
우선 갓 따온 찻잎을 멍석에 널어 찻잎에 남은 태양열을 식힌다. 이것을 아주 뜨겁게 달군 가마솥에 넣고 민첩하게 덖는다. 찻잎이 뜨거워지면 멍석에 일제히 쏟아 멍석에 비빈다. 이때 힘을 잘 조절해야 찻잎이 으깨지지 않고 골고루 동그랗게 말린다. 우리가 먹는 찻잎을 자세히 보면 잎에 꼬임이 있는데, 이 비비는 과정 때문에 생긴 것이다. 비비다가 손바닥에 끈적함이 느껴지면 덩어리지지 않게 잘 펼쳐서 말린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가마솥에 넣고 덖는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는 약간 약한 온도에서 덖는다. 찻잎이 뜨거워지면 다시 멍석에 쏟아 비빈다. 세 번째 덖을 때는 온도도 더 낮추고 멍석에 비비는 것도 아주 부드럽게 해야 한다. 이때는 서로 유착이 심하니 멍석에 펼칠 때 정성 들여 잎을 서로 떼어놓는 것이 관건이다. 그 후에 덖는 것은 차의 상태에 따라 덖는 횟수와 비비는 것을 조절한다. 덖음차는 차의 상태에 따라 8~12번을 덖는다. 마지막으로 센 불에 슬쩍 볶아내는 것으로 차가 완성된다.
이리 귀하게 만든 차를 어찌 그냥 마실까 싶어 몸가짐이 조심스럽기만 한데, 스님은 ‘누워서만 마시지 않으면 된다’ 하신다. 차를 우릴 수 있는 다관과 좋은 차, 찻잔만 있으며 마시는 것이 차라며 스님은 다도를 걱정하지 말고 세 가지만 알고 있으라 이르신다. “정조결精燥潔이면 다도진의茶道盡矣니라.” 초의선사가 <다신전>에서 한 말로, 만들 때 정성을 다하고, 저장할 때 건조하게 하며, 마실 때 청결하게 하면 다도는 완성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다도를 어렵게만 여기는 것은 일본에서 온 형식적인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차를 마시며 그것을 따를 필요는 없다.
“팽주烹主의 행복을 아시는가?” 팽주는 차를 끓이고 대접을 하고 치우는 것까지 차 마시는 일을 주관하는 사람을 말한다. 누구든지 팽주가 되면 찻주전자에 물을 부을 때 올라오는 그윽한 향이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뜨거운 물이 찻잎과 만나는 순간 아련하게 올라오는 그 향은 가히 팽주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팽주는 누구든지 될 수 있다. 음식은 어머니가 만들지만 차는 아버지도, 자식도 팽주가 되어 만들 수 있다. ‘차나 한잔 하지’라는 말로 커피나 탄산음료만 찾지 말고, 직장에서도 상사나 사원이나 돌아가면서 팽주가 되어 좋은 차를 널리 마셨으면 하는 것이 지허스님의 큰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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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전남 순천시에 위치한 금둔사는 호남고속도로 승주IC로 나와 낙안읍성으로 가는 857번 국도를 따라가다가 금산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낙안읍성에서부터 절 이정표가 나온다. 061-754-6942, www. geumdunsa.org
주변 관광지 금둔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 내에 관아와 1백여 채의 민가로 구성되어 있다. 성안을 산책하며 민가와 대장간, 관야 등을 둘러볼 수 있고, 민속촌처럼 토속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곳도 있다. 읍성이 한눈에 보이는 성곽 위를 걸어보는 것도 필수 코스다. 입장료 2천 원. 문의 061-749-3347
 
 
이유진(프리랜서)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