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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뭐 먹지?] 한여름에 더 그리운 시골 밥상 서울 토박이의 시골밥상 차리기
감자, 가지, 애호박, 오이, 풋고추, 상추, 쑥갓…. 금방 텃밭에서 거둔 신선한 재료로 차린 밥상이 건강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시골 할머니가 몇십 년 경력의 손맛으로 차린 소박한 밥상이 맛없을 리도 만무합니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건강에 좋고 화려한 맛을 지닌 음식은 할머니가 제철 재료로 촌스럽게 차린 시골 밥상이 아닐까요?
마을에 고압선 송전탑이 들어오는 바람에 18년 동안 살던 이천 시골집을 처분하고 서울의 아파트로 이사를 왔지만, 지금도 아쉬움이 크다. 오래간만에 서울의 아파트에 와서 사니 편리한 점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계절이 지날 때마다 그 시골집 생각이 난다. ‘아, 지금쯤 살구가 익어서 뚝뚝 떨어지겠지.’ ‘아랫동네 내려가 갓 캔 감자 한 상자 사 오면 맛있을 텐데.’ 아쉬운 생각이란 게 다 이런 먹을거리 투성이다. 하지만 그 18년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음식 재료나 작물을 보는 눈이 18년 전 대도시에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한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아파트 생활을 해도 우리 집 밥상은 여전히 시골 밥상 같다. 그러고 보면 시골밥상은 꼭 시골에서만 차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시골의 감각, 시골 사람 특유의 예리한 눈을 지니고 있으면, 서울에서도 가능한 게 시골 밥상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시골 밥상을 차리는 가장 중요한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철 재료만 쓰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뭐가 제철인지 구별할 수 있는 눈이 없다. 감자나 양파, 마늘, 혹은 사과나 배 따위는 저장성이 높은 것이니 어느 계절에 사도 제철이다. 하지만 푸른색 도는 싱싱한 채소는 다르다. 왜냐하면 이런 것은 오래 저장할 수 없는 탓에 제철이 아니면 결국 비닐하우스에서 키워내게 마련인지라 제철을 가려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도시에서는 한겨울에 애호박, 부추, 오이, 풋고추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서 먹는다. 심지어 아욱, 근대, 호박잎도 사 먹는다. 제철이 아닌 한겨울에 상추나 깻잎 등을 내놓지 않는 갈빗집이나 횟집을 본 적이 있는가. 이것들은 모두 비닐하우스에서 키워낸 것이다. 석유나 연탄을 때서 온도를 높이고 일조량이 적은 상태에서 키우는 작물이 건강할 리 만무하다. 그러니 병충해를 막기 위해 농약도 많이 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맛은 떨어지고, 값은 비싸다.

요즘 애들 표현대로라면 참 ‘개념 없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철이 아닌 채소를 안 먹고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 고기를 먹을 때 상추 대신 12월에 수확해 저장한 배춧속이나 양배추를 먹으면 된다. 한겨울에 배추 된장국이나 시금칫국이 아니라, 꼭 아욱국이나 근대 된장국을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초봄부터 열무김치를 담가 먹거나, 눈이 내릴 때 딸기를 먹고, 개나리 필 때부터 참외를 먹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냥 시장에 나온 물건을 ‘개념 없이’ 사는 것이다. 시골에서 살다 보면 자연스레 제철에 자기 밭에서 나는 채소로 살아가게 된다. 도매를 거쳐 시장에 나온 채소가 영 마음에 들지 않고, 게다가 비닐하우스에서 어떻게 키우는지 뻔히 아는데 그걸 사 먹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장에서도 어느 것이 제철인지 금방 눈에 보인다.
상추는 늦봄부터 시작해 7월 초면 끝난다. 그럼 8월 이후는? 상추 안 먹고 살면 된다. 풋고추는 7, 8월에 따먹는다. 그럼 겨울에 된장찌개에 넣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9월에 따서 냉동실에 얼려둔 것을 썰어 넣으면 된다. 제철 재료는 맛이 강하고 싱싱하다. 그러니 시골 밥상에 올라온 싱싱한 재료 맛에 가장 근접한 맛을 낼 수 있다. 제철 재료를 오래 보관하는 방법으로 우리 선조들이 생각해낸 것이 햇볕과 바람에 말리거나 장아찌를 담그는 것이다. 애호박은 초가을에 오가리를 말리고, 봄에 나는 곰취는 장아찌를 담근다. 7월에 접으로 나오는 오이를 사다 오이지를 담그고, 6월의 마늘종과 8월에 탱탱한 풋고추를 삭혀 장아찌를 담갔다가 필요할 때 꺼내 무쳐 먹는다. 이런 마른 나물과 장아찌들은 모두 시골 밥상의 단골 메뉴다. 제철이 아닐 때에 이런 저장 음식을 먹으면 제철 채소를 먹는 거나 진배없다.

대도시에서 시골 밥상을 차릴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은 한국 음식의 기본 양념을 시골스럽게 유지하고, 화학조미료를 덜 쓰는 것이다. 시골 밥상이 도시의 밥상과 다른 양념은 결국 장과 젓갈이다. 특히 간장과 된장이 중요하다. 식품 회사에서 제품화되어 나오는 간장과 된장으로는 제맛을 낼 수 없다. 예컨대 한국 음식의 국은 콩나물국, 조갯국, 곰국 정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조선간장으로 맛을 내야 한다. 특히 미역국이나 쇠고깃국 같은 것에 조선간장은 필수다. 쇠고기 사태나 양지를 푹 끓인 국물에 조선간장 한두 숟가락이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 나물이나 도토리묵 무칠 때에도 조선간장은 필요하다. 된장도 직접 집에서 담근 된장으로 끓인 된장국과 찌개야말로 도시 사람들이 시골 밥상을 찾는 가장 큰 동인 動因이 아니겠는가.
간장이나 된장 같은 양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면 소금을 쓰게 되고, 소금만으로는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 화학조미료가 들어간 양념과 설탕을 과도하게 쓰게 되는 것이다. 이런 걸 먹다 보면 입맛이 점점 얄팍해져, 인스턴트식품이나 음식점 음식의 얄팍한 맛에도 무감각해진다. 문제는 서울의 젊은 주부들이 장을 담그기 힘들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하건대 옥상을 쓸 수 있거나 남향의 베란다만 있으면 장은 대도시에서도 얼마든지 담글 수 있다. 내가 이사 온 아파트는 16층의 동향인데, 그래도 이사 오자마자 간장과 된장을 담갔다.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니다. 단지 해보지 않아서 못할 뿐이다. 그래도 자신이 없다면, 요즘은 시골 마을에서 간장 담그기 체험 행사도 많이 하고, 시골 장과 직거래하는 방법도 많다. 의지만 있다면 장은 얼마든지 시골스럽게 바꿀 수 있다. 제대로 갖춘 기본 양념에 너무 과도한 조리를 하지 않고 오로지 제철의 재료
맛으로 승부하는 밥상, 그것이야말로 시골 밥상의 핵심이다. 건강하고 맛있고, 값싸게(이게 가장 매력적이지 않은가!) 잘 먹고 잘 사는 길인 것이다.

글을 쓴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 씨는 꽤 예민한 입맛을 지닌 까닭에 얼마 전부터 ‘음식’에 관한 글을 많이 쓴다. 밥상에서 음식 품평회를 일삼는 친정 식구들과 샘표간장 501과 701을 구별하는 절대 미각의 남편 덕분에 이천의 텃밭 딸린 집에서 장은 물론 맥주까지 담가 먹으며 살다 최근 서울로 이사 왔다. 저서로<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를 펴냈다.

구선숙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