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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행복>캠페인- 한칸 다실 갖기] 차茶 삼매에 빠져서
녹차를 제대로 아는 이가 없던 1980년대에 전통찻집을 열고, 어느 해엔가 홀연히 경남 하동 악양의 지리산 자락에 내려가 시인으로, 다인 茶人으로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박남준 씨. 차 덖는 가마솥을 보며 그가 지은 시 한 수는 차에 깃든 그의 인생을 말해준다.
영롱한 찻물처럼 맑은 사람이 되게 하는 힘은 가족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차 한잔에 있습니다. 한잔의 차를 마시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는 단순히 마신다는 행위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정신적 기쁨, 인생의 향기로움을 얻을 수 있는 이 시간을 위해 <행복>에서 ‘한 칸 다실 갖기’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항아리에 담아놓은 발효차가 익어간다. 손을 대니 한낮 햇살에 달궈진 항아리가 뜨겁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다. 흠흠~ 다디단 차향이 앞마당에 번져간다. 해가 기운다. 낮 동안 햇빛 속에 내놓은 차 항아리들을 방으로 들인다. 이곳 하동 악양, 지리산 자락으로 이사를 오면서부터 내가 누리는 큰 즐거움 중 한 가지가 바로 차를 만드는 일이다. 찻잎을 따는 일부터 다 만든 차를 우려 첫 잔의 향기를 맡는 순간의 행복을 그 어떤 것에 견줄 수 있으랴. 올해는 늦도록 추위가 풀리지 않아서 녹차를 만드는 일이 꽤 늦어졌다. 내가 찻잎을 따는 차밭은 산 중턱에 있어서 곡우 전에 가보았더니 찻잎을 딸 수 있는 양이 한 주먹 거리도 채 되지 않았다. 우전차라는 것이 말 그대로 곡우 전에 만든 것을 뜻한다면, 아예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나마 일찍 나온 잎은 냉해를 입어 가장자리가 붉게 타 있었다.
비단 날씨 탓만은 아니지만 올해엔 녹차보다 발효차를 많이 만들었다. 아는 이든, 모르는 이든 집을 찾아오는 이들이 녹차보다 발효차 마시길 더 원하고, 그로 인해 작년에 만든 녹차는 남아 있는데 발효 차는 봄이 오기도 전에 똑 떨어져버린 탓이다.
문득 차에 관한 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내가 한 선배와 함께 전주에서 찻집을 할 때의 이야기다. 벌써 20년도 더 된 1980년대 후반에 전통찻집을 열었기에 녹차를 제대로 아는 이가 드물었다. 어느 날 저녁 무렵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아저씨 일곱 명이 들어오며 자리에 앉기도 전에 큰 소리로 물었다. “이 집에서 제일 비싼 차가 뭣이요? 그걸로 내오시오.” 나는 손님들의 면면을 재빨리 살펴보며 “아, 그게 있기는 있는데 입맛에 안 맞으실 것 같으니 다른 것을 드시죠”라고 권하며 쌍화차와 생강차를 추천했다.
그 일행은 한사코 비싼 것을 강조하며 똑같이 만든 말차를 일곱 잔 내오라는 것이다. 손목이 시큰하도록 말차 일곱 잔을 만들어 손님들 앞에 내려놓고 주방 쪽으로 와서 건너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님들 왈, “먼 거품이 이렇게 떠 있다냐” 하며 후후 불어가면서 쭉 들이켜려다 말고 “이거 풀냄새만 나는디. 글고 왜 설탕 가리는 안 넣었디야. 깜빡했는가 보구만.”

나는 얼른 노란 설탕 통을 가져다주며 찻집을 연 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서투르다고,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자주는 아니지만 녹차를 시키고도 설탕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던 시절이다.
찻집의 형편이 너무 파리를 날리는 바람에 선배와 상의한 끝에 두 사람이 하기에는 일손이 너무 한가하다며 나는 그만두었다. 이후 그 선배는 첫눈이 온다고, 비가 온다고, 바다가 보고 싶다고, 그런 쪽지를 찻집 문 앞에 붙여두고는 문을 닫고 휑하니 바람처럼 사라졌다가 돌아오곤 했으니 그 찻집, 얼마나 오래갔겠는가.
“어린 찻잎이 화염 타오르는 솥 안에서/ 다작다작 茶雀茶雀 휘돌며 춤을 춘다/ 싱싱한 것들이 연초록 봄빛들이/ 화르릉 달아오른 불길을 품고 껴안으며/ 풀이 죽고 숨이 꺾인다/ 꺼내어져 둥근 빨래처럼 비벼지고/ 모아졌다 풀어졌다 다시 뜨거워진다/ 온몸 비틀리며 말라간다/ 어찌하여 향기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가// 차를 덖다가 그랬다/ 한 잎 찻잎이 온전히 솥에 던져져/ 초록의 향기로움 세상에 전하듯이/ 사람의 삶도 상처를 통해서야/ 비로소 깊어지는가/ 남김없이 수분을 빼앗기고 바짝 뼈마디 뒤틀린 것들이/ 찻물에 띄워지며 새록새록 거리는 아기 숨소리/ 처음 어린 찻잎으로 거듭나며 세상에 전한다/ 찻잔에 담긴 푸른 바람의 하늘과 별빛/ 저 이슬 고요하고 그윽한”(‘어린 찻잎’)
찻잎을 딸 때 실려오는 연둣빛 향기를 맡으며 미소 짓는다. 녹차를 덖으며 피어오르는 향내에, 발효차를 만들기 위해 아궁이에 뜨겁게 불을 지피고 아랫목에 항아리를 묻어놓으면 온 집 안 가득 진동하는 차향에 몸이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것만 같다.
차 만드는 일, 무엇 하나 어찌 힘들지 않겠는가. 지독하다. 차 삼매경에 빠져 도저히 헤어나올 길이 없다. 다 만들어진 차를 조금씩이나마 같이 차를 만든 지인들과 나누고 이런저런 인연을 따라 햇차 맛보시라며 작은 봉투에 담아 보낸다. 산골짜기 작은 집, 뭐 내놓을 것이 있나. 찾아오는 이들에게 그런다. “들어와서 차 한잔하세요. 녹차로 할까요, 발효차로 할까요?”

* 한 칸 다실 갖기 캠페인은 농림수산식품부, 문화체육관광부, 아모레퍼시픽 오’설록이 후원합니다.

정세영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0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