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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쿠킹] '산당' 임지호의 마음으로 읊는 요리 요리는 時心을 그리고 時는 맛을 그린다
“나의 음식은 절제된 시 한 편이다”라고 말하는 자연 요리 전문가 임지호 씨가 땅과 바다, 하늘의 기운을 모아 음식에 시를 담았다. 시화詩畵를 음식으로 그린 여섯 가지 요리, 눈으로 감상하고 가슴으로 맛보고 마음으로 읊조려보자.


나도 저 위에 올라가야 할 텐데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모두에게 외쳤습니다. “우리는 날 수 있어. 나비가 될 수 있단 말이야!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올라갈 필요가 없다고!” 그는 외침과 동시에 깨달았습니다. 지난날 자기가 위로 올라가려 했던 욕망이 잘못된 것임을 말입니다.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기어가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_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 중에서

작고 귀여운 방게들이 물길을 건너 한련화 잎과 으아리 꽃이 핀 감자 언덕을 오르느라 분주하네요. 저 위에서 무얼 찾느라 서로 엉겨 있을까요? 방게들이 꼭대기까지 열심히 올라야 알 수 있는 비밀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지에서 비밀의 답을 찾으며 두리번거리는 방게를 향해 유자소스 달님이 방긋 웃어줍니다.

(왼쪽) 모양을 살려 튀긴 방게와 모차렐라 치즈를 넣은 감자 샐러드. 튀긴 방게를 유자와 레드 와인 소스에 찍어 먹는 음식이다.

사랑이 끝나고 난 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_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중에서

사랑에 푹 빠지는 일과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일 중 하나만 고르라면 주저 없이 사랑을 택하겠습니다. 사랑이 두렵지 않은 바닷가재에게 사랑의 끝은 또 다른 시작입니다. 가시는 님의 걸음마다 꽃잎도 뿌려드려야 하고, 행여 임이 돌아보실까 마음 설레 치장도 서둘러야 하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큰맘 먹고 마거리트 꽃송이를 가슴에 꽂았습니다. 사랑할 때보다 더 아름답게, 화려하게 보이나요?

(오른쪽) 재료의 맛을 살리기 위해 양념하지 않고 쪄낸 바닷가재.


섬을 그리워하다, 섬이 되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 _ 정현종의 <섬>

말 없는 바위를 몰래 건드려보는 파도와, 높은 산봉우리를 바라다보는 갯벌은 섬이 되고 싶습니다. 그 섬에 가고 싶습니다. 섬 위에선 망고, 참기름, 유자소스, 매실청 향기가 바람결 따라 유혹하듯 흩날리는데, 섬에 오를 수 없는 파도와 갯벌의 마음은 섬이 그립기만 합니다. 파도와 갯벌은 섬에서 날아오는 그 향기가, 날카로운 가시를 곤두세운 성게알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 턱이 없겠지요.

(왼쪽) 성게알에 망고, 죽염, 참기름, 유자소스, 방아 잎, 쪽파, 매실청을 넣고 버무려 성게 껍데기에 담았다.

영혼을 위한 음식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_ 김경주의 <저녁의 염전> 중에서

몇천 년을 바다 속에서 울렁였을 전복, 상어 지느러미, 키조개, 개불, 가리비가 모였습니다. 심연의 바다에서 살던 그들은 바다의 넉넉함처럼 너른 맘으로 영혼의 외로움을 채워줍니다.

(오른쪽) 1 가리비 살을 곱게 다져 초밥, 방아 잎, 복분자, 죽염과 함께 비빈 뒤 가리비 껍데기에 담아냈다.
2 키조개 위에 갖은 야채 다진 것을 깔고 그 위에 관자를 얹은 요리. 풋콩을 삶아 바닥에 장식했다.
3 유자소스에 개불과 셀러리를 무친 요리, 상어 지느러미와 함초를 볶은 요리, 찜기에 쪄낸 전복을 각각 담았다.


내 속에 들어 있는 꿈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_ 정끝별의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중에서

심연의 바다를 헤엄치던 조기의 내장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푸른 들판에 흩날리던 산초나 셀러리와 만나 멜론 껍질에 둥지를 튼 모습은 조기 내장이 이룬 꿈입니다. 한 번쯤은 비린내 나는 조기가 아닌 향긋한 멜론 옷을 입고 싶었겠지요.

(왼쪽) 정종에 담가둔 조기의 애와 알을 쪄 진간장, 참기름, 산초 가루, 산초장아찌, 생고추냉이, 셀러리를 넣고 비벼 멜론 껍질에 담았다.

물고기들의 데이트
누구나 볼 수 있는 저 두 언덕 사이에 채 그리다 만 그림처럼 반쯤 그려져 걸린 무지개, 무지개는 무지개, 따로 숨겨둔 깊이 없음. 마음속에는 마음밖에 없음. 모르는 사이에 마음이 땅 위로 흘러내리다!_ 황동규의 <비린사랑의 노래 5>

채 그리다 만 그림처럼, 땅 위로 흘러내린 측백나무소스가 물결처럼 피어오릅니다. 그사이 헤엄쳐 나온 물고기들은 저마다 예뻐 보이려 방아 잎, 더덕 잎, 꽃잎으로 화려하게 치장을 했네요. ‘내 짝은 어디에 있을까?’ 두리번거리는 물고기의 유자소스 눈망울이 촉촉히 젖어 반짝입니다.

(오른쪽) 광어초밥 위에 유자소스와 산초 열매로 물고기 눈을 만들고 주위에 측백나무소스를 뿌렸다. 측백나무소스는 측백나무 잎에 술과 소금을 넣어 곱게 갈아서 만든다.

자연 요리 연구가 임지호씨가 10년 만에 <행복>과 호흡을 맞췄다. 1998년 1월호부터 6월호까지 ‘임지호의 자연 요리’ 칼럼을 <행복>에 연재할 무렵 시대를 앞선 그의 ‘자연 요리’는 <행복> 독자들에게 독특한 레시피와 특별한 담음새로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2008년 7월 다시 만난 임지호 씨는 자연에 예술을 결합한 요리를 연구 중인 그의 발걸음대로 <행복> 독자들을 위해 시심을 담은 요리를 소개했다. ‘음식은 종합예술이고 약이며 과학’이라고 믿는 임지호 씨의 요리가 시가 되어 마음을 두드린다.

임지호의 요리를 직접 맛보려면 양평의 ‘산당(031-772-3959)’을 방문하면 된다. 산당에 가면 그의 상상력과 철학이 담긴 음식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 양평의 88번 도로를 달리다 보면 ‘산당’이라는 커다란 글씨 아래 ‘코스 한정식’이라는, 이 집의 정체를 밝힌 하얀 간판을 만날 수 있다.


이화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8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