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방에는 조각보, 뜨개 도구가 가득했다. 할머니가 쉬지 않고 손을 움직이면 장갑, 스웨터, 목도리가 뚝딱 완성되곤 했다.
서울 도산대로 앞에는 휘황찬란한 황금색 육면체 건물이 우뚝 서 있다. 에르메스 메종 도산이다. 언젠가 그 앞을 지나가던 무렵 이런 상념에 잠긴 적이 있다. 금빛으로 넘실거리는 파사드 속 쇼윈도는 어딘지 인형극 무대 같기도, 어린 시절 보던 아날로그 TV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양옆에 미닫이문이 달린, 이제는 자료 화면이나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바로 그 ‘테레비전’ 말이다.
이곳은 에르메스 가문의 5대손이자 회장이던 故 장루이 뒤마의 부인 故 르나 뒤마가 설계했다. 전 세계 에르메스 메종을 디자인한 건축가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그는 매번 설계 전 해당 국가와 도시, 동네 거리를 연구했다. 어떤 형태로 연출할 것인지가 아니라, 주변 환경을 재료 삼아 거기에 부합하는 형태로 나아가는 식이다. 그 맥락에서 에르메스 메종 도산은 한옥 형태에 착안했다. 그래서인지 빛과 그림자가 투영되는 유리 육면체 디자인은 옛날 세살문의 창호지로 빛이 파르르 부서지는 장면과 어딘지 묘하게 겹치는 듯 보인다.
엄마가 거실에서 손을 분주히 움직이면 케이크와 딸기잼이 완성됐다. 왼쪽의 패치워크 항아리, 가운데에는 탈착 가능한 포켓이 더해진 테이블, 우측 선반 위 말 모양 오브제는 모두 쁘띠 아쉬 제품. 이외에도 곳곳에 쁘띠 아쉬 제품이 놓여있다.
창조의 역순
바로 이곳에 쁘띠 아쉬Petit h가 찾아왔다. 쁘띠 아쉬는 무수히 많은 에르메스 공방 중 장인 정신과 유머, 창의성이 교차하는 특별하고 자유로운 실험실에 가깝다. 2010년 파스칼 뮈사르Pascale Mussard의 발상에서 출발한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의 가죽 제품, 실크, 세라믹, 금속, 유리 등 16개 메티에métier에서 사용되지 않는 자재를 활용해 완전히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어내는 접근 방식을 선보인다.
‘사용되지 않는 것은 없고, 모든 것이 재창조된다’는 모토를 내건 쁘띠 아쉬의 특이점은 작업 순서다. 쁘띠 아쉬는 어떤 구체화된 디자인이나 형상을 먼저 떠올리기보다 흩뿌려진 자재들의 조합을 구상하며 자연스레 형태를 만들어간다. 가죽·실크·크리스털· 우드소재를 조합하고 결합하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와 기능을 발견한다. 설계가 아닌 소재가 출발점이 되는 것. 이렇게 탄생한 오브제는 그야말로 예측 불가능성을 담지한다. 켈리 백의 손잡이가 달린 크리스털 카라프, 시계가 매달린 포슬린 컵, 유리와 가죽을 결합한 도기병 등은 모두 에르메스의 상징적 소재가 만나 빚어낸 창조적 충돌의 결과물이다.

어릴 적 무서운 꿈을 꾸면 늘 엄마 방으로 향하곤 했다. 밤에는 나를 지켜주던 엄마의 침대는 종이 인형을 가지고 노는 놀이터기도 했다. 엄마의 화장대에 놓인 물건은 쁘띠 아쉬의 주얼리 박스.
손手의 서사
단역배우처럼 존재하던 각양각색의 재료에 새로운 배역을 부여하는 쁘띠 아쉬는 1년에 한두 번 해외에서 열리는데, 이때마다 로컬 아티스트에게 시노그래피 작업을 의뢰한다. 2025년 <쁘띠 아쉬 서울 스톱오버>의 아트 디렉터는 영화 <올드보이><아가씨><헤어질 결심>,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등의 미술감독으로 알려진 류성희 감독이 맡았다. 그는 서울의 전통적 형상보다는 3대가 함께 살던 집의 기억을 도구 삼아 세트장을 연출했다.
에르메스 메종 도산 1층 쇼윈도와 3층 공간에 만든 세트장은 각각 부엌, 할머니 방, 세탁실의 형태를 갖추었다. 각 세트장에는 실제 사람이 서 있지 않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어머니가 다림질이나 빨래하는 모습, 담금주를 빚는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뜨개질 도구와 담요가 놓인 할머니 방에서는 어딘지 온기마저 느껴진다. 이는 무대 위에 오밀조밀 배치한 소품 덕이다. 연기하는 배우가 없어도 우리는 소품을 통해 각자의 머릿속 서랍을 열고 기억을 재조립해 장면을 그려낸다.
어릴 적 거실 선반은 거대해만 보였다. 그 속에는 진귀해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조각보 선반은 스튜디오 부분Studio Booboon이 디자인한 쁘띠 아쉬 제품이다.
세트장 소품 사이에는 쁘띠 아쉬 제품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디렉터 체어 옆에 놓인 패치워크 항아리, 콘크리트 냄새가 물씬 풍길 것만 같은 지하실 세트장에는 스터드 장식 수납 버킷이, 주방 세트장에는 조각보 선반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에 충실한 모습처럼 존재한다. 하나의 가죽, 실크·천으로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재료는 쁘띠 아쉬를 통해, 그리고 세트장과 그곳의 소품과 어우러져 새로운 역할과 서사를 부여받는다.
소품과 쁘띠 아쉬 제품뿐 아니라 세트장 자체도 새로운 서사를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가부장제 사회 속 주목받지 못하던 가사 노동의 공간을 작품의 주무대로 끌어온 듯한 느낌은 돌봄의 사회적가치, 손을 통해 무언가를 만드는 노동의 공간 또한 재조명하는 듯 보인다.
단역이 아닌 다역
연극과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말처럼 기본적으로 재현을 전제한다. 실제 서양 연극은 18세기까지 대본(text)을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에 포커스를 맞췄다. 비현실적인 영화라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오답이 오답인 걸 알려면 정답이 무엇인지 인지해야 하듯, 비현실을 연출하려면 현실이란 기준에 입각해야 한다. 이러나저러나 창작은 현실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란 세트장에서 주역 자리에 서는 날을 맞이할 테다. 무대 뒤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강아지 모티프 지구본 오브제, 그 아래 캔버스 및 가죽 소재 가방, 토끼 모티프 문진, 그 위에 거북이 모티프 장식용 보관함, 바로 앞 테라조 테이블 모두 쁘띠 아쉬 제품.
쁘띠 아쉬의 작업 방식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노동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다시 생활로 돌아오는 구조, 현실을 기반으로 만든 세트장에 재료로 존재하던 것에서 탄생시킨 오브제가 무대 위에 오르는 흐름은 서로의 존재로 서로가 선명해지는 효과를 만든다. 무대가 있기에 소품이 놓이고, 소품이 있기에 눈앞의 장면이 현실이 아닌 세트장이란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쁘띠 아쉬라는 주연이 있기에 이것이 현실이 아닌 가상 혹은 영화 속 장면이란 사실을 알 수 있듯 말이다.
아트 디렉터 류성희는 에르메스 메종 도산을 거대한 영화 세트장으로 만들었다.
주연이 있기에 조연이 있는 것일까, 조연이 있기에 주연이 주연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무엇을 주연으로 볼지 조연으로 볼지 정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닐까. 지금은 무대 뒤에서 대기 중이지만 몇 분 후 무대에 오를 배우는 주연인가 조연인가? 반대로 지금 당장은 수많은 관객의 시선을 한 몸에 받지만 다음 신부터 등장하지 않는 이는 조연인가 주연인가?
세상은 단순히 스쳐가는 단역의 총합일까, 아니면 다음 서사를 이어가는 주연만의 세계일까? 좋은 작품은 언제나 단일한 정답이 아닌 다양한 문답을 만들어낸다. 11월 9일을 끝으로 상영관에서 내려간 <쁘띠 아쉬 서울 스톱오버>를 <행복> 지면에 담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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