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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의 아름다운 집 폐허가 캔버스가 될 때
요한나 & 프리드리히 그라플링Johanna & Friedrich Grafling 부부는 오펜바흐의 낡은 집을 ‘총체적 예술 작품(Gesamtkunstwerk)’으로 재탄생시켰다. 세월의 흔적을 품은 건축은 가족의 삶과 예술이 교차하는 장으로 되살아나 일상 자체가 하나의 전시인 집이 되었다.

연둣빛 벽과 대형 추상화, 튤립이 어우러져 빛과 색이 대화를 나누듯 일상과 예술을 자연스럽게 잇는다. 살롱 너머로는 핑크 톤의 다이닝 공간이 펼쳐진다. 문턱을 경계로 두 공간은 서로 다른 질감과 온도를 지니면서도 조화롭게 이어져, 복원된 집이 간직한 시간의 깊이와 새로운 생기를 함께 드러낸다. 모리츠 반나흐Moritz Bannach의 테이블과 이브 셰러Yves Scherer의 작품이 놓여 있다.
프랑크푸르트 중심부에서 차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한 오펜바흐는 대도시와는 또 다른 공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는 20세기 초반에 지은 아파트와 정원이 여전히 남아 있어 당시 예술가와 장인들이 머물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가죽 산업으로 성장한 도시가 산업화와 재개발을 거치며 많이 변모했지만, 일부 주거지와 건축물에는 여전히 과거의 양식이 남아 있다. 아르누보 장식, 석조 현관, 오래된 정원수는 시간의 켜를 드러내면서 현재와 과거가 교차하는 풍경을 만든다.

 

블랙 그래나이트로 마감한 주방.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의 작품이 양옆을 장식한다.


건축주 마리아가 발견한 집은 바로 이 동네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외관은 낡고 쇠락했지만, 중앙 홀을 중심으로 살롱 네 개와 작은 방들이 이어지는 원형 구조만큼은 온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처음 이 집을 보았을 때 세 딸과 함께하는 일상의 장면을 직관적으로 떠올렸다고 회상한다. “이 집은 단순한 폐허가 아니었어요. 아직 채우지 않은 캔버스 같았죠. 낡고 방치된 외관 뒤에는 분명한 잠재력이 숨어 있었고, 그것을 가족의 삶과 예술로 채울 수 있다고 확신했어요.”

 

베네치아 샹들리에와 모리츠 반나흐의 테이블이 어우러진 다이닝룸.

 

그러나 이곳을 가족의 거주 공간으로 바꾸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한때 사무실로 쓰던 건물에는 구조적 제약이 있었다. 무엇보다 문화재 보호 대상이어서 단순한 레노베이션을 넘어선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인테리어 스튜디오가 난색을 표했지만, 요한나 & 프리드리히 그라플링 부부는 주저 없이 이 프로젝트를 맡았다. 건축과 미술사를 전공한 아트 컬렉터이자 스튜디오 운영자인 이들은 프랑크푸르트의 유서 깊은 아파트와 예술 아지트 ‘살롱 케네디Salon Kennedy’, 도축장을 개조한 ‘쿤스트페어아인 비젠Kunstverein Wiesen’ 등을 성공적으로 탈바꿈시킨 경험이 있다. 이들은 ‘예술과 일상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작업을 선보이는 스튜디오로, 〈행복〉 2023년 8월호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 “우리는 평면을 많이 바꾸기보다는 기존 구조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현대적 요구를 자연스럽게 통합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건축물의 역사적 개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소재, 색감, 예술, 디자인이 어우러지는 총체적 예술 작품을 완성하는 것이 핵심이었죠.”

 

멤피스 스타일을 반영한 맞춤형 테라초 세면대가 있는 여자아이 욕실. 영화 속 디바의 화장대를 연상케 한다.


디자이너 부부의 설명처럼 중앙 홀과 살롱의 흐름은 유지하되 침실 네 개와 욕실 두 개, 가족 생활을 위한 주방과 부속 공간을 새롭게 배치해 삶의 틀을 마련했다. 난방, 단열, 욕실, 주방 설비 등 현대 생활을 위한 기술적·공간적 요소는 전면적으로 재검토했다. 반면 정교한 목재 장식, 큰 창, 이중문이 있는 살롱의 공간 구성은 그대로 살려 집에 시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욕실은 두 개의 테라초 공간으로 설계했다. 하나는 아이들을 위해 유쾌하고 포스트모던한 분위기를 담았고, 다른 하나는 분홍색 위생 설비와 조각적 요소를 적용해 쾌락주의적 1920년대를 참조했다. 여기에 두 장의 대형 베리아 그린veria green 대리석 슬래브로 마감한 욕실도 추가했는데, 무게와 규모 탓에 전적으로 수작업으로 시공해야 했다. 이 작업에는 밀리미터 단위의 정밀함이 필요했다.

 

그레이스 위버의 작품이 걸린 현관.


예술이 먼저, 공간은 그 뒤를 따른다
이 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작품과 건축물이 끊임없이 대화한다는 점이다. 건축주인 마리아와 남편은 살롱 케네디를 통해 오랜 시간 작품을 수집해왔고, 그 경험은 이번 집에서 한층 정교한 큐레이션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곳은 가족의 생활 공간이면서 동시에 컬렉션을 펼치는 새로운 무대가 된 것. “이 집에서 예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공간 구성을 이끌어내는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이닝 살롱의 중심에는 이브 셰러Yves Scherer의 대형 조각이 자리합니다. 그 덩어리감은 식탁과 의자, 조명의 배치까지 규정하며 공간의 질서를 만들어냈죠.” 게스트룸에는 그레이스 위버Grace Weaver의 회화가 침대 맞은편 벽에 걸려 있다. 그림 속 도시의 활기와 창밖 정원의 고요함이 대비되면서 사적 공간에 낯선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복도에는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Christian Jankowski의 ‘Whooping Guggenheim’이 걸려 있어 지날 때마다 뉴욕 특유의 도시적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색소를 섞은 점토 플라스터로 마감한 아이 방. 그레이스 위버의 작품이 함께한다.
게스트 화장실은 작은 규모에도 불구하고 극적 장면을 연출하는 공간. 미하엘 자일슈토르퍼Michael Sailstorfer의 금속 조각이 공간에 무게감을 더하고, 같은 작가의 립스틱 페인팅은 분홍빛 테라초 벽과 어우러져 화려하면서도 이질적인 무드를 형성한다. 라팔 로젠달Raphael Rozendaal의 디지털 작업은 회화와 조각 사이에 놓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면으로 정적인 건축 요소와 부딪쳐 집 안에 또 하나의 시간 축을 더한다. 다이닝 살롱의 중심 가구인 모리츠 바나흐Moritz Bannach의 테이블은 대담한 현대적 디자인을 보여주면서도 에토레 소트사스와 멤피스 운동의 포스트모던 디자인 언어를 차용한다. 이 테이블은 증조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가족 유산인 소파와 나란히 놓여 있어 개념적이자 정서적인 닻 같은 역할을 한다. 개인적 유산에서 실험적 형식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를 가로지르는 디자인 흐름이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 이 집의 모든 작업을 지탱하는 바탕은 바로 벽의 색상이다. 벽은 점토 플라스터로 마감했는데, 파피루스(은은한 베이지), 솔레이유(햇살 같은 옐로), 스위트 핑크, 쿠퍼 오렌지, 콘플라워, 티라미수, 파파야까지 방마다 다른 색채 팔레트가 살아 숨 쉬듯 공간을 감싼다. “그라플링 부부가 선택한 색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점토가 숨 쉬듯 벽도 살아 있고, 안료가 스며든 색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변합니다. 결국 이 집도 우리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골든 트웬티즈의 분위기를 담아 맞춤 제작한 베리아 그린 대리석 마감의 부부 욕실.


이 집의 또 다른 매력은 서로 다른 요소들의 조율에 있다. 세련됨과 편안함, 장엄함과 친밀함, 팝적 에너지와 현대적 명료함이 교차하며 공간은 다층적 표정을 지닌다. 그뿐 아니라 손으로 다듬은 스투코, 묵직한 석재, 세월을 품은 1백 년 된 목재가 어우러져 과하지 않으면서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지속 가능성 역시 고려했다. 빈티지 파케이 마루는 정성스럽게 복원해 천연 오일과 래커로 마감했고, 맞춤 제작한 테라초 바닥은 시간이 흐르며 고유한 질감을 더해갈 것이다.


“이 집은 우리 다섯 식구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어린 딸 세 명을 포함해 가족의 일상을 온전히 지탱할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어요. 아이들이 청소년으로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일상의 루틴과 예술적 성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를 바랐습니다.” 특히 정원과 맞닿은 넓은 주방은 집의 심장 같은 공간이다. 아침이면 햇살이 스며드는 식탁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고, 저녁이면 가족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눈다. 주말에는 친구들이 찾아와 음악을 듣고 와인을 마시며, 아이들이 춤추는 작은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폐허 같던 집은 이제 가족과 예술로 채워진 캔버스가 되었고, 앞으로도 그 위에 또 다른 일상의 색이 덧입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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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백세리 기자 | 사진 Wolfgang Sta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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