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에 지은 두 번째 집 이치 아틀리에에서 만난 이유림 · 정진욱 대표 부부. 고양이 양파와 강아지 조림, 9월 태어날 아기까지 다섯 식구가 살아갈 아늑한 공간이다.
잘 만든 건축물은 사용자가 바뀌어도 유연하게 제 아름다움을 드러낼 줄 안다. 잘 지은 집도 마찬가지다. 도시 풍경을 바꾸는 시작점이 되는가 하면 누군가에게는 ‘나도 이렇게 살아봐야지’라는 방향추로 작동하기도 한다. 주거 공간을 꾸준히 작업해온 아틀리에 이치 정진욱·이유림 대표도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었다.
어두운 무채색으로 통일한 주방과 거실. 빛을 가능한 한 많이 담기 위해 서쪽으로 최대한 넓게 창을 냈다.
공간 디자이너로 일하던 두 사람은 2021년, 50㎡ 남짓한 신당동의 2층 구옥을 신혼집으로 고쳤다. 미디어에 몇 차례 집이 소개되면서 이치하우스는 아파트의 대안을 찾던 이들에게 소소한 화제가 됐다. 부부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독립했고, 아틀리에 이치의 이름으로 11개 프로젝트를 완성하며 이제는 어엿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난 5월, 은평구에 새로운 집을 완성했다. “이치하우스는 아틀리에 이치의 첫 작업인 동시에 저희가 부부로 함께 한 첫 프로젝트였어요. 결혼 자금으로 집 겸 사무실을 마련하고, 이를 포트폴리오 삼아 사업을 시작하기로 한 거죠. 잘 자리 잡아서 3~4년 후에는 다음 집을 계획하자고 이유림 대표와 다짐했는데, 그 꿈을 이번에 이루게 된 거예요.(웃음)”
건식과 습식을 세심하게 구분한 욕실. 샤워 공간은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동굴처럼 디자인했다.
직원을 뽑고 2세 계획을 세우면서 주거와 사무 공간을 분리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도전을 결심했다. 서울에 사무실을 빌리는 비용을 투자해 집을 신축하기로 한 것이다. “이치하우스는 위치는 좋았지만 주차와 채광이 늘 아쉬웠어요. 그때 부족했던 부분을 조건으로 예산 내에서 가능한 매물을 모두 검토했습니다.” 몇 달간 서울의 부동산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지금의 땅을 발견했다. 백련산 초입이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했지만 채광이 좋았고, 시야가 탁 트여 있었다. 산이 가까운 것은 매일 강아지와 산책하고 자연을 가까이 두는 부부에게는 오히려 장점이 됐다.
둥근 수반을 연상시키는 욕조 수전은 정진욱 대표가 직접 디자인한 것.
설계 단계에서도 이치하우스는 든든한 참조점이 되어줬다. “가장 먼저 한 일은 1층 사무실과 2·3층 집의 출입 동선을 구분해 일과 주거를 분리하는 것이었어요. 그다음으로 중요하게 확보한 것은 햇빛과 야외 공간이었습니다. 예전 집은 주변 건물에 완전히 둘러싸여 있고, 야외 공간이 좁아서 늘 아쉬웠거든요. 이번에는 뷰와 채광이 확보된 서향에 크게 창을 내고 1층 마당은 물론 층마다 테라스를 두어 자연과 충분히 접하도록 했습니다.”
북향으로 길게 창을 낸 사무실. ‘돌의 정원’을 테마로 한 후정은 앉아 있을 때도 풍경이 잘 보이도록 바닥 단을 책상 높이까지 높였다. 위쪽 벽장에는 그동안 아틀리에 이치가 작업한 프로젝트 모형을 단정하게 전시했다.
빛과 계절을 수집하는 집
골목에서 마주하는 집의 첫인상은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담장과 단정한 파사드다. 고즈넉한 느낌을 자아내는 입구를 지나 사무실로 향하는 길목에는 수 공간이 전이 공간처럼 자리한다. 바람에 울리는 풍경 소리와 물소리, 칸살문과 나무 그림자, 햇빛에 부서지는 윤슬을 경험하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환기하는 시간을 보냈으면 해 마련한 것.
배수관과 거터 대신 레인 체인으로 빗물을 흘려보내는 시스템은 두 사람이 직접 디자인한 것.
공간 전반을 아우르는 어두운 무채색은 아틀리에 이치가 전략적으로 택한 스타일이다. “초반에는 이치하우스의 화이트&우드 톤을 보고 찾아오는 클라이언트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결과물도 비슷한 결이 많았는데, 전혀 다른 접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진욱 대표는 목재·금속·콘크리트 등 자연의 든든한 바탕이 되어줄 소재를 고르고, 무채색으로 컬러를 맞추되 질감을 다채롭게 풀었다. 콘크리트만 해도 뿜칠, 종석 미장 등 다섯 가지가 넘는 마감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여러 질감이 어우러진 덕분에 자연이 만든 빛과 그림자가 더욱 풍부하게 드러난다.
1층 정원은 계절에 따라 모습이 바뀌기보다는 정적인 느낌으로 최대한 차분하게 계획했다.
2·3층 주거 공간에서도 같은 분위기가 이어진다. 긴 현관을 지나면 서향 빛이 깊숙이 드는 주방과 거실이 나타나고, 3층에는 침실과 드레스룸, 넓은 욕실이 자리 잡고 있다. 층마다 만든 테라스에서는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전과 가장 달라진 장소는 주방. 예전 집에서는 탕비실에 가까웠다면 이번에는 요리의 즐거움에 눈뜬 이유림 대표를 위해 넉넉한 수납공간과 가전을 갖춘 넓은 공간을 마련했다. 목욕이 취미인 부부의 최애 공간인 욕실은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고 디자인도 공을 들였다. 동굴처럼 깊고 아늑한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수전에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목욕하다 보면 이곳에서만큼은 여행 온 듯한 기분이 든다고.
칸살 대문을 열면 전이 공간으로 역할하는 수 공간이 등장한다. 종석 미장으로 마감해 거친 질감의 콘크리트 벽에 일렁이는 수면의 그림자가 아름답게 맺혀 있다.
골목에서 보이는 집의 단정하고 차분한 첫인상.
부부는 새로운 집에서 5개월을 보내며 공간이 삶에 미치는 영향력을 몸소 실감하는 중이다. “동선이 나뉘니 확실히 일과 삶이 분리가 돼요. 전보다 자주 요리하고 테라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식물을 가꾸는 취미도 생겼어요. 공간이 다채로워지면서 하루를 보내는 방식이 훨씬 풍성해진 기분이 듭니다.” 이유림 대표의 소회처럼 두 번째 집에 온 이후 두 사람은 집에서의 기분 좋은 순간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나오는 순간 맞는 바람의 시원함, 수 공간을 보며 멍 때리다가 발견한 나무의 절묘한 그림자, 책 읽다 고개를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쾌청한 하늘 같은 것들. 좋아하는 생활에 맞춰 섬세하게 만든 집이기에 가능한 결과다. “이치하우스는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저희의 모습을 닮았다면, 이 집은 30대 초중반에 접어들어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는 시기의 모습을 담고 있어요. 이렇게 두 채나 만들어 보니 집이 마치 가족사진처럼 느껴지더라고요. 그 시기의 인생을 대변해주는 기록 자료 같고요. 지난번에도 이치하우스를 짓자마자 지금 집을 구상했고, 지금도 다음 집에 대한 생각이 막 샘솟아요. 5년 뒤에 다음 집을 짓게 되면 그때는 태어날 아기의 의견이 반영되어, 또 다른 모습이 될 테죠. 빨리 다음 집 하고 싶네요.(웃음)”
아틀리에 이치
건국대학교 실내디자인을 전공한 정진욱·이유림 대표가 운영하는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첫 프로젝트인 이치하우스로 개소했으며, iF 디자인 어워드 2023을 수상했다. 구옥 레노베이션, 스테이부터 상공간까지 다양한 작업을 통해 서로 다른 둘이 만나 이치에 맞는 것을 탐구하며 공간이 주는 영향을 고민한다. atelier-it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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