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형근 작가의 블랙 페인팅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집도 흔치 않을 것이다. 검은색을 편애하는 집주인을 생각할 때 다른 그림은 언뜻 상상이 되지 않는다.
광화문이나 서촌 일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김재훈 사진가가 몇 년 전 둥지를 튼 정동상림원아파트의 존재를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흔히 이 일대의 ‘대장’ 아파트로 스페이스본이나 경희궁의아침을 꼽는데, 정동상림원아파트는 대단지 아파트와는 또 다른 트랙에서 선망의 대상이 된다. 이곳이 분양된 때는 2006년경. 약 20년 전인데 평당 분양가가 이미 2천1백만~3천만 원 선이었다. 가장 작은 평수가 57평이고, 가장 큰 집은 1백21평이다. 총가구 수는 98가구에 불과한데 총 29개 타입이 있어 ‘배스킨라빈스’처럼 고르는 즐거움이 있었다. 오래된 시간의 겹으로 아름다운 정동길을 걷다 주한 캐나다 대사관을 끼고 올라가면 곧 단정한 녹음으로 울창한 아파트와 만난다. 총 3개 동이 있는데 각각 클래식, 모던, 컨템퍼러리를 콘셉트로 내부 인테리어를 진행해 어떤 집에 사느냐에 따라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클래식은 대리석과 원목 마루로 고풍스럽고, 모던과 컨템퍼러리는 각각 화이트와 블랙을 주조색으로 해 깨끗하거나 강렬하다. 쓰다 보니 아파트 광고 글처럼 되고 있는데 두 가지만 더. 약 20년 전에 지은 아파트지만 사우나실과 독서실 및 의무실이 딸려 있고, 주차장은 벤츠 마이바흐 GLS600도 유유히 미끄러질 만큼 넓다. 성공에 대한 저마다의 정의가 있을 텐데, 집을 기준점으로 삼으면 나는 아무런 걱정 없이 차를 넣고 빼는 호사로운 주차장을 꼽겠다. 이곳 부지는 원래 덕수궁 후원 터였다.
인테리어는 어쩌면 도형 놀이. 사각형과 동그라미가 섞여 있어야 비로소 어떤 조화가 만들어진다. 김동준 작가의 백자 대호는 도자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사진가 김재훈은 몇몇 지인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의 초대로 이 집을 방문했을 때 여러모로 설렜다. 아파트 주변의 녹색 숲을 지나 정동 일대의 도심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곳에 들어서면 강남의 고급 아파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감지하게 된다. 오래된 시간과 풍경의 자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김재훈의 집은 블랙 컬러의 컨템퍼러리 라인으로, 이사를 하며 따로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는데도 한껏 우아하고 고급스럽다. 그가 선택한 그림과 조명은 블랙 바탕에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그리폰 디아블로 엠프와 ATC 스피커 조합으로 꾸린 오디오 시스템 뒤로 신앙처럼 묵직한 윤형근 작가의 후기작이 걸려 있고, 거실에는 포울 키에르홀름의 PK22 의자와 PK31 3인용 소파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1년을 기다려야 내 순번이 올 만큼 인기가 많은 김동준 작가의 달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좀처럼 보기 힘든 크기의 백자 대호라 그 존재감이 남다르다. 조명은 거실과 침실에 넘칠 만큼 많은데, 아르떼미데와 건축가 마리오 보타가 함께 선보인 쇼군Shogun이 확실한 포인트 역할을 했다. 40대 초반. 많지 않는 나이에(그렇다고 적지도 않지만) 이런 아파트를 선택하고, “금속과 가죽만으로 심플하게 만든 포울 키에르홀름 시리즈는 그냥 보고 있을 때도 좋지만, 앉아 있을 때 더 좋다”고 말하는 그의 라이프스타일은 일견 ‘블랙의 맥시멀리즘’으로 보였지만, 동시에 모든 물건과 작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미니멀리즘의 세계였다. 진짜 좋은 것으로만 하나씩! 그리고 그 세계는 지루하지 않았다. 침대 양쪽에 비싼 설치물처럼 걸려 있는 조명은 이리저리 뒹굴며 편하게 핸드폰을 보기 위한 거치대이고, 볕이 좋은 창가 옷걸이에는 역시 검은색 수영복이 걸려 있었다. 자전거 역시도 검은색이었는데 배트맨이 탈 것 같은 매끈한 근육질의 몸매. 탈것에도 관심이 많은 사진가는 주말이면 이 자전거를 끌고 동네 마실을 나간다.
장 프루베의 빨간색 의자, 이배 작가의 페인팅으로 포인트를 준 주방. 주방에서마저 아트 리빙의 리듬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게 놀라웠다.
포울 키에르홀름과 르 코르뷔지에의 가구, 알바 알토의 나무 가리개로 채운 거실. 창문 너머로는 정동 일대의 오래된 풍경이 편안한 결로 펼쳐진다.
한 시절, 기꺼이 투자한 돈과 시간의 힘으로
집을 촬영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취재하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 매몰되면 건질 수 있는 것이 확 줄어든다. 모든 결론이 돈으로 치환될 위험도 다분하다. 반면 어떻게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는지 그 여정을 들여다보면 재미있고 역동적이며, 공감하는 지점이 많이 생긴다. 가수 신해철이 말했듯 인생의 재미와 의미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김재훈의 길도 마찬가지. 유명한 패션 포토 실장들 밑에서 어시스턴트를 하며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의 그에게 패션업계는 원색의 정글 같았다. 좀처럼 마음이 편해지지 않는 모서리 같아 ‘내게 맞지 않는 곳 같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한마디로 낯설었어요. 내가 이곳에 낄 수 있을까? 하는 순간이 많았죠. 화려하고 빠르고… 붕 뜬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습니다. 부산 사람이다 보니 사투리가 있는데, 뭐라고 말을 하면 ‘왜 화를 내?’ 하는 거예요.(웃음) 애티튜드를 조심하다 보니까 또 재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야, 야 하면서 평소 친구에게 하듯 할 수도 없고요. 그런 시간이 반복되다 보니 자꾸 소심해지고, 작아지고, 쭈그러들더라고요. 첫 서울 생활은 몇 년 만에 끝났어요. 대학에서 학업을 중단한 채로 올라왔던 터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지요. 전공은 토목공학과였어요. 도로, 항만, 공항, 터널 같은 대규모 사회 기반 시설을 닦는 그곳에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요. 대규모로 팀이 붙고 모든 것을 협업하는 구조니까요. 뭔가 자율성이 있는 일을 하고 싶던 터라 ‘토목보다는 건축이 낫겠다’ ‘아니야, 사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계속 갈팡질팡했습니다. 카메라는 해양경찰로 군 복무를 하던 시절부터 손에 들기 시작했는데, 바다와 하늘을 찍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어요. 셀카도 제법 찍었습니다.(웃음) 사진을 찍으면서 처음 희열이 어떤 감정인지 경험했습니다.”
40대 중반의 사진가에게 성공의 비결을 물었고,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남이 시킨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태도.”
커리어의 전환점에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있었다. 전직 권투 선수이던 그의 건축물에는 ‘야성적 섬세함’이 있었고 김재훈은 그 작업에 깊이 매료됐다. “돈도 많지 않을 때였는데 주머니를 탈탈 털어 그의 건축물을 보러 다녔어요. 오사카 주택가에 지은 스미요시 주택을 시작으로 물의 사원과 물의 교회를 포함해 그의 대표작을 여럿 둘러봤습니다. 그의 건축물에는 복잡한 계단과 구부러진 길, 숨겨 놓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 끝에는 결국 드라마틱한 빛과 어둠이 있더라고요. 건축물의 구조와 동선 자체가 빛의 시퀀스를 위한 장치 같았습니다. 빛과 그림자가 건드리는 것은 눈도 아닌 영성이었고요. 설계한 집을 보면 폭력적이기까지 했는데, 냉난방 시설에 의존하지 말고,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자연스러운 감각을 누리며 살라는 메시지가 강렬하게 와닿았어요. 그의 터프하고 낭만적인 언어가 좋았습니다.”
어느 하나 흐트러진 구석 없이 정제되고 우아한 살림은 침실에서도 마찬가지. 마리오 보타가 디자인한 조명을 포함해 크고 작은 조명이 최대치로 들어가 있다.
배우 유아인, 화가 권철화, 그래픽 디자이너 박노섭, 논픽션 대표 차혜영 등 친구들과 함께 운영한 ‘스튜디오 콘크리트’ 시절도 내공을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멤버들 모두가 멋쟁이이던 당대의 크리에이터 집단. 모두가 온전히 새로운 것을 한다는 쾌감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좋은 취향의 와인, 시계, 가구, 그림, 조명, 오디오를 섭렵했고 이제 그는 그 카테고리에서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가장 잘 맞고 좋은 것을 산다.
침실의 한쪽. 역시 조명과 그림, 그리고 책이 아늑하고 차분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건축과 건축가에 대한 관심은 스위스에 있는 페터 춤토어의 발스 온천으로까지 이어졌다. “2010년, 처음 보조 사진가로 일을 할 때 월급이 정말 작았어요. 몇 년 후 그 일을 마칠 때에도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고요. 4대 보험도 당연히 없었습니다.(웃음) 그렇게 번 돈을 종잣돈 삼아 스위스로 갔어요. 캐논 카메라가 제가 가진 가장 비싼 물건이어서 밤마다 꼭 껴안고 잤어요. 가방에는 자물쇠를 채워 끌어안고 자고요. 스위스 물가는 그때도 정말 비쌌습니다. 유스호스텔 숙박비가 하루 3만~4만 원 하던 때였는데, 바젤에서 발스까지 왕복 기차비가 40만 원 정도 나오더라고요. 오지라서 가는 길도 험난했는데 결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체크인을 한 늦은 저녁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호텔에 딸린 발스 온천에 세 번 들어갔는데, 매번 정말 좋더라고요. 뽕을 뽑는다는 마음이 있었지요.(웃음) 천장으로 희미하게 들어오던 빛과 밖에서 보던 알프스산, 동굴 같은 어둠과 심신이 정화되는 것 같다고 느끼던 기분이 아직도 생생해요. 주변 환경과 어우러지는 ‘맥락’을 가슴으로 이해하게 된 것도 큰 소득이었습니다.”
강철과 가죽의 조합만으로 안락한 편안함과 구조적 세련미를 동시에 이룬 포울 키에르홀름의 PK 22는 그가 가장 편애하는 가구 중 하나다.
이후 그의 사진은 분명 달라졌다. 모델을 데리고 자주 건축물 명소로 나갔고, 럭셔리 브랜드의 가방을 찍은 사진 옆으로는 그 가방이 놓일 것 같은 또 다른 공간을 함께 실었다. 가방과 비슷한 색상의 의자와 조명을 옆 페이지에 배치해 시공간의 서사를 짠 것도 이때부터였다. 피사체도 다양했다. 인물과 제품, 건축을 가리지 않았다. 2013년에 찍은 르코르뷔지에의 롱샹 성당은 버섯 같은 지붕을 클로즈업해 집을 기계에서 자연으로 보기 시작한 거장의 인생 후반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패션 브랜드 렉토의 오피셜 사진은 옷의 실루엣과 건축물의 구조적 선이 맞물리면서 한층 세련된 오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빛. 새벽부터 황혼까지 다양한 색과 질감의 빛을 그는 건축가처럼 섬세하게 조율하며 사진에 녹여냈다. 배우 유아인, 화가 권철화, 그래픽 디자이너 박노섭, 논픽션 대표 차혜영 등 친구들과 함께 운영한 ‘스튜디오 콘크리트’ 시절도 내공을 키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멤버 모두가 멋쟁이이던 당대 크리에이터 집단. 모두가 온전히 새로운 것을 한다는 쾌감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좋은 취향의 와인, 시계, 가구, 그림, 조명, 오디오를 섭렵했고 이제 그는 그 카테고리에서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에 가장 잘 맞고 좋은 것을 산다. 어릴 때부터 물건에 대한 애착이 있어 그렇게 들인 물건은 닦고 옮겨가며 행복하게 누린다.
오랫동안 빠져 있는 것 중 하나는 커피. 한국과 일본에서 틈날 때마다 가져온 다양한 원두가 역시 다양한 기능과 형태의 커피 머신 사이로 가득 모여 있다.
그는 늘 읽는 사람이기도 하다. 덕분에 좋아하는 건축가와 가구, 그리고 조명에 관해 길고 길게 애정을 쏟는 이유를 말할 수 있다.
이번 촬영은 주말에 진행했다. 약 한 달 정도의 일정을 봤는데 평일에는 빈 날이 없었다. 태풍 같은 시간을 지나 한숨 돌리는 때는 봄·여름 시즌과 가을·겨울 시즌 사이 4~5월과 10~11월. 이 기간에는 어떻게든 긴 휴가를 떠난다. 올해는 이탈리아 돌로미티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렇게 이국에서 한국과의 송신을 끊고 오래오래 건축물을 보고,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다 돌아온다. 그를 인터뷰하며 라이프스타일이 있다는 건 한 시절, 기꺼이 투자한 시간과 돈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었다. 라이프스타일은 투자하는 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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