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라 고하르는 음식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국제적으로 주목 받고 있는 이집트 출신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다. 현재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에르메스·꼼데가르송·구찌·소더비 등 다양한 브랜드와 협업해 대형 설치 작업과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2020년에는 테이블웨어 브랜드 ‘고하르 월드’를 설립해 작업 영역을 일상으로 확장했다. www.gohar.world
거실과 주방 사이의 다이닝 공간. 노구치이사무의 대형 종이 램프가 공간의 중심을 이룬다. 엔초 마리의 빈티지 박스Box체어,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고하르 월드의 플레이스 매트가 놓여 있다. 오른쪽에는 라일라 고하르와 뮬러 반 세베렌이 협업한 티어드 스탠드형 피전Pigeon 테이블이 자리한다. 그 위에 놓인 백조 모양의 테린과 고하르 월드의 에그 샹들리에Egg Chandelier가 인상적이다.
다채로운 오브제로 구성한 주방은 일상의 공간을 넘어 또 하나의 아틀리에처럼 살아 숨 쉰다. 특히 해럴드 앙카르Harold Ancart의 수채화가 눈길을 끈다.
“창의적 아이디어는 늘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돼요. 친구들과 함께 한 식사의 여운 같은 것이 제겐 가장 풍부한 재료죠.”
라일라 고하르의 창작 세계는 성장 배경과 긴밀히 맞닿아 있다. 1988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난 그는 튀르키예계 어머니와 이집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외교관, 기자, 디자이너, 정육점 주인 등 다양한 사람이 드나들던 부모의 집은 사교적이고 개방적 분위기 속에 언제나 활기가 넘쳤다.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다양한 문화와 창의적 에너지를 접하며 자란 경험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 세계의 기반이 되었다.
다이닝 공간에는 사비너 마르셀리스의 유리 테이블과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의 플레더마우스Fledermaus 체어를 배치하고, 오른편에는 잉고 마우러의 플로어 램프를 두었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갤러리처럼 연출했다.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에 유학한 그는 졸업 후 뉴욕에 정착해 언론계 진출을 꿈꿨지만, 결국 오랫동안 품어온 요리에 대한 열정이 그의 길을 바꿨다. 파슨스 디자인 스쿨에서 미디어 연구 과정을 수강하면서 맨해튼의 여러 레스토랑 주방에서 실무 경험도 쌓았다. “사실 요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제 관심사였어요. 일곱 살쯤부터 부모님이 만든 저녁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동생 나디아와 몰래 부엌에 들어가 냉장고를 뒤져 우리가 원하는 음식을 직접 만들기도 했죠.(웃음)”
이후 그는 친구들을 위한 특별한 식사 자리를 마련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유쾌하고 시각적 임팩트가 강한 그의 음식은 입소문을 타고 SNS를 통해 퍼졌고, 이를 눈여겨본 패션 브랜드와 미술 기관에서 협업 제안이 이어졌다. 대표작 중 하나는 디자이너 시몬 로샤와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이란 전통 빵을 한 땀 한 땀 꿰매 유아용 침구로 재해석한 ‘빵 퀼트’ 작업이다. 또한 경매사 소더비가 파리 본사 개관을 기념해 공간 연출을 의뢰했을 때는 초콜릿 벽을 설치하고, 접시를 망치로 깨뜨린 뒤 그 파편을 먹는 퍼포먼스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저는 음식과 예술이 대화하는 방식을 좋아해요. 사물 사이의 긴장감도 흥미롭고요. 제가 만드는 건 단순한 요리가 아니라 유희와 문화, 예술이 결합된 하나의 총체적 경험이에요.”
집 안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아치형 프레임의 대형 창이 눈에 들어온다. 뉴욕 도시의 건축적 맥락이 그 프레임 안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트라이베카 로프트, 상상의 장
이러한 미감은 그가 가족과 함께 거주 중인 뉴욕 트라이베카의 로프트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라일라 고하르는 우루과이 출신 셰프인 남편 이그나시오 마토스, 그리고 2023년 봄에 태어난 아들 파즈와 함께 이곳에서 일상을 꾸려가고 있다. “이 집은 원래 20세기 초 공장과 창고로 쓰던 곳이에요. 그 시절의 거친 질감과 탁 트인 구조가 남아 있어 자연스럽게 인더스트리얼한 분위기를 자아내죠.”
주방, 식사 공간, 거실, 아이의 놀이 공간은 벽 없이 자연스럽게이어진다. “불편하지 않아요. 물론 화가 날 땐 문을 꽝 닫고 싶을 때도 있긴 해요.(웃음) 그래도 공간이 열려 있으면 삶이 더 유연하게 흐르고, 생각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확장되는 기분이에요.” 많은 상업 공간이 고급 자재로 레노베이션하는 것과 달리, 고하르는 원재료 본연의 질감과 구조를 그대로 살렸다. 반짝이는 대리석이나 금속 소재는 오히려 자신을 지워버리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자주 쓰지 않는다.
침실에는 조너선 손더스Jonathan Saunders가 디자인한 매그니버그Magniberg 침구, 산타앤콜Santa&Cole의 바시카Básica 램프, 그리고 라파엘 프리에토Rafael Prieto의 에트나Etna 벽지가 어우러진다.
그렇다고 이 집이 단조롭거나 평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뚜렷한 콘셉트를 따르기보다 시대와 스타일, 작가의 미감이 뒤섞이며 독특한 질서를 만들어낸다. 다이닝 한가운데에는 노구치 이사무Isamu Noguchi의 종이 램프가 매달려 있고, 거실에는 카시나의 LC4 라운지체어, 빌리 리초Willy Rizzo의 커피 테이블,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의 암체어, 조아킹 텐헤이루Joaquim Tenreiro의 붉은 의자, 뮬러 반 세베렌Muller Van Severen의 암체어가 서로 조화를 이룬다. 또 친구이자 협업자인 사비너 마르셀리스Sabine Marcelis가 디자인한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다.
붉은 커튼이 거실과 침실을 구분 짓는다.
벽면 조명은 디자이너 라파엘 프리에토Rafael Prieto가 고하르와 함께 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매로Marrow’ 시리즈 중 하나로, 의미가 남다르다. “그날 저녁 식사가 끝나고 프리에토가 남은 오소부코(이탈리아식 갈비찜)에서 뼈를 들고 ‘이거 가져가도 돼?’ 하고 묻더라고요. 그걸 바탕으로 만든 조명인데, 아들 파즈가 태어났을 때 선물로 줬어요.” 침실에는 조너선 손더스와 매그니버그의 침구, 산타앤콜의 램프, 프리에토의 에트나 벽지가 어우러져 있다. 서로 다른 디자인 요소가 충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름을 이룬 데에는 고하르 특유의 직관과 감각이 한몫했다. 그의 감각을 덧입은 이 집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삶의 장면이 쌓이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무대와 같다.
라파엘 프리에토와 루프 사리옹이 디자인한 매로 벽 조명.
라일라 고하르가 사 모은 빈티지 오브제.
시간+전통+공예+유머=고하르 월드!
이 집에서 가장 뚜렷한 개성을 드러내는 요소는 그가 동생 나디아와 함께 2020년에 론칭한 브랜드 ‘고하르 월드Gohar World’의 오브제다. 이는 단순한 식기나 장식이 아니라 상상력, 유머, 전통 수공예가 어우러진 독창적 물건이다. “고하르 월드는 ‘시간, 전통, 공예, 유머’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기반으로 움직여요. 뉴욕에서 디자인하고, 전 세계 아틀리에와 협업하며, 이집트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고 있어요.”
바텐버그 레이스, 수제 양초, 유리 블로잉, 고급 이집트산 리넨 등 전통 기법이 다양한 오브제에 적용된다. 대표 아이템으로는 진주와 레이스 장식의 호스트 네크리스, 새틴 리본으로 만든 바게트 백, 식탁에 유머를 더하는 프라이드치킨 캔들, 삶은 달걀 위에 장식하는 에그 샹들리에 등이 있다. 브랜드 철학은 단지 오브제에 머무르지 않는다. 뉴욕 놀리타에 문을 연 첫 플래그십 스토어는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고하르 월드의 세계관을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기획했다.
거실에는 빌리 리초 커피 테이블을 중심으로 카시나의 LC4 세이즈 롱Chaise Longue 두 개, 가에타노 페셰의 크로스비Crosby 체어, 잉고 마우러의 페이퍼 램프, 조아킹 텐헤이루의 레드 체어, 그리고 전면에는 뮬러 반 세베렌이 카슬Kassl 에디션을 위해 디자인한 암체어가 놓여 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흉상 두 개가 창밖 화재 대피 계단 앞에 나란히 놓여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고하르 월드가 만드는 건 생필품은 아니지만, 일상에 유머와 따뜻함을 불어넣죠. 이런 오브제를 유리 진열장에만 두지 말고 매일 사용해야 해요. 테이블 위의 아름다움은 누군가와 나눌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지니니까요.” 이 철학을 실천하듯 그는 친구나 지인을 집으로 자주 초대한다. 생일이나 기념일보다 봄의 첫날이나 달리아가 피는 날 같은 작고 사적인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기며, 그에 맞춰 식탁을 꾸민다. 소박하지만 정성스러운 식사는 그가 삶의 의미를 나누는 방식이다. 직접 굽는 감자 요리, 함께 만드는 우루과이식 뇨키, 생굴 파티 같은 메뉴가 그의 테이블에 오른다.
“제가 만드는 음식이 이집트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 안에는 환대와 따뜻함, 관대함이 담겨 있어요.” 그는 식탁 위 오브제처럼 음식 역시 단순한 기능을 넘어선다고 믿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다고 느끼지만, 저는 그 일상 속에서도 창의력이 발현된다고 믿어요. 그리고 저는 그 중요성을 저만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나누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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