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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스타일 자기 주제를 알고 살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원로 건축가와 문화 예술계 인사들도 자주 찾던 삼청동 복정식당을 운영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전향한 김지현 대표의 삶에는 굽이굽이 변화와 도전의 시간이 많았다.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다시 힘을 내던 시간. 인터뷰 말미, 그녀가 “마침내 내 주제 파악을 해서 편안하다”고 말했을 때 내 마음까지 덩달아 놓이는 기분이었다. 고미술과 현대미술, 고가구와 아티스트 작업의 조화가 인상적인 집도 그런 편안함으로 아름다웠다.

민화와 현대미술, 빈티지 가구와 젊은 작가들의 가구가 풍성한 레이어를 만들어내는 김지현 대표의 성북동 집.


인테리어디자인은 기본적으로 보이는 영역에 대한 해법이다. 거실과 주방, 안방과 화장실이 나름의 동선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각자의 미감과 조화를 뽐내는. 하지만 늘 그렇듯 고수가 솜씨를 발휘한 공간에는 보이지 않는 오라와 기운이 보이는 것 사이사이 어떤 내면처럼 담긴다. 김지현 대표가 사는 집은 주한 대사관저와 고급 단독주택이 들어선 성북동 주택가에 위치한다. 벽돌로 지은 오래된 빌라인데 앞뒤로 넓은 정원이 자리하고, 각 세대 공간도 290m2에 달해 개방감이 남다르다.

 

어머니의 컬렉션인 김환기 작가의 소품. 거장의 작품은 크기와 상관없이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발휘한다.

 

집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잘생긴 반닫이와 궤. 오랫동안 사랑받은 물건 특유의 당당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그리고 거실과 안방에 툭툭 걸린 김환기, 김창열, 이경성 화백의 작품과 북유럽 및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모던한 얼굴의 가구들. 일본 유리 작가 레즈미 도시오 Toshio Lezumi의 조각, 은밀한 풍경과 분위기로 빛나는 김원숙 화백의 그림, 호메루 브리투 Romero Britto의 컬러풀한 사과 오브제와 수양버들에 날아든 새 떼의 얼굴이 귀여운 조선 시대 민화도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서로 다른 물성과 분위기의 합주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하면서도 내밀한 생기가 있는…. 김지현 대표의 지인들은 툭하면 이곳에 모여 밥을 먹고 와인도 마신다는데(촬영 전날에도 친구 몇 명이 늦게까지 있다 갔다고),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름다운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 절로 마음이 동할 것이고, 아름다운 집이 편안하기까지 하니 자연스레 이곳을 모임 장소로 결정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대니시 가구와 이탈리아 가구, 이헌정 작가에게 주문·제작한 테이블, 베란다의 조각 작품이 입체적 표정을 만들어내는 거실 풍경. 서로 다른 디자인과 물성이 행복한 조화를 이룬다.

 

거실 진입부. 왼쪽에 있는 거울 역시 이탈리아 작가의 아트 작품이다.

 

첫 질문은 “김환기, 김창열 화백의 그림이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는 것이었고, 그 답의 핵심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고가구와 근대미술 작품은 대부분 어머니의 컬렉션이에요. 젊을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셨거든요. 덕분에 저도 이런저런 전시에 많이 따라다녔어요. 3남매 중 막내라 어머니 입장에서도 데리고 다니기가 편하셨을 거예요. 공연도 많이 보러 다녔어요. 언더그라운드 가수 공연부터 판소리 무대까지.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원서동 ‘공간’ 사옥 지하 극장에서도 좋은 작품을 많이 공연해 자주 갔어요. 덕분에 미술과 가구, 디자인 같은 것을 오래전부터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무용과로 갔어요.(웃음) 김동순 디자이너가 만든 ‘울티모’라는 브랜드가 있었는데, 아방가르드한 면이 있어 무용하는 대학생 언니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거든요. 제 눈에도 너무 이뻐 보이더라고요. 경희대와 동 대학원에서 무용을 전공했지만 별 끼는 없었어요. 외부 강사분이 오셔서 하는 미학 수업이 더 재미있었지요. 졸업 후 커리어도 갤러리에서 시작했어요. 국제화랑 옆에 ‘그로리치 화랑’이라고 있던 것 아세요? 작가 두 명을 정하고 그들이 서로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전시를 자주 선보였는데, 깊이가 있었어요. 이후 갤러리 현대로 자리를 옮겨 2년 반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가 시집을 갔습니다.(웃음)”

 

다른 방과 비교해 좀 더 화사하게 꾸민 게스트룸. 오른쪽 벽에 걸린 사과 그림은 장필교 작가의 작품.

 

이헌정 작가에게 맞춘 거실 테이블과 앤트레디션의 소파가 산뜻하게 어우러진다.

 

갤러리 현대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뿌듯한 순간이 많았다. 어릴 때부터 여러 그림을 ‘그룹’으로 보고 자란 경험 덕분인지 이 작품과 저 작품을 매치해도 좋겠는데? 싶은 감각이 있었고, 그런 제안을 하면 ‘그거 좋네’ 하며 공감해주는 고객도 많았다. 그렇게 2~3점을 묶어 판매하면 갤러리 대표가 칭찬도 하고 인센티브도 따로 챙겨주었다. 1996~1997년경에는 많은 갤러리에서 작가의 작품으로 티셔츠나 컵 같은 굿즈를 만들어 선보였는데, 그 과정에서 개별 작가의 작품을 전작 도록 보듯 쭉 살피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방 곳곳에는 오래된 소품이 툭툭 놓여 있어 공간에 편안함과 고즈넉함을 더한다.


인정하고 비워낼 때 지니게 되는 나만의 색채
돌아보면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카페를 하고 싶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꽃꽂이도 열심히 배웠다. 일하는 것을 반대하던 남편 몰래 꽃을 한 아름 사 와 화장실 욕조에 숨겨놨던 때도 있었다. 사업자등록까지 몰래 낼 만큼 뭔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다. 삼성에서 운영하는 디자인 전문 교육기관 사디SADI에서 3년간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배운 때도 있었다. 그러다 삼청동에 한식 전문 ‘복정식당’을 냈는데 그 뿌리에는 유년 시절의 경험이 있었다. 매번 느끼지만 인간은 유년에 보고 경험한 것으로 어른의 인생을 살아간다. “서울대 인근 봉천동에 가족 농장이 있었어요. 버려진 땅 같은 곳이었지만 11만 23969m2(약 3만 4천 평) 정도로 규모가 컸어요. 복숭아·사과·수박·자두·배를 포함해 온갖 과일이 넘쳐났고, 닭 잡고 음식 준비하느라 들통이 세 개쯤은 늘 끓고 있었어요. 우리가 수영장에서 놀고 있으면 아버지가 이런저런 과일을 한 아름 따와 물속에 휙 던져주던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사냥도 좋아하고 낚시도 좋아하셨어요. 겨울에는 제주도에 내려가 계셨는데, 꿩을 잡아 냉동으로 서울 집에 부치시곤 했어요. 택배를 받으면 어머니는 투덜투덜하며 그걸 다시 손질해 만두소로 쓰고요. 그런 시절을 보내서인지 음식을 만드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었어요. 잘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고요. 무언가를 시작하려면 일단 배워야 하는 성격이라 궁중 음식이며 사찰 음식에 일식까지 열심히도 배웠네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겁 없이 식당을 열었고, 식재료 공급처를 뚫는다고 전국 팔도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순천, 영광, 통영, 제주… 요령이 없어서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지도 못했고 그냥 열심히 쫓아다니기만 했네요.(웃음) 용케 10년이나 버텼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접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가구 브랜드 e15에서 공수한 롱 테이블과 칼 한센앤선의 CH88P 의자로 중심을 잡은 다이닝룸 전경. 수시로 친구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소중한 아이템이다.

 

몸이 쇠약해진 것도 식당을 접은 이유였다. 대장암 판정을 받고 1년간 항암 치료를 하던 시절. “산에 엄청 다녔어요. 삼청공원도 10바퀴씩 돌고. 광화문 쪽으로도 자주 넘어갔는데, 계속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고 그 사이로 긍정적 생각이 들어와요. 그렇게 조금씩 희망을 품게 되고요.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내가 콤플렉스가 많고 못난 사람이었구나’ 하는 깨우침도 얻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조금씩 손만 댔지 모든 걸 걸고 끝까지 가본 적은 없으니까요. 그런 과거를 원망하며 산 적도 많았는데, 어느 순간 그런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거예요. 인연이 있던 한국화가 허달재 선생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기 주제를 알고 살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처음에는 내게 왜 이런 말을 하지? 살짝 빈정이 상했는데(웃음)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너는 주제가 안 돼’ 하고 쏘아붙이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애써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장점과 단점, 포기할 것과 붙잡을 것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인생에서 그런 분별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식당을 정리하고 다시 직업을 고민할 때 왠지 편안했어요. 가만 나를 돌아봤는데 가장 굵은 실체로 잡힌 것이 인테리어디자인이었어요. 집에 살 때도, 식당을 하면서도 공간을 여러 번 고쳤거든요. 복정식당 인테리어는 신경옥 선생님께 맡겼고요. 사디에서 디자인을 배우면서도 ‘언젠가 인테리어디자인을 해보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인테리어에 관한 전반적 과정과 흐름을 배울 수 있는 코스에 등록했고 인테리어를 10년 넘게 해온 친구랑 알음알음 포트폴리오를 쌓아가고 있어요. 어느덧 세 번째 프로젝트를 마쳤네요. 식당을 10년간 하면서도 이상하게 확신이 없었어요. 뭘 더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더 잘할 수 있지? 늘 쫓기는 마음이었어요. 그런 괴로움의 끝에 탄생한 레시피가 많지요.(웃음)

 

아들 방과 거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모든 방에 욕실을 따로 마련해 대가족이 살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구조다. 오른쪽 빨간색 작품은 김택상 작가의 회화.

 

조성호 가구 디자이너가 제작한 와인 랙. 상판 밑단까지 섬세하게 가공해 와인 잔을 끼울 수 있도록 했다. 볼수록 디테일이 뛰어나 널리 알리고 싶은 ‘작품’이었다.

 

그런데 인테리어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확신도 들어요. 주방 가구와 시스템이 있다고 치면 1cm 단위까지 계산해 최적의 동선을 짜드릴 자신이 있어요. 밖으로 보이는 것 말고 그 안에 담기는 ‘이너 뷰티’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 인테리어라는 생각도 지니고 있고요. 시공하시는 분들과 밥도 자주 같이 먹는데, 그런 시간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동료애가 생기더라고요. 다들 하나라도 더 잘해주시려 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또 새로운 챕터를 써나가는 중입니다.”

 

북유럽의 어느 가정집에 온 것처럼 따뜻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마감한 주방.

  

한국화가 허달재 선생이 그러시더라고요. ‘자기 주제를 알고 살면 인생이 행복해진다.’ 처음에는 내게 왜 이런 말을 하지? 살짝 빈정이 상했는데(웃음)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너는 주제가 안 돼’ 하고 쏘아붙이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애써서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장점과 단점, 포기할 것과 붙잡을 것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편안함에 이른 듯한 김지현 대표.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는 장 프루베의 빈티지 에디션이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본 그녀의 집은 새록새록 아름다웠다. 가장 마음에 든 공간은 주방. 상부장과 하부장을 따뜻한 톤의 나무로 짜 넣고 어머니가 주신 주전자를 더 돋보이게 연출하기 위해 긴 선반을 만들어 넣었다. 거실의 수납장으로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디자인의 크리스탈리아Kristalia 제품을 들인 안목도 돋보인다. 베란다에는 자연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철 오브제를 놓고 도예가 이헌정을 찾아가 맞춤한 높이로 거실 테이블을 제작한 것도 인상적이다. 조경이 그저 꽃 심고 나무 심는 것이 아니듯 인테리어 역시 그저 공간을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닐 텐데, 그녀의 터치에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묘하게 아늑하고 편안한 기품이 있다. 그런 분위기는 삶의 속도와도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한창 홍보해야 할 시기지만 그녀는 서두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이 없을 때 여행도 하고 전시와 공연도 보며 미래의 일을 더 잘 준비하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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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건추각가 지은 집> 저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5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