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를 닮은 11개 브랜드의 집
부산 달맞이길은 화려한 해운대, 시골 어촌 마을의 풍경을 간직한 미포, 고즈넉한 청사포 사이에 섬처럼 자리한 동네다. 도시 한복판이지만 경사진 지형과 살짝 떨어진 위치로 인해 한가로운 시골 정취가 있고, 갤러리와 디자인 숍, 카페와 레스토랑이 곳곳에 들어서 있어 낮에는 관광객으로 북적이지만, 밤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고요해지는 곳. 이효진 대표가 기획한 복합 문화 공간 에케는 이 동네를 꼭 닮은 장소다.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을 만나고 오가는 이들과 시선을 맞추며 소통할 수 있는 중정이효진 대표는 해운대 대림맨숀 프로젝트로 리빙 신에서 일찍이 주목받았다. 바닷가 앞 오래된 맨션에 편집숍 에크루를 연 이후 논픽션, ERD, 타르트훌리건 등 그와 뜻을 같이하는 브랜드가 하나씩 모이면서 탄생한 대림맨숀은 집과 쇼룸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독특한 장면으로 수많은 사람이 찾는 리빙 스폿이 됐다.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건축까지 직접 뛰어들며 탄생한 것이 바로 에케다.
공예 작가의 작품과 순수한 미감을 지닌 오브제를 소개하는 편집숍 에크루“예전부터 혼자 있는 것보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걸 좋아했어요. 어릴 때는 친구랑 ‘우리 커서 옆집살자’는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웃음) 그렇게 매일 말하다가 친구들이 모여서 집 대신 일터를 같이 만든 거죠.” 이효진 대표의 소개처럼 에케를 이루는 브랜드는 모두 그와 연결 고리가 있다. 리빙 업계의 든든한 동료이자 친구인 원오디너리맨션 이아영, 김성민 대표가 운영하는 아파트먼트풀 스테이 4RMS가 3~4층에 둥지를 틀었고, 1~2층에는 에케를 설계한 건축사 사무소를 비롯해 아이의 첫 옷으로 택한 브랜드의 숍, 자주 찾던 브런치 레스토랑, 좋아하던 일식당과 베이커리가 자리 잡았다. 그가 애정하는 브랜드, 깊이 인연을 맺어온 사람들이 모여 이곳이 탄생한 것이다. 일식당 오라스키와 사이에베이크는 에케에서 함께하기 위해 가게를 접고 기다렸을 정도라고.
“각자의 색이 분명하면서 내공이 있는 브랜드가 모여 느슨한 공동체를 이뤘으면 했어요. 음식점, 리빙 숍처럼 서로 업역이 겹치더라도 경쟁하는 대신 시너지가 나길 바랐고요. 이왕 모여서 일하는 거라면 서로 같이 있고 싶고, 즐겁게 함께할 수 있는 사이면 좋잖아요. 일본 후쿠오카 근교에 우키하라는 시골 마을을 여행한 적이 있어요. 과수원이 많은 마을의 어느 오르막길에 숍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도쿄의 여느 숍들보다 분위기가 좋았어요. 음식도 맛있고 물건 셀렉트도, 주인분들의 태도도 완벽했죠. 달맞이길에 오는 분들에게도 에케가 그런 장소가 되길 바랐습니다. 계절마다 와보고 싶고, 시간이 지나도 지겹거나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항상 그 자리에 있는 이정표 같은 곳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가까운 지인이자 개소 이후 첫 프로젝트로 에케를 맡은 라라호호 건축사사무소 조호제 소장은 이효진 대표가 원하던 ‘따로 또 같이’의 분위기를 중정, 외부 계단을 통한 수직적 연결, 벽돌과 콘크리트 등의 건축 언어를 이용해 물리적 공간으로 구현했다. 가운데에 중정을 두고 숍 여러 개가 둘러싸는 형태로 저층부를 계획하고, 경사진 모퉁이라는 위치, 삼각형 모양의 대지를 활용해 지하 주차장과 1층 중정,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면 나타나는 2층까지 각각 도로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도록 동선을 짰다. “느슨한 공동체를 공간으로 구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중정입니다. 사계절 달라지는 자연 풍경을 다 같이 볼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다는 건축주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요. 중정에 사람이 모이고 잘 작동하려면 일단 도로에서 건물에 접근하는 루트를 다양하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건물의 가치를 높이고 경사진 지형을 유기적으로 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조호제 소장은 여기에 더해 뒤쪽 도로와 앞쪽 도로를 이어주는 외부 계단을 설치해 중정을 관통하며 오가는 동선을 만들고, 2층에는 테라스를 조성해 수직적으로도 접점을 만들었다. 그 결과 각자 별개의 공간에 있지만 고개를 내밀기만 하면 서로 시선이 닿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건축가가 세심하게 설계한 장치가 모여 따로 있지만 같이 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프랑스 모던디자인을 테마로 한 42호. 가장 넓은 객실이라 로쉐 보보아의 마종 소파, 피에르 귀아리슈의 컵보드 등 규모감 있는 프랑스 디자인 가구를 택했다.
독일 빈티지 디자인을 테마로 하는 41호의 다이닝룸. 프랑크푸르트 키친 오리지널 유닛이 포함된 주방과 에곤 아이에르만의 SE 119 다이닝 체어를 만날 수 있다.
수직 마을 속 순환하는 가구와 머무는 경험
에케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은 3~4층에 위치한 아파트먼트풀 스테이 4RMS다. 붉은 벽돌 파사드 위,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한 세 개 층을 모두 차지해 에케에서 가장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파트먼트풀 스테이는 원오디너리맨션 이아영 대표가 스테이 사업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이효진 대표가 함께해보자고 제안하면서 본격적으로 구상하게 됐다. “그동안 빈티지 가구가 많이 대중화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예요. 전시도 하고 빌려주기도 하면서 여러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지만, 100% 온전히 경험하기에는 스테이가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죠. 럭셔리한 쇼룸 대신 집과 비슷한 무드의 공간에서 이 가구가 어떤 모습인지 느낄 수 있고, 어떻게 사용하면 좋은지 참조점이 될 만한 장소를 만들고 싶었어요.”
키즈브랜드 배네배네에서 운영하는 라이프스타일 숍 메종 본에. 부산에는 첫 매장스테이는 4RMS라는 이름처럼 총 네 개 객실로 이루어지고, 각각 네 가지 디자인 사조를 테마로 꾸몄다. 상대적으로 면적이 작은 31호는 작은 집에 어울리는 대니시 빈티지 가구와 오브제로 단정한 무드를 냈고, 건너편 32호는 핀란드 빈티지 가구로 따뜻하게 연출했다. 자연광이 덜 드는 곳이라 자작나무나 오크 등 밝은 톤의 수종을 택하고, 나무와 어울리는 오렌지색과 연두색 아이템, 핀란드 유리 공예품을 더한 것이 포인트. 41호는 독일 빈티지 디자인을 테마로 가장 현대화된 키친의 상징으로 꼽히는 프랑크푸르트 키친을 비롯해 디터 람스, 에곤 아이에르만 등 모던하고 기능적인 바우하우스 가구를 작품처럼 놓았다. 복층으로 규모가 가장 큰 42호에서는 프랑스 모던디자인을 주제로 샤를로트 페리앙, 르코르뷔지에 등 건축가의 가구를 만날 수 있다. “한 도시에 여행을 가더라도 여러 숙소에 묵어보고 싶잖아요. 그 마음처럼 객실 네 개를 다르게 꾸며서 올 때마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려 했어요. 객실마다 실의 구성이나 채광, 뷰에 맞춰서 어울리는 테마와 분위기를 고민하며 준비했습니다.” 이아영 대표의 설명처럼 각각의 객실은 규모와 뷰가 비슷하지만 문을 닫으면 이곳이 독일의 아파트인지, 핀란드의 주택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공간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가구의 힘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 이는 이아영, 김성민 대표가 가구와 조명은 물론 마감재, 식물, 콘센트와 손잡이 하나까지 세심하게 결을 맞춘 결과다. 이 밖에도 숙박객이 입실하기 전에 음악과 향을 세팅해 체크인할 때 완벽한 첫인상을 주는 것이나 숙박객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 무인 체크인, 계절마다 달라지며 리프레시를 돕는 어메니티, 주기적으로 큐레이션을 바꾸어 제공하는 커피와 책까지 그들이 섬세하게 선정한 요소들이 스테이에 하나하나 스며 있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 피오또. 부모님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채소로 요리하는 팜 투 테이블 레스토랑빈티지 가구와 하룻밤을 보낸 숙박객은 아침에 일어나면 아래층 가게에서 갓 내린 커피와 신선한 베이커리를 맛보거나 생맥주와 함께 점심을 즐길 수 있다. 숍을 구경하다 중정에 앉아 햇살을 맞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은 호텔이나 리조트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짜 내 동네의 경험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마음은 숙박객이나 에케를 방문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곳의 구성원에게도 찾아든다. 일터이지만 내 동네 같은 기분은 이곳의 특별한 점을 묻는 질문에 인터뷰이들이 공통으로 답한 것이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순간이 자주 일어난다. 급한 일이 있을 때 대신 매장을 봐주기도 하고, 가끔 옆집 식당에서 요리한 음식을 나눠 먹는 등 예전 마을 골목이나 평상에서 볼 법한 장면이 펼쳐진다. 건축가와 건축주가 같은 목표를 향해 뜻을 모아 서로 소통하는 공간을 만들었다면,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비로소 마을 같은 장소로 완성된 것이다. 조만간 브런치 레스토랑이 마지막 공간에 자리 잡으면 에케를 이루는 열한 식구가 모두 채워질 예정이다. 적응기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시작될 그들의 다정한 여정이 궁금하다면 이번 행복작당 부산이 열리는 6월, 달맞이길로 향해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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