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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스튜디오 정지욱 대표 행복은 인간으로 충실한 삶 위에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는 시대다. 하지만 이런 흐름에도 언제나 아웃사이더는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다 별로인 삶을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오롯한 삶을 일구며 내적으로 충만한 경우도 많다. 20년 넘게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정지욱 대표가 이끄는 그루스튜디오의 홈페이지에는 그간의 소식이 거의 없다. 하지만 회사는 20년 넘게 잘 굴러왔고 지금도 그러는 중이다. 그의 조용한 생각과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행복과 라이프스타일도 결국 인간으로 충실한 삶 위에 내려앉는 것임을 알게 된다.

바쁜 일상 중 이번 촬영 덕분에 집에 일찍 들어와 좋다며 해사하게 웃는 정지욱 대표.
집에 관한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그 안을 채우는 가구와 그림을 소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업계의 선수들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형광펜으로 쓴 것처럼 확실한 이름을 갖고 있는 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많다. 재미있는 것은 세상에 알려진 바가 많지 않은데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진짜 고수의 존재다. 한마디로 재야의 실력자. 이들은 인스타그램이며 스레드를 돌며 업계의 트렌드나 시공 프로젝트를 알리지도 않고, 은근한 자랑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일터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밀라노와 파리, 도쿄를 넘나들며 일은 계속한다. 흔히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면 어떤 가구를 좋아하고, 집의 중심이 주방인지 거실인지를 따지고, 좋아하는 아티스트는 또 누구인지를 묻지만, 그 모든 것의 뼈대에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관이나 가치관이 들어 있다. 그 태도와 신념으로 집을 꾸리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며, 시간도 배분하기 때문이다. 정지욱 대표의 집을 방문하면서 인생에 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해보자 마음먹은 것도 그런 이유다. 그의 집인 성수동 아크로서울포레스트에는 이건용과 정상화, 이헌정과 시오다 지하루를 포함해 유명한 작가의 작품들이 걸려 있고 창밖으로는 서울숲이 커다란 허파처럼 펼쳐지지만, 진짜 ‘라이프’는 그 이면에 들어 있다고 판단했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부러 롱 테이블을 고른 다이닝 공간. 주변 벽에는 정상화, 최병소 작가의 작품을 걸었다.

이우환 작가의 작품과 묘한 합을 이루는 조선 시대 팔각 항아리(왼쪽).
그는 어릴 때부터 시공간의 감성이 특별한 아이였다. “아버지가 섬유 사업을 하신 덕분에 집에 예쁜 천이 많았어요. 일본이나 미국·유럽을 돌며 가져오신 것인데, 디즈니 캐릭터가 있는 것도 있었고 잠자리 날개처럼 얇은 것도 있었어요. 어떤 것은 로고가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크리스챤 디올이었습니다. 벽지 위에 그런 천을 붙여가며 놀았어요. 부모님이 여행을 가시면 아예 가구 배치를 다 바꿔버렸지요. 1인용 소파라 힘을 쓰면 혼자서도 옮길 수 있었거든요. 방문 색깔을 새로 칠한 적도 있는데, 재료가 플라모델 도색에 사용하는 도료 물감이었어요. 그게 꼭 매니큐어처럼 생겼거든요. 그걸 몇십 개 사다가 달팽이걸음으로 칠한 거예요. 그때부터 집을 좋아했지요. 마당 화단에 물 뿌리기가 제 취미였거든요. 물을 쏴  뿌리면 흙은 더 흙색으로 진해지고, 나뭇잎은 더 초록색으로 반짝였어요. 물방울은 아롱아롱 나뭇잎으로 굴러떨어졌고요. 물을 하도 자주 주니까 나중에는 돌에 이끼가 생기더라고요.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집과 관련한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막연한 꿈은 많은 경우 세월과 비례해 선명해지면서 구체성이 부여되고, 뼈와 살이 붙는다. 입시 준비생이 되면서 미술학원을 다니던 그는 최종적으로 산업디자인과에 입학했다. 제품 디자인보다는 공간 디자인을 하고 싶어 학교생활을 오롯이 즐기지는 못했다. 차선책으로 가구를 택했고 2001년 9월 퍼시스에 입사했다. 대학 4학년 때의 일이다.

가구와 조명, 그림과 설치 작품이 풍성한 표정을 만드는 거실. 정면에 보이는 달항아리가 오래전 구입한 권대섭 작가의 작품이다.


깊이 만족하며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삶

퇴사 후 첫 번째 프로젝트는 친구가 의뢰했다. “엄마가 인하대 앞에 레스토랑을 개업할 건데, 디자인을 네가 해 줘.” 큰 기회가 된 건 청담동 삼익아파트 앞에 있는 작은 빵집 인테리어를 하는 프로젝트였다. 그곳에서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라 할 만한 인연을 만났다. 인테리어를 유심히 지켜보던 분이 함께 일해볼 생각이 없냐며 연락을 해왔는데, 그가 바로 이탤리언 레스토랑 일 마레로 성공 신화를 쓴 안도일 사장이었다. 1998년 서울 압구정동에서 첫 매장을 오픈하며 2000년대 큰 인기를 끈 일 마레는 당시에는 파격적이던 블랙&화이트 톤을 키워드로 1960년대 흑백영화 사진, 깔끔하고 모던한 아르네 야콥센의 앤트 체어, 테이블 위에 올린 금속 촛대 등으로 오픈과 동시에 당대 멋쟁이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당시에는 드물던 오픈 키친도 화제였다. 이후는 탄탄대로. 단순히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브랜딩과 마케팅까지 폭넓게 경험한 그는 지인들의 소개와 추천으로 서미앤투스 갤러리의 디자인 관련 전시 연출을 전담했고, 예술의전당에서 진행한 <디자인 메이드> 아트 페어, 파리 메종&오브제 한국관 연출, 한남 더 힐 커뮤니티센터 레노베이션 프로젝트 등 전시와 상공관 및 주택 프로젝트를 넘나들며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왼쪽 서재 테이블은 이헌정 작가의 작품. 오른쪽 한지 문 옆으로는 이건용 작가의 1997년 작품이 걸려 있다.
“아트 컬렉션도 30대 초반부터 시작했어요. 권대섭 작가의 달항아리를 20년 전에 구입했습니다. 왠지 모르겠는데 뭉근하게 달항아리에 끌렸고, 이왕이면 최고로 갖고 싶었습니다. ‘정지욱표 인테리어의 특징’ 같은 건 없어요. 저는 작가가 아니잖아요. 작가는 본인의 생각과 신념으로 작품을 만들고 고객에게 팔면 되지만, 저는 고객을 생각해야 하고 그 결과물을 사용하는 2차 소비자도 떠올리면서 재료 사용과 동선, 분위기 등을 만들어야 해요. 사옥을 꾸미는 프로젝트도 맡은 적이 있는데, 그런 건 너무 무서운 얘기잖아요. 책임감도 엄청나고. 제 의견을 주장하거나 관철하기보다는 최선을 다해 부름에 보답하고 헌신하자고 다짐합니다. 저는 고객분들이 전화를 하면 무조건 달려갑니다. 고객에게 편안한 사람이고 싶어요. 그래야 마음속 얘기를 다 할 수 있거든요. 회사 홈페이지에 프로젝트를 올리지 않는 건 혹시라도 그분들에게 해가 될까 봐서입니다. 사안에 따라 알리고 싶지 않은 프로젝트일 수도 있잖아요. 제 스스로 부끄러운 것도 있어요. 그분들의 예산과 아이디어로 공간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많은데, 제가 다 한 것처럼 자랑을 못 하겠더라고요.” 

아침저녁으로 가장 오롯하게 달콤한 기분을 맛보는 침실. 창문 너머로 드넓은 서울숲이 보인다.
왼쪽 정지욱 대표가 최근 가장 열심히 들여다보는 작품. 어머니의 뒷모습을 그린 것으로 조카이기도 한 하수민 작가의 솜씨다. 오른쪽 역시 오랜 컬렉션 대상인 소반. 현대미술만큼이나 옛 도자와 고가구를 좋아한다.
직업적 성취를 바탕으로 그는 꿈꾸던 라이프스타일 안에 산다. 부러 저층을 골라 서울숲이 한층 가깝게 보이는 전망을 누리고, 달 뜨는 밤과 초록 숲을 보며 깨는 아침에 ‘역시 집이 좋구나’ ‘감사한 일이다’ 하고 생각한다. 사무실은 통의동에 있는 한옥으로 소담한 마당과 정원이 아름다운 곳이다. 바람을 쐬며 일하는 것을 좋아해 날이 좋은 날은 꼭 창문을 열고 작업한다. 30대부터 이어진 아트 컬렉션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기꺼이 집으로 들여온다. 유명 작가의 작품도 많지만 도자와 회화를 오가며 작업하는 강준영, 창과 촛불 작업으로 유명한 김희원 등 비교적 젊은 작가의 작품도 적지 않다. 이들과도 오랜 친구 사이로 전시가 열리면 기꺼이 발걸음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별 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했는데, 정지욱 대표 역시 단순하게 일상을 꾸려나간다. 내기 골프를 포함해 향락이라 할 만한 것은 없다. 정기적으로 하는 필라테스와 PT가 삶의 기쁨이자 활력소다. “제가 못하는 게 많아요. 당구도 안 쳐봤고 스타크래프트에도 관심이 안 가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누가 게임을 하자고 하면 힘들더라고요. 술도 즐겁게 마시다가 술 먹는 게임으로 분위기가 흘러간다 싶으면 급격하게 멘털이 흔들립니다.(웃음) 저는 행복이 대단한 데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고요한 숲을 산책할 수 있고, 신의와 의리를 지키고,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앞뒤 안 재고 당장 갈 수 있는 것. 그런 마음과 태도 안에 진짜 행복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요.” 

거실과 서재, 침실이 겹겹이 이어지는 복도에서. 왼쪽에는 이배 작가의 그림을, 오른쪽에는 김희원 작가의 사진 작품을 걸었다.

*기사 전문은 <행복> 3월호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매거진 보러가기

 

글 정성갑(갤러리 클립 대표, <건축가가 지은 집> 저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5년 3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