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 천고와 남향 빛이 아늑한 서윤정 작가의 집. 외할아버지가 살던 집에 본인만의 감성과 색채를 더하는 중이다.
학부 시절 완성한 작품 앞에서. 봄기운처럼 생생한 색과 면은 서윤정 작가와 그녀의 작품 세계를 대변하는 특징 중 하나다.
집 생각밖에 없는 이의 집은 과연 사랑스럽다. 우리가 집에 바라는 첫 번째 조건은 아늑함일 것이다. 빛과 바람이 잘 들고, 음식을 하든 음악을 듣든 나의 시간을 온전히 지탱하고 꾸려줄 수 있는 안팎의 여건. 이것이 충족되고 나면 그다음 단계에서 욕심을 내게 되는 것은 어떤 생기가 아닐까 싶다. 즐거운 기운이 충만해 집 자체가 비타민이 되는. 집에 깃든 그런 기분 좋은 바이브는 취향이나 안목처럼 우리가 늘 말하는 좋은 집의 조건보다도 더 본질적 행복을 안긴다.
작은 오브제와 컬러, 기하학 도형 무늬로 화사한 기운을 불어넣은 침실.
1층 작업실에는 마티스의 색종이 오리기 작품을 걸었다.
외할아버지 집에서 꽃피운 우리의 시간
분당의 단독주택 지구에 있는 서윤정 작가의 집은 계절로 비유하자면 봄 같았다. 천고가 높은 삼층집. 맨 아래층에는 아이와 엄마(물론 남편도)가 함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작업실 겸 공부방이 있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접을 수 있게 디자인해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종이 그림. 선반에서 시작한 그림은 그 앞의 책상을 지나 마룻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정원이 보이는 맞은편 벽에는 작은 세면대가 있다. 유치원에 있을 법한 앙증맞은 크기로, 솜씨 좋은 엄마는 타일 한 장 한 장 위에 정성껏 그림을 그려 마치 마티스의 그것처럼 화사하고 기분 좋은 파란 공간을 만들었다. 서윤정 작가의 감각은 그 옆 욕실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거기에는 제법 큰 사각 욕조가 있는데, 이곳의 타일 역시 본인의 그림으로 완성했다. 그야말로 비스포크 욕조이자 집 안으로 들어온 동화적이고 아름다운 ‘바다’. 사시사철 볕이 좋은 프로방스나 토스카나에서 봤음 직한 욕조의 모습이다.
초벌한 타일에 도자기용 물감으로 완성한 욕조. 세상에서 하나뿐인 ‘서윤정표 아트워크’이기도 하다.
왼쪽 꼭대기 층에서 내려다본 거실. 오른쪽 주방에도 비타민 같은 컬러가 가득하다.
2층은 이 집의 하이라이트. 3층까지 시원스레 뚫려 천고가 유독 높은 거실과 부러 단차를 둬 공간을 확실하게 분리한 주방과 휴게실. 다이닝룸을 겸하는 작은 리빙룸이 메인 공간보다 더 높아 입체적 구조의 카페에 온 것처럼 색다른 시선이 만들어진다. 반대편에는 서윤정 작가가 학부 시절에 그린 큰 그림이 걸려 있고 그 옆으로는 남편의 서재가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다. 꼭대기 층은 부부 침실이자 아이 방으로 꾸몄다.
이 집은 원래 서윤정 작가의 외할아버지가 17년 넘게 사시던 곳이다. 서윤정 작가도 명절 때면 외할아버지를 뵈러 이곳을 찾았다. 당시에는 그리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이 집 구석구석에 빨간색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가 진짜 멋쟁이셨어요. 취향도 확실하시고. 그런데 제 눈엔 집이 그리 아름답지 않았어요.(웃음) 집 안에 빨간색이 너무 많아 정신 사나운 면도 좀 있었거든요. 계단 카펫도 빨간색이었고 커튼도 벨벳 재질의 빨간색이었어요. 정원에는 철쭉과 동백을 심으셨고 차도 빨간색이었어요."
각별히 신경 쓴 서현이 방. 부러 단차를 둬 공간에 재미를 더했고, 동화 속 풍경 같은 작은 가구와 버섯 오브제도 추가했다.
다이닝 룸을 겸하는 작은 리빙룸. 인터뷰가 끝나고 촬영에 합류한 서현이와 함께. 남편 이현익 씨는 “아내를 만난 후 삶의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정원도 가꾸고 <글레디에이터> 대신 <프렌치 수프> 같은 영화를 보며 생각에 잠기는 사람이 됐다”며 시종 밝은 모습이었다.
순간순간 정성을 다하면 제대로 행복해진다
서윤정 작가와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남편 이현익 부부의 노력으로 외할아버지의 ‘레드 하우스’는 <행복이 가득한 집>에도 나올 만큼 산뜻하고 아름다운 집이 되었다. 촬영을 한다고 하루 연차까지 낸 남편은 “단독주택 생활은 상상도 안 해봤는데 너무 만족스럽다”며 시종 밝은 모습이었다. “아내가 한 번씩 책이며 영화를 추천해줘요. 헤르만 헤세의 <정원 가꾸기의 즐거움>도 아내가 제안해 읽었습니다. 흙을 일구고 잡초를 뽑고 토마토와 꽃을 돌보며 영혼이 정화되는 경험을 찬찬히 서술한 책인데, 이런 느낌은 뭘까 궁금해 작가님처럼 잡초도 뽑고 과일도 키우고 풋고추랑 대파도 심어보니 재미있는 거예요. 지금은 이런 밭일과 정원 일을 제가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삶과 행복에 대한 가치관도 바뀌었어요. 예전에는 단순히 회사원으로 충실한 삶을 살았거든요? 열심히 일하고 술 맛있게 먹고 상사에게 잘하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책이며 영화도 열심히 보고 주말에는 정원도 가꿉니다. 옛날에는 디자인 의자를 보면 적응이 안 됐어요. 그냥 편한 의자 사지 왜 비싸고 불편한 의자를 살까 싶었거든요. 이제는 안 그럽니다. 아내가 늘 강조하는 게 있어요. 하루하루 정성껏 살아가자고. 그게 행복이라고. 정성껏 사는 삶을 강조해 요새는 출근하기 전에 이부자리도 꼭 정리해놓고 나갑니다.” 왼쪽 직접 그린 타일로 꾸민 세면대. 오른쪽 거실 한쪽에 있는 계단에도 서윤정 작가가 직접 그린드로잉으로 만든 카펫을 깔았다.
서윤정 작가에게 집 꾸미기는 오랜 취미이자 관심, 그리고 재능이었다. 열아홉 살에 유학길에 올라 시카고 예술대학과 런던 골드스미스 대학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한 덕에 일찍부터 내 집을 가꿔야 했고,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집의 감각’을 만들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집 꾸미기를 좋아했어요. 툭하면 책을 블록처럼 쌓아서 집을 만들었거든요. 엄마 아빠 방에 있던 커튼을 제 방에 갖다 붙인 적도 있고 이런저런 가구까지 옮겨와 부모님이 ‘어린애가 힘도 좋다’며 웃었어요. 미국과 영국에서 유학하던 시간도 집에 더 큰 애정을 갖게 했어요. 집을 구하는 것부터 뷰view와 구조를 결정하고 채우는 것까지 다 직접 해야 하잖아요. 그곳에서 안 사본 가구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차근차근 알게 됐지요. ‘아, 이런 가구는 금방 질리지, 이런 물건은 결국 돈 낭비야, 얼마 안 가 쓸모없게 돼’ 하는 식으로요.”
이 집에는 그런 그녀의 시간과 경험, 그리고 동경이 촘촘하게 녹아 있다. “해외에서 공부할 때 인테리어 스타일링을 보조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때 좋은 집을 진짜 많이 봤죠. 그런데 무엇보다 저마다 취향이 너무 확실한 거예요. 크든 작든 정원이 꼭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었고요. 어떤 집은 클래식하고 또 어떤 집은 모던하고. 20대 초반, 파리에서는 편집숍이 유행했어요. 저도 갈 일이 있을 때마다 들르곤 했는데, 그곳에 지금 저희 집 거실에 있는 제르바소니의 화이트 고스트 소파가 있었어요. ‘아, 언젠가 우리 집에도 꼭 들여놓고 싶다’ 하고 기약했지요. 나중에 보니 한국에도 이 브랜드가 들어와 있어 바로 결정했습니다. 정원도 틈날 때마다 우리 스타일대로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계실 때는 소나무와 동백이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그 사이사이로 수국과 장미, 작약이 자랍니다. 무궁화도 있고요.” 길게 이어지는 종이 그림이 인상적인 작업실.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이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꼬마 화가 서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연신 “좋아”를 외치며 촬영을 도왔다.
이런 집에 사니 얼마나 행복하냐는 질문에 남편이 특유의 진지한 듯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진짜 제 인생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긴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는 히어로가 나오는 마블 영화나 <글래디에이터> 같은 영화를 좋아했거든요. 그런데 최근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가 <프렌치 수프>예요. 1985년의 프랑스를 무대로 하는 영화인데, 한 끼 식사를 위해 열심히 채소를 가꾸고, 요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 저게 선진국의 삶이구나’ 싶더라고요. 내가 먹는 건데 당연히 최대한 공을 들여서 제대로 하는 게 맞지 싶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문제는 기본을 소홀히 하는 데서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요.”
기사 전문은 <행복> 2월호를 통해 만나볼 수 있습니다! E-매거진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