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에이브 로저스 디자인Ab Rogers Design을 운영하는 공간 디자이너 에이브 로저스. 그가 앉아 있는 의자는 ‘만약 우리 아빠가 의자라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주제로 아버지인 건축가 리처드 로저스가 자유롭게 앉아 일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디자인한 프로토타입.
영국에서 활동하는 공간 디자이너 에이브 로저스는 색의 마술사라 불린다. 빨간 큐브 10개를 아이코닉하게 설치한 스토어 꼼데가르송 파리, 집의 중심이 되는 원형 계단을 온통 무지개색으로 칠한 아파트, 매년 태국 파타야에서 열리는 뮤직 앤 아트 페스티벌 원더프루트Wonderfruit 등 실험적 프로젝트를 해왔고, 2020년 왕립 마스덴 병원의 암 치료 허브인 매기즈 센터를 치유와 사유를 돕는 오아시스 같은 곳으로 설계한 뒤부터는 지속 가능한 헬스케어 공간의 비전을 꾸준히 제시하는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가장 중 요한 존재는 바로 색이다. “자연의 색은 그 어떤 것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서로 보완하며 조화를 이루죠. 대담하게 존재감을 발휘하든, 조용히 침잠하든 컬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에 아름다움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가 즐겨 쓰고 애정해 마지않는 색은 아내 애나 보텔라Ana Botella와 세 명의 딸 엘라Ella, 룰라Lula, 제이Jay가 함께 사는 집에도 어김없이 깃들어 있다. 새파란 카펫과 침구를 배치한 딸 룰라의 방, 바닥부터 벽까지 붉은색으로 마감한 침실과 욕실, 거실의 붉은 테이블과 소파까지 색은 매 순간 존재감을 과시한다. 그는 2011년 이스트런던에서 1900년대 방직 공장으로 지은 이곳을 발견하고 첫눈에 특별한 공간이 될 것임을 직감했다. 곧장 경매로 구입한 뒤 직접 집을 고쳤고, 13년이 지난 지금도 살고 있다. 인테리어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가족의 방이 자리한 3층 공간. 파랑, 빨강 등 각자가 고른 색상으로 방을 채웠다. 붙박이장을 거울로 마감한 덕분에 색의 존재감이 더욱 살아난다.
컬러는 어떤 방식으로든 공간에 아름다움과 에너지를 가져다주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빛은 색을 더 강하게 만들며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이 집을 처음 봤을 때, 남향으로 곳곳에 뚫린 창을 통해 햇살이 말 그대로 ‘쏟아지고’ 있었어요. 공장에서 일하는 작업자들에게 빛을 제공하기 위한 장치였죠. 기다란 평면에 천장이 높아 개방감이 있었고 구조체가 그대로 드러나는 투박한 모습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규모와 스타일, 위치 모두 제가 오랫동안 바라던 모습이었어요.”그는 건물을 구입한 후 2년에 걸쳐 리모델링을 했다. 본래의 장점을 더욱 살려 벽돌 벽,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등의 구조체를 최대한 노출했고 총 18개의 커다란 창을 냈다. 당시 건물은 반쯤 무너진 상태였고, 공사를 진행하는 동안 건물이 무너지지 않게 긴급히 보수한 적도 있다고. 완성된 집은 지상층은 그래픽 스튜디오를 위한 사무실(원래는 그의 사무실이 이곳에 있었으나 지금은 걸어서 8분 거리에 있는 건물로 옮겼다), 2층은 가족의 공용 공간, 3층은 각자의 사적인 방이 있는 집으로 쓰고 있다.
남향으로 난 커다란 창을 통해 종일 햇살이 드리우는 거실. 가족의 기억, 취향이 담긴 물건과 작품이 곳곳에 놓여 있다. 컬러풀한 가구도 이 집만의 포인트.
파란색 카펫과 침구를 배치한 딸 룰라의 방. 그 너머 욕실 바닥은 지중해를 닮은 색으로 마감해 청량함을 더했다.
“저희 가족은 주방을 중심으로 공존합니다. 바깥세상으로 나서기 전 모이는 베이스캠프이고, 게임이나 그림 등 각자의 시간을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평소에는 주로 식사와 대화를 하는 곳이지만, 지인과의 모임이나 춤과 음악을 비롯해 다양한 이벤트를 위한 ‘극장’으로 언제든 변신할 준비가 되어 있죠.”
주방과 다이닝룸, 거실이 하나의 넓은 공간에 펼쳐진 아래층에는 아내 애나와 그가 수집한 아트 컬렉션,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빚은 도자기, 향신료(그는 요리가 취미다) 등 가족의 기억이 담긴 오브제와 가구, 아트워크가 곳곳에 자리한다. 이곳이 흰 캔버스 위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 같은 장소라면, 위층은 공간 자체가 가족 각각의 캐릭터를 표현하는 작품이다. 각각의 방은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색과 질감을 선택하고 원하는 레이아웃으로 구성했다. 이를테면 마스터 베드룸은 동쪽 벽을 온통 진한 빨간색으로 마감하고 라디에이터는 샛노랗게 칠했다. 햇빛을 더욱 잘 반사할 수 있도록 위에 거울을 얹었는데, 이 작은 거울이 방 구석구석까지 빛을 반사해 색이 주는 에너지를 더욱 강하게 뿜어낸다.
메인 침실은 동쪽 벽을 진한 빨간색으로 칠했다. 햇빛이 들면 더욱 생동감 넘치는 색감이 펼쳐진다.
활기찬 단색의 공간은 거대한 덩어리 같은 건축을 해체하고 비물질화하는 효과를 발휘합니다. 빛 없이는 색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심해에서는 빛의 파장이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붉은 물체가 붉게 보이지 않죠. 집에 더 많은 빛을 들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빛과 색은 서로를 더 강하게 만들며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계절마다 옷차림이 바뀌듯, 에이브 로저스 가족의 집은 유기체처럼 성장한다. 가족은 집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원하는 모습으로 공간을 상상하며 다시 구성해 나간다. 최근에는 거실에 광택이 강한 붉은색 원형 테이블을 새로 들이고 그에 어울리는 작품을 예술가 니사 니시카와Nissa Nishikawa에게 의뢰했다고. 테이블의 에너지를 반영해 디자인한 태양처럼 붉은 원형 오브제와 검은색 세라믹 도검은 테이블 근처 벽에 설치해두었다.
침실의 라디에이터는 비비드한 노란색으로 마감했다. 사진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라디에이터 윗면에 설치한 작은 거울이 햇빛을 반사해 공간을 더욱 밝고 역동적으로 만든다.
“지금 큰딸 엘라는 호주에, 룰라는 맨체스터에, 막내 제이는 리스본에 살고 있어요. 그러나 언제든 돌아올 수 있도록 가족 모두의 일부가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집은 소중한 물건, 익숙한 빛과 색, 가족과의 수많은 기억으로 구성된 균형 잡힌 생태계입니다. 가족 외에도 친구, 친구의 친구들까지 많은 사람이 이곳에 와요. 그들의 흔적과 시간까지 쌓이며 집은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 에이브 로저스를 〈행복〉에 소개한 런던 디자인 브릿지 앤 파트너스(designbridge.com)의 시니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양연주. 그는 20여 년 전, 에이브 로저스 디자인(abrogers.com)의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에이브 로저스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약 6년 동안 함께 일했고 요즘에도 프로젝트 협업을 하기도 한다고. 에이브 로저스에 대해 “그가 작업하는 프로젝트를 보며 컬러가 공간에 미치는 영향을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며, “색이라는 개념에 대해 큰 영감을 준 분”이라고 소개했다.
기사 전문은 <행복> 12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해외의 아름다운 집 빛과 색으로 쌓아 올린 '집'이라는 팔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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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디자이너 에이브 로저스가 이스트런던의 오래된 방직 공장을 고쳐 만든 집은 가족이 직접 고른 색과 빛으로 가득 차 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