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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감독 김태성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 음악이 사라진 순간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히트 영화·드라마 음악감독 김태성. 러닝타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음악이라는 ‘공간’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그가 필연적으로 택한 라이프스타일도 이를 닮았다.

“TV, 스피커, 흡음판, 라운지체어, 제 작업 테이블을 차례대로 두었어요. 라운지체어는 감독님과 PD님을 위한 건데요. 그분들이 뭔가 좋은 대접을 받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좋겠어서 특별히 넣었어요. 그 뒤로 제가 앉는 배치는요, 음악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즉각즉각 체크하려 한 거고요.” 1층 작업실. 작업을 위한 도구 빼고는 숱하게 많은 트로피 하나 꺼내놓지 않았다. 라운지체어는 덴마크 브랜드 케베Kebe 제품이다.
정답도 모르면서 매번 해답을 쓰고야 마는 계절 탓이다. 어김없이 낙엽이 진다. 저렇게 시간이 야위어간다. 저 야위어가는 것의 기운을 먹고 곧 봄으로 돌아오리라, 자만하고야 마는 우리의 한 해가 간다. 거리마다 나뭇잎 드러누운 11월, 서대문구의 어느 동네 모퉁이에 섰다. 대로를 지나고, 가지를 친 골목길을 어지간히 걸어야 보이는 자리다. 지척에서 중학교 교정의 소음이 낭창하다.

그 삶의 생음은 이 집의 1층 작업실 문을 들어서자 온데간데없다. 미세한 타건음과, 그것마저 숨죽이게 만드는 피아노 선율뿐. 저 소리의 주인은 자신을 ‘film music composer, 음악으로 연출하는 사람’이라 설명하는(공식 홈페이지) 영화·드라마 음악감독이다. 국내 역대 박스오피스 1·2위에 오른 〈명량〉 〈극한직업〉을 비롯, 〈범죄도시2〉 〈파묘〉까지 무려 네 편의 ‘천만 영화’ 음악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SKY 캐슬〉 〈멜로가 체질〉 〈종이의 집〉 〈유미의 세포들〉 〈알고 있지만〉 〈경성 크리처〉 등 흥행 드라마의 음악도 그에게서 왔다. 21세기 〈시용향악보〉쯤에 기록되어야 마땅한 〈나의 해방일지〉도 있다. 박수 치는 대신 끄덕여주는 듯한 그 음악을 들어보았다면, 이 말을 긍정할 것이다.

뉴욕의 스튜디오형 주택을 닮은 집. 침실, 거실, 주방, 욕실이 벽체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다. “집에서 빈 공간을 좀 보고 살려고 왔다”는 김태성 감독의 말에 ‘서비스센터’ 전수민 대표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뉴욕 집과 하와이 별장, 릭 루빈의 명상하는 집을 떠올렸다.
“영화음악에서 제일 중요한 순간은 음악이 사라진 순간이에요. 주욱 흐르던 음악이 멈추면 그때까지 음악의 감정을 따라가던 관객들이 비로소 생각을 해요. 그 장면이 해석으로 비워지는 거죠. 그러니까, 음… 저는 그런 상태를 위해 이 동네, 이 집에 온 거예요.” 그가 ‘음악이 멈춘 장면’을 꿈꾸며 이사 온 동네, 그리고 집. 이곳엔 페르마타 같은 일상이 있을까.


하루키 루틴? 김태성 라이프
“하루키적으로 살고 싶어 하던 때가 있어요. 그 사람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대여섯 시간 집중해 글을 쓰고, 오후가 되면 10km 정도 달리거나 한 시간 정도 수영하고 그런다잖아요. 처음 몇 달은 흉내도 내봤지만 그건 제 라이프가 아니었어요. 오해한 거죠. 그 사람이 딱, 딱 루틴화한 생활 때문에 롱런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본질이 아니었어요. 그 사람은 ‘선택의 순간’을 줄인 거예요. 저는 누구보다 많은 선택의 순간을 매일 겪고 있어요. 클라이언트에게, 관객에게 선택의 옵션을 주기 위해 저는 훨씬 더 많은 선택을 해야 하니까요. 일상에서만큼은 선택 요소를 줄여내야 하는 이유였죠.”

이 집에 살기 전에도 일주일에 다섯 번 목욕탕을 들를 정도로 목욕이 그에겐 중요한 일과다. “눈뜨면 바로 욕조에 뛰어들고 싶다”는 바람은 침대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의 저쿠지 욕조로 실현됐다.
지구가 천천히 돌아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가쁜 하루를 보내던 그가 어느 날 자신에게 선사한 안분지족. 이를테면 이런 거다. 끼니와 커피, 운동 같은 웬만한 일상의 선택 목록은 동네 ‘가게들’에서 해결한다.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 괜찮은 커피집이, 식당이 즐비해서다. 매일의 매식이 건강 염려로 이어지지 않을 만큼 꽤 괜찮다. 무엇보다 이 동네엔 유행이든 예술이든 주장이든 무언가 생산해내는 사람들의 주거지가 골목골목이 들어차 있다. 논현, 학동, 압구정(전에 살던 동네)에 없는 훈김, 느슨함, 안정감은 그런 데서 온다.

자전거 타다 부러진 다리 탓에 한동안 쉰 요가를 다시 시작했다. 가끔 옥상에 올라가서도 한다.
“이 동네에 와선 옷도 요가복만 입어요. 그것도 한 브랜드 것만요. 그렇게 입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은 동네거든요. 여기 와서 책도 다 버렸어요. 일은 해야 하지, 책들은 주욱 꽂혀서 나 좀 읽어달라는 것 같지, 다 스트레스였거든요. 버리는 게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이라는 걸 이곳에 와서 알았어요. 선택의 순간을, 거기에 쏟는 에너지를 줄여주는 동네예요. 그걸 아껴서 쉬는 데 쓰게 하죠.”

“이 동네, 이 집에서는 ‘그냥’ 살고 있어요. 억지로 뭔가를 하면서 살지 않아요. 다 자연스러워지고 있어요. 이제 저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찾은 것 같아요.”

옥상의 전망이 백미다. “이제 요가 하러 밖으로 나가거나, 멍 때리려고 한강 변까지 가는 일이 없어요. 집에서 모든 게 해결되니까요.” 다리 부상 때문에 변변히 운동도 못 했는데, 이 집에 와서 몸무게 앞자리가 두 번 바뀌었다. 그는 그게 공간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공간이 어떤 에너지를 준다고 믿게 됐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하루하루는 꽤 가쁘고, 치우쳐 있다. “눈뜨면 바로 욕조에 뛰어들고 싶다, 빈 공간을 좀 만들어달라, 디자이너에게 딱 이거 두 개만 이야기했어요. 주방이든 거실이든 서재든 크게 필요 없었죠. 20년 동안 너무 일만 하며 살았다, 이제 좀 느슨하게 풀자, 집에서라도 ‘멍 때리고’ 있어보자, 그런 생각이었으니까요.” 라이프스타일은 단지 ‘취향’이 아니라 ‘삶의 태도’라는 걸 그는 이 동네에서, 딱 그만큼의 집을 만들며 알았다. 파티션도, 벽도 없이 침실과 거실과 욕실이 한 몸인 스튜디오형 공간(디자이너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뉴욕 집에서 영감을 받았다는)에 자신을 내버려두었다. 예전처럼 요가 하러 나서거나, 한강가에 멍 때리러 가지도 않았다. 2층 생활공간에서, 옥상에서 그게 모두 해결되었다. 대신 작업실과 집의 경계를 두었다.

“일과 생활의 분리. 삶의 태도를 변화시키려고 공간을 이렇게 바꿨더니, 공간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또 바꿔주데요. 저는 공간이 어떤 에너지를 준다고 믿게 됐어요. 되게 좋은 선순환 같은 거요.” 

작업실에 수문장처럼 세워진 전기 자전거.
그의 집은 침실 겸 거실 옆구리에 생활 도로를 끼고 있다. 유동 인구가 그리 많지 않지만 그래도 길이다. 게다가 현관문을 열면 옆집 카페 입구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내 생활이 프라이버시를 요구할 만큼 그렇게 비밀스럽거나 하진 않다”는 그의 뜻대로, 도로와 면한 창문에 커튼 하나만 둘렀다. 아래층 작업실도 별다르지 않다. 환기라도 할라 치면 가끔 카페로 착각한 연인들이 들어오지만, “아, 난 카페 같은 공간에서 일하는구나” 싶다. 그 도로 옆 창가에서 비스듬히 활공하는 눈을 관찰하는 날도, 젊은 연인의 밀어를 주워듣는 날도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먹은 시간들 틈으로 평범한 그 삶의 목록은 채워질 것이다.

1층 작업실. 감독님과 PD님을 위한 공간 옆으로 미팅 테이블 정도를 둔 단출한 구성이다.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좋은 일
이야기는 끝이 났고, 촬영을 남겨둔 우릴 두고 그는 자전거 타러 간다며 사라졌다. 낙엽 드러누운 골목 위로 휘이 바람이 지나갔다. “‘음악이 사라진 순간’,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 이 동네, 이 집에 왔다”는 그의 말이 그나마 이해되기 시작한 찰나였다.
신혜욱 시인의 시 ‘눈 이야기’에 이런 구절이 있다. “한 번에 한 사람이 된다는 건 충분히 좋은 일.” 페르마타 같은 동네, 페르마타 같은 집에서 그는 저렇게 한 번에 한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공간 디자인을 담당한 전수민 디렉터는 브랜딩 디자인 전문 기업 ‘서비스센터’를 이끌고 있다. 디자인 업의 본질 자체가 서비스라는 생각에서, 서비스센터라고 지었다. 그 명명처럼 서비스센터는 브랜드 전략 기획, BI·UI·UX·웹사이트·그래픽·전시·공간 디자인, 브랜드·푸드 컨설팅, 아트·뮤직 큐레이션까지 크고 작은 브랜드가 탄생하고 자생하는 데 필요한 분야의 이런저런 서비스를 제공한다. 부산의 베르크Werk, 버거샵Burgershop, 서울 SNU안과의원, 최상산부인과의원 등이 대표작. service-center.kr/ @min.is.here

 

기사 전문은 <행복> 1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글 최혜경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