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예진 대표의 성북동 집. 경기도 고양, 평창동에 이은 세 번째 단독주택으로 이번에도 역시 ‘담백한 바탕’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군더더기를 좋아하지 않아요. 값비싼 작품이나 가구에도 큰 투자를 하지 않고요. 대신 ‘바탕’을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여요. 인테리어의 중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떤 공간에서 사람이 생기 있고, 아름답게 움직이려면 바닥과 벽면·천장 같은 집의 바탕이 담백하면서도 밀도 있게 나와야 해요. 담백한 게 핵심인데, 이게 쉽지 않아요 돈도 많이 듭니다.(웃음)
이 집에서 가장 많은 비용을 들인 부분이 바닥과 벽면 미장이에요. ‘아트 페인팅’이라고 하는데, 롤러나 붓으로 페인트를 칠한 다음 그 위에 다시 한번 손으로 일일이 미장을 하는 거예요. 흙손이라고 하잖아요? 미장칼을 들고 모든 공간을 다시 칠하기 때문에 일반 페인팅보다 몇 배가 더 비싸요. 하지만 효과는 확실해요. 스웨이드 재질의 옷처럼 도톰한 질감이 만들어지거든요. 그 위에 빛이 비추면 칠을 할 때의 움직임이 보이면서 리드미컬한 율동감이 느껴지고요. 이런 질감은 한두 번 롤러로 쓱쓱 칠하거나 스프레이로 뿌려서는 절대 만들지 못해요. 적은 시간으로는 흡족하지 않은 결과밖에 안 나와요.”
거실에서 포즈를 취한 백예진 대표. 톤온톤으로 색을 맞춘 벽면과 바닥, 최소한의 장식으로 완성한 유럽의 어느 리조트처럼 미니멀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옷걸이이자 설치미술 역할을 하는 ‘초록 선인장’과 벽면 절개선까지 맞춤 제작한 벽면 끝의 가습기가 포인트.
시원하고 단정한 분위기의 주방 전경. 대리석 문양의 큰 세라믹 몸체에 수납장과 인덕션, 후드 일체를 맞춤하듯 짜 넣어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다.
그녀가 말하는 바탕에는 집의 구조도 포함된다. 집의 형태와 골격을 완성하는 일, 개인적으로는 이 과정에서 인테리어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본다. 인테리어란 묻힐 뻔한 공간을 찾아주는 일이기도 한데, 구조에 대한 감각과 열정이 없으면 사장되는 공간도 많을 수밖에 없다.
“구조변경이 엄청 많았어요. 보조 주방과 그곳에 있던 벽을 터서 주방을 시원하게 만들었고, 낮은 천장을 높이면서 격자로 보를 쌓아 올렸어요. 이렇게 하면 공간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이거든요. 공사를 하면서 만난 보물도 많아요. 안방 공사를 하면서 천장을 헐었는데 보가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지금 봐도 근사한 설치미술 같아요.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은 철거하고 3층 복도 쪽에서 올라가게 했어요. 그래야 정원도 더 넓게 쓰고 집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재미도 있을 것 같았거든요. 비 오는 날에도 옥상에 올라가 있으면 좋은데, 저 멀리 남산도 보여요.”
천장을 가로지르는 큼직한 보가 멋스러운 침실. 침대 뒤편에는 작은 테이블과 의자를 둬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바로바로 시각화할 수 있도록 했다.
내가 만난 최고의 아이디어는 2층에서 지하 1층까지 수직으로 연결되는 ‘빨래관’. “복층 이상의 집에 살다 보면 빨래를 옮기는 게 늘 골칫거리예요. 저희 집에 꼬마들까지 해서 남자가 셋인데, 남자들은 절대 벗은 옷을 제자리에 안 갖다 놓더라고요.(웃음) 매번 수거하듯 챙겨 세탁기가 있는 곳으로 옮기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시공팀에 빨래관은 꼭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세탁실이 있는 지하 1층에서 드레스룸이 있는 2층까지 천장을 뚫고 관을 삽입해야 하니 반대를 많이 했는데, 끝내 관철시켰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녀의 시연. 수건 한 장을 집어 들어 관 속으로 슝 던졌는데 내가 다 후련하고 짜릿한! 한걸음에 계단을 달려 내려가 빨래가 잘 도착했나 확인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아트 오브제 같은 계단과 난간. 계단 옆의 철판까지 비슷한 계열의 색으로 맞췄다.
이토록 과감한 구조를 적용할 수 있는 건 그녀가 건축구조와 공법에 밝기 때문이다. 인터뷰 중 가장 재미있던 부분인데,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에 경기도 고양에 지은 첫 번째 단독주택이 있다. 아파트에 살다 생애 처음으로 2층짜리 단독주택을 지은 그녀는 설계를 직접 했다. 맞다. 직접 도면을 그렸다는 얘기다. “제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이다 보니 남편이 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직접 해보라는 거예요. 남편 직업이 항만 및 해안기술사거든요. 본인이 구조설계를 도와줄 테니 한번 해보라는 거죠. ‘여보, 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야. 내가 어떻게 해’ 하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또 진척이 되더라고요. 다시 생각해도 신기합니다.(웃음) 아무것도 모르던 때라 할 수 있던 것 같아요.”
수영장 쪽에서 바라본 다이닝룸. 왼쪽 창문을 열면 수영장으로 이어지는 덱으로 곧장 나갈 수 있다.
왼쪽 거실과 주방 사이에 둔 오픈 세면대. 굳이 화장실까지 가지 않고도 편히 손을 씻을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돋보인다. 오른쪽 공간 곳곳에 만들어놓은 작은 빛의 조각들. 은은하고 차분한 톤의 벽면과도 잘 어우러진다.
그때의 경험은 ‘건축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했고, 결국 사업 12년 차에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마쳤다.
“자연은 언제나, 진짜로 좋아요”
다시 성북동 집으로 이야기의 축을 옮겨와볼까? 이 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공간이 두 곳 있는데 첫 번째가 수영장이다. 한국처럼 여름과 겨울의 온도차가 50℃까지 나는 곳에서는 관리하기 쉽지 않아 야외 수영장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는 가급적 꼭 수영장을 만들자는 쪽이고 이번에도 주방 옆 삼각형 땅에 작은 수영장을 설계해 넣었다. 주방 옆, 주차장 위로 덱을 깔아 수영장 진입도 더 쉽게 하고.
왼쪽 내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만나는 옥상 덱. 아름다운 주택가와 저 멀리 남산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뻥 뚫린다. 오른쪽 정원 한쪽에 있던 삼각형 땅을 야외 수영장으로 만들었다. 수영장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여름을 사랑할 수 있게 해줘 가급적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욕실, 지하 1층의 거의 모든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 ‘목욕하기 좋은 집’으로 기사 제목을 뽑아도 될 정도였다. 계단에서 내려오면 라운지체어가 있고, 거기서 한 발 더 들어가면 크고 동그란 욕조가 주인공처럼 자리 잡고 있는 구조. 욕조 주변으로도 자연광이 일렁이는데, 마당의 덱 한쪽을 유리로 마감하고 그곳을 통해 빛을 끌어들인 덕분. 욕조 맞은편에는 핀란드식 목재 건식 사우나와 샤워실을 마련했다. “예전에는 사우나룸을 크게 만들었는데, 공간이 넓으면 공기를 데우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고요. 여기 제너레이터의 전원 버튼만 누르면 스팀으로 내부가 금세 꽉 차요. 편백나무 향도 은은하니 좋고요. 오랫동안 욕실에 진심이었어요. 가족과 스킨십을 하면서 목욕하는 걸 좋아하고, 제게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장 많이 안겨주는 곳도 욕실이라고 생각해요. 이게 좋은 게 아이들에게도 뭔가 화가 나 있는 것 같으면 목욕부터 하라고 말해요. 그렇게 욕실에 들어갔다 오면 표정부터 달라져요. 한풀 꺾인 느낌이랄까요.(웃음) 평창동 단독주택에 살 때도 욕실에 큰 창이 있었는데, 그곳으로 보는 계절의 변화가 참 좋았어요. 느긋해지고 편안해지는 곳. 기꺼이 큰 면적을 할애할 만하다고 생각해요.”
지하에 마련한 욕실. 자연을 깊이 끌어 들이는 그녀의 인테리어 원칙대로 구석구석 ‘초록’과 자연광을 들였다. 핀란드식 건식 사우나와 샤워실도 나란히 배치했다.
욕조 옆 작은 공간. 마당의 덱 한쪽을 유리로 마감해 빛이 들어오도록 했다.
나는 인테리어 옹호론자다. 인테리어란 더 적극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한 결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도 관심이 많고 그들의 철학과 전략을 유심히 보는데, ‘백예진표 인테리어’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담백한 바탕을 만드는 것과 더불어 자연에 가장 많은 지분을 준다는 것이었다. 가급적 창을 많이 내고, 지하에도 어떻게든 빛을 끌어들이고, 수영장과 정원 및 옥상에서도 계절 감각을 누리게 하는. 젊어서는 일상이 치열해 자연이 좋은 것도 모른다는데, 이미 20대 후반에 정원 딸린 단독주택을 지을 만큼 자연과 깊이 연결된 뿌리가 궁금했다.
널찍한 마당이 딸린 빨간 벽돌집과 아이들에게도 평생의 추억이 될 ‘마당의 시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시골에서 살았어요. 아버지가 동물병원을 운영하셨는데, 농장을 만들어 동물과 함께 사는 게 꿈이어서 다 같이 파주로 이사를 했어요. 엄마가 그 꿈을 들어준 거죠. 저도 그곳에서 보낸 시절이 좋았어요. 어린이날 박스에 담긴 강아지를 선물로 받고, 오두막에서 강아지에게 우유도 먹이고, 냇가에 도시락을 싸 갖고 다니며 물고기도 잡았어요. 새벽 5시쯤 부스스 깨 창문을 열면 뻐꾸기 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밖으로는 안개가 자욱하고. 창을 인테리어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창 너머에 더 좋은 것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꼭 크고 멋진 창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달항아리에 산수유 가지만 꽂아도 금방 아름다운 풍경이 만들어지잖아요. 컵에 계절 꽃 몇 송이만 꽂아도 공간에 생기가 돌고요. 생각만큼 어렵지 않은 것도 많은 게 또 인테리어 같아요. 그런데 바탕과 구조는 기본 개념과 경험이 없으면 쉽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요. 인테리어를 통해 담백한 바탕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행복이 가득한 집에 더 가까워질 것 같습니다.”
― 기사 전문은 <행복>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