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주 디자이너의 선택과 집중이 빛을 발한 거실. 오른쪽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면의 창은 문과 벽을 설치해 적절히 막았다. 왼쪽 소파는 리빙디바니의 엑스트라소프트, 오른쪽 테이블은 폴트로나 프라우의볼레로 레이블Bolero Ravel, 테이블 위 조명은 보치의 28 시리즈.
올해로 3회 차를 맞은 프리즈 서울, 키아프와 함께 크고 작은 전시가 이어지며 도시 전역이 아트로 물결치는 9월. 예술 작품이 점점 더 우리 일상에 가까워지면서 이제 작품은 갤러리에서 잠깐 조우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나 일터에서 나에게 위로와 기쁨을 건네는 존재가 되어간다. 지금처럼 아트가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기 오래전부터 디자이너 정은주는 작품을 재료 삼아 집을 고쳐왔다. 가구와 자재, 아트 작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공간을 완성하는 디자이너이자 유튜브 ‘정은주 리빙TV’를 운영하며 그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는 리빙 인플루언서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쌓아온 내공은 네 가족이 사는 280㎡의 아파트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복도에서 바라본 아이들 공간. 전실 너머로 침실과 놀이방이 자리한다.
클라이언트가 이번 프로젝트를 의뢰하며 요청한 것은 ‘아이들이 편안하게 지내는 집’. 부부는 어린아이들에게 초점을 맞추면서도 가족의 분위기가 드러나는 집을 원했다. 정은주 디자이너는 요구에 맞춰 따스하고 밝으면서도 너무 튀지 않는 무드를 기조로 삼고 디자인을 펼쳐나갔다.
완성된 집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요소는 영역의 분리다. 현관에 들어서면 녹음이 펼쳐진 거실 통창까지 탁 트인 복도가 나타나는데, 이곳을 기준으로 왼쪽은 아이들 공간, 오른쪽은 부부의 공간, 가장 끝에는 거실과 주방이 있는 공용 공간으로 세 개 존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아이들 존은 두 아이의 침실과 놀이방·욕실이 있고, 부부 공간은 마스터 베드룸과 드레스룸·욕실로 나뉘어요. 그리고 이 두 곳에는 버퍼처럼 전실을 두었습니다. 복도에서 슬라이딩 도어로 한 차례 분리하고, 전이 공간을 지나 각각의 방이 나타나는 방식인 거죠.” 전실은 한옥의 대청마루처럼 중간 영역 역할을 하며 두 개 존의 프라이버시를 확보한다. 경계를 정확히 구분한 덕분에 그 공간만 색다른 분위기로 바꿔볼 수도 있고, 부족한 수납도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인테리어 아이디어인 셈.
왼쪽 오두막 같은 분위기를 내기 위해 천장 일부를 박공 모양으로 마감한 아이들 놀이방. 정면에 보이는 정수영 작가의 그림은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골랐다. 오른쪽 한쪽 벽면에 거울을 설치한 덕분에 통창에서 보이는 자연 풍경이 거실 안쪽까지 깊이 스며든다. 왼쪽 벽에 걸린 줄리언 오피의 작품이 복도에 위트를 더한다.
“집을 디자인할 때는 균형과 리듬이 가장 중요해요. 어떤 공간은 힘을 빼고 받쳐주는 느낌으로, 또 어떤 공간은 강하게 힘을 주는 식으로 강약을 줘야 전체 흐름이 만들어집니다.” 거실 두 면에 있던 창 중 한쪽을 과감하게 포기한 것도 그 방법 중 하나. 정면 창은 녹음이 우거진 뷰가 아름다운 반면, 다른 한쪽은 폭이 좁고 건너편 아파트만 보여 적절히 가리는 것이 더 나아 보였다고. “창을 막는다고 하면 대개 부담스러워하지만,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제안했어요. 안쪽에 벽과 문을 시공해 창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액자 속 장면처럼 느껴지도록 했죠. 대신 넓은 통창의 맞은편 벽면에는 거울을 넓게 설치해 바깥의 자연이 거실 안쪽까지 한 번 더 스며듭니다. 결과적으로는 공간이 더 단정해지고 또렷해졌어요.”
음하영 작가의 그림과 대리석 테이블로 차분하게 연출한 다이닝룸.
아이들 공간도 마찬가지다. 침실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없을 정도로만 정리하고, 놀이방과 욕실에 힘을 쏟았다. 놀이방은 오두막 같은 느낌을 주고 싶다는 부부의 요청에 맞춰 한쪽 천장을 박공지붕처럼 계획한 다음 바닥부터 벽과 천장까지 같은 색감의 목재로 마감했고, 전실은 아이 방과 욕실 입구까지 아치 형태로 디자인해 유럽의 오래된 회랑을 거니는 듯한 분위기를 냈다. 빨강, 파랑 등 색감으로 포인트를 준 아이들 욕실은 유튜브에서 이곳을 소개했을 때 가장 반응이 좋던 곳. 세면대를 설치한 벽면은 푸른 격자무늬가 경쾌함을 자아내는 무티나의 프린지Fringe 타일로 마감하고, 두 아이의 키에 맞춰 정유빈 작가의 마그리트 미러Magritte Mirror를 달았다. 아이가 자라면 거울을 위로 하나씩 추가할 수 있게 한 것에서 공간을 재미있게 누렸으면 하는 디자이너의 다정한 배려가 느껴진다.
아이들 공간의 전실. 아치형 입구가 도열한 모습이 마치 유럽의 어느 회랑처럼 느껴진다. 왼쪽에 마이큐 작가의 그림을 걸어 컬러풀한 무드를 살렸다.
마지막으로 집의 화룡점정은 아이들에게 따뜻한 공간이 되길 바라며 그가 하나하나 직접 고르고 배치한 작품이다. “집에 들이는 작품은 그 자체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공간에 어우러지면서 힘을 줄 수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이곳도 공간을 디자인할 때와 마찬가지로 상쾌한 느낌을 주되 가볍지 않은 분위기, 밝으면서 채도가 낮은 색감으로 골랐어요. 가구와 조명도 조각품 같은 존재이기에 적절히 거리감을 두어 배치했고요.” 복도에는 남녀 두 명이 걸어가는 줄리언 오피의 작품이 경쾌함을 더하고, 브라운과 핑크빛이 어우러진 음하영 작가의 작품은 다이닝룸에 차분한 분위기를 불어넣는다. 이 밖에도 아이들 공간의 전실에는 마이큐 작가의 작품이 화사하고 발랄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에는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를 위해 고른 정수영 작가의 작품 ‘다이너소어 앤 버블스’와 음하영 작가의 동화적 상상력이 담긴 작품 ‘듀이DUI’를 설치해 아이가 그림과 더불어 꿈꾸고 상상할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욕실에는 아이들 키에 맞춰 정유빈 작가의 거울을 달았다. 아이가 자라면 위에 추가로 설치할 수도 있다.
정은주 디자이너는 이번 프로젝트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 “클라이언트가 가져온 무수한 레퍼런스 사이에서 방향을 좁혀나가고, 가구 하나에도 수많은 아이템을 검토하며 촘촘하게 맞춰낸 끝에 마침내 하나의 분위기로 수렴하는 데 성공한 현장이었다”는 말을 남겼다. 그 치열한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던 것은 가족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담아내는 안온한 집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주인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에요. 제 취향을 내세우기보다는 이곳에서 어떤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지 듣고 그것이 잘 묶이도록 합니다. 가족과 집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거죠. 그렇게 고친 집에서 가족이 지내며 들려주는 피드백이 이 일의 가장 큰 기쁨이자 동기예요. 이제 이곳 또한 제 역할은 끝나고 가족이 잘 살아갈 일만 남았습니다. 가족에 맞춰 재탄생한 집에서 다정한 일상을 보내고, 새로운 일을 도모해보기도 하며 집도 가족도 다채롭게 자라나기를 바라요.”
부부 공간의 전실 너머에 자리한 안방. 왼쪽에 노이진 작가의 그림을 걸었다.
디자이너 정은주는 e-DESIGN interior that works 대표이자 리빙 인플루언서로, 다수의 하이엔드 주거 공간을 작업했다. 클라이언트의 분위기와 취향을 담은 공간을 디자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유튜브와 SNS 채널을 통해 수많은 팔로워와 소통하며 국내외 인테리어 트렌드 및 디자인에 관한 정보를 전하고 있다. youtube.com/@interior_living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