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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최진석의 정원 미문未文에 대하여
전남 함평의 고향집 터에 작은 집을 짓고, 기본학교를 세운최진석 교수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텃밭을 정원으로 승화시켰다. 원시의 기억이 현재화되는 공간이자, 생명의 본질을 깨우쳐주는 장소로, 정원 ‘미문’에 서면 이야기가 하나의 책처럼 다가온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텃밭은 정원으로 승화되어 여전히 그와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과나무ㆍ 고로쇠나무ㆍ엄나무ㆍ석류나무ㆍ가시오가피나무ㆍ 호랑가시나무ㆍ홍매나무ㆍ목단나무 등 정원의 중심 구조 식물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손수 심고 가꾸신 것으로, 텃밭이었던 시절부터 이곳에 자리해 있는 미문의 뿌리이자 뼈대이다. 그의 부모님이야말로 미문의 원작자인 것. 여기에 황지해 정원 디자이너가 편집자로 나서 주로 한국 수종의 꽃과 나무를 더해 녹색의 띠가 마을 뒷산인 고삼봉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텃밭과 정원은 다르다
내가 정원을 ‘정원’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실은 정원이 제국을 운영해봤거나 적어도 꿈꿔본 적이 있는 나라에서라야 문화의 중심 줄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자유ㆍ주체ㆍ독립ㆍ창의 등의 힘보다는 종속적 상황에 갇혀 사는 나라에도 정원이 없진 않지만, 그것이 누구나 맘만 먹으면 하게 되는 문화의 일반성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다. 문화의 일반성으로 드러난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매개로서의 그것을 비교적 어색하지 않게 대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활화라고 하자. 이때는 누구나 여건이 되기만 하면 정원을 가지고 싶어 한다. 이것은 삶의 의미에 눈뜰 때면, 누구나 시인을 꿈꾸는 바로 그 마음에 가깝다. 비 오는 날, 빗방울 소리가 리듬을 꾸리면서도 하나하나 따로 들릴 때 피아노 건반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드는 것과도 비슷하다. 정원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예술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긴 모과나무가 그대로 자라고 있는 정원 미문은 한국적 정서와 생태의 현장감, 계절감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
숨은 그림같이 곳곳에 자리한 최진석 교수의 손 환조.
“만약 당신이 정원과 서재를 가지고 있다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진 격이다”라는 키케로의 말은 아무리 깊이 새겨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책과 예술에는 원래 인간과 삶을 승화하는 힘이 있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가파른 길을 걷고 싶은 야망을 품고도 어찌 책과 예술을 생활화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걷기, 대화, 냄새, 소리, 온도, 비, 눈, 햇볕, 그늘 등과 같이 생활을 직조하는 물리적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는 예술은 정원이 유일하다.
우리나라 이곳저곳에서 정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사유의 시선을 높여 대한민국의 일대 도약을 시도해야 하는 지금의 시점에서는 의미가 매우 크다. 승화나 도약과 정원은 어떻게 가족 유사성을 보이는가? 예술적 승화는 생활화로 증명되지만, 생활은 예술이 아니라는 이상한 모순이 있다. 생활이 예술이 되려면 눈을 꼭 감고 생활과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텃밭은 생활이지만, 정원은 예술이다. 텃밭만을 가꾸는 생활인이 자신의 생활을 위로 높이려면 텃밭에 담긴 발을 빼서 정원 쪽으로 한 발짝이나마 옮기는 수밖에 없다. 생활과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서 생활을 설명할 수는 없다. 자신의 생활을 자신에게 설명하지 못하면 생활의 승화는 없다.

텃밭에는 먹을 것을 심지만, 정원에는 못 먹을 것을 심는다. 텃밭은 생산성을 따지지만, 정원은 아름다움을 따진다. 욕구로는 식욕과 성욕 등 생존에 필요한 것을 원한다. 자부심, 독립, 자유 등 생존에 직접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원하는 것은 욕망이다. 텃밭은 욕구의 장소고, 정원은 욕망의 장소다. 텃밭은 감각과 본능의 공간이고, 정원은 지적 공간이다. 이상하게도 인간은 생존에 직접 필요하지 않은 것을 원하고, 또 그것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심한 불안에 휩싸이면서 더 인간답게 생존한다. 참 이상한 짐승이다. 굶어 죽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유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고 하는 이상한 짐승이다. 자유를 목숨과 맞바꾸려 하는데도 이상하지 않은가.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다”라는 헤르만 헤세의 말을 믿는다면, 텃밭 주인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정원을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아침 정원에서 들을 새소리가 그리워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쓴 최진석 교수는 사유의 시선을 탁월하게 이끌어가는 이 시대의 철학자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철학을 오래 가르쳤으며, <인문학 특강> <지식 콘서트> 등을 통해 대중과도 꽤 친숙하다. ‘깨어 있는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답게 이력도 남다르다.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 후보의 상임선거대책위원장으로도 일했고, “시대의 반역자가 되어라”를 외치며 가르침을 주는 학교 ‘건명원’의 초대 원장으로도 있었다. 몇 해 전 함평 고향집 옆에 홀연 내려와 ‘새말새몸짓 기본학교’를 세우더니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기본 태도와 자질을 가르치며, 사는 것처럼 살고 싶은 이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최근엔 환경 미술가이자 정원 디자이너인 황지해 작가에게 부탁해 부모님의 텃밭을 정원으로 일구었다.


나의 정원으로부터
유치환은 시 ‘생명의 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라고 노래하며, 인간 생명의 본질을 깨우쳐준다. 생명의 모든 표정에 물을 대는 뿌리인 ‘원시의 본연한 자태’. 문명 세계는 다 문자로 설명된다. 아니다. 차라리 문명 세계는 다 문자로 구성된다고 말해야 옳다. 잘 훈련된 지성이라면 문자가 문명이고, 문명이 문자임을 모를 리 없다. 세계가 곧 문장인 것이다. 문명의 화려한 표정은 다 문자 이전의 소박한 어떤 것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원시의 본연한 자태’는 문명의 단전이다. ‘아직 문장이 아닌’ 미문未文이 문장(文)의 뿌리인 것이다.


정원 한가운데 자리한 바위 형상물은 나비 날개 같기도 하고 펼쳐진 책 같기도 하다. 나비로 유명한 함평답게 생태계를 살리는 정원으로, 본질을 찾아가는 배움의 장소이기도 한 이곳을 상징하는 듯하다.

아버지가 지은 창고인 만복고는 작은 세미나실이자 보관 장소이기도 한데, 중앙에 우뚝 자리한 고로쇠나무에는 수액을 채취한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야수의 눈빛을 품지 않은 사람의 세련미는 힘도 없고 매력도 없다. 야수의 눈빛은 세련된 매력의 근본이다. 야만의 깃털이 몇 가닥이라도 섞인 문명이라야 힘차게 난다. 야만이 문명의 탯줄이다. 원시적 궁금증이 과학의 뿌리다. 늑대처럼 고독할 줄 알아야 건강한 대중이 될 수 있다. 원시적 기본 없이 어찌 탁월함이 피어나겠는가. 다 미문이 짱짱해야 문의 향기를 잘 피울 수 있는 이치다.

내 생물학적 원시의 본연한 자태는 부모님에게서 왔다. 나는 부모님과 맺어진 원시적 연결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비로소 잘 살 수 있음을 안다. 미문에 서면, 나는 부모님이 남겨주신 텃밭을 정원으로 승화시켰다는 겸손한 자부심을 느낀다. 나의 발전을 숨죽여 기다려주신 부모님께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크게 부풀어 오르는 것이다. 나의 미문인 나의 어머니와 나의 아버지.

미문은 부모님이 남겨주신 큰 나무들을 존중해 그것들을 서 있는 그대로 중심 골격으로 삼고, 그 사이사이에 작은 나무와 풀과 꽃들과 바람과 새들과 별들을 초대했다. 나는 어려서 몸이 약했다. 어머니는 엄나무를 넣어서 닭을 고아주셨다. 한 달에 한 마리 정도 먹은 거 같은데, 외삼촌이 산에 가서 엄나무를 해 오셨다. 어머니는 당신의 오빠에게 자주 부탁하는 것이 미안하셨는지 ‘텃밭 미문’에 엄나무 한 그루를 심으셨다. 나 어릴 때처럼 삐쩍 마르게 큰 엄나무는 어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동아줄처럼 서 있다. 그 아래에는 치자나무를 심었다. 주먹에 멍들어 오면 어머니는 치자 열매를 밀가루에 개어 멍 위에 붙여주셨다. 멍 자국을 어루만지시다가 갑자기 내 등짝을 내려치시던 어머니의 손바닥은 치자나무 잎사귀가 되었다. 하늘의 북두칠성은 아버지가 심으신 가시오갈피 씨가 되어 미문에 제멋대로 내려앉았다. 날이 좋은 날 밤에는 국자 모양을 제대로 갖추고 남몰래 하늘로 오른다. 비가 오는 날이나 구름이 두꺼운 날은 오갈피씨 모양으로 그냥 미문에서 쉰다. 그러고 보면 ‘아직 드러나지 않는 것’인 미문은 드러나는 모든 것, 즉 문명의 씨이기도 하다.


아홉 살 때부터 살던 집 자리에 자리 잡은 안채 ‘만허당’ 및 기본학교의 교육장 ‘호접몽가(나비꿈집)’와 함께 정원 ‘미문’은 그의 본질 찾기가 이루어지고 생각의 틀이 만들어지는 현장이다. 이곳에서 그는 또 어떤 사유를 이어갈 것인가?

‘원시의 본연한 자태’의 기초는 음기와 양기를 교차로 짜놓은 모습이다. 여자와 남자이고, 물과 불이다. 생명이 웅크리고 있는 북쪽에 물을 두고, 해 뜨는 동쪽에 불을 두었다. 누구나 미문에 들면, 모든 드러나는 것의 기초 위에 서 있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물을 따라 세상에 혜택을 주는 사명감을 얻을 것이고, 동쪽에서 타오르는 장작불 불씨를 타고 올라 자신이 별로 승화되는 황홀경도 맛볼 것이다. 특히 기본학교 학생들은 물과 불 사이에서 지적인 탄성을 되살려,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존재인지 또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를 느낄 것이다. 미문에 들면 들린다. “니가 별이다!”


부모님이 심은 석류나무 주변으로 노랑꽃창포, 한라백당 등 토종 꽃과 야생화가 어우러져 있다.

인근 하천의 돌을 쌓아 만든 담에 자리한 토종 찔레장미. 미문에는 생태계의 보고인 돌과 바위도 흔하다.

여름철에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 꽃 자주꽃방망이. 꽃잎이 줄기 끝에 방망이처럼 모여서 피어 붙은 이름이다.

이파리 아래에서 수줍게 배시시 웃는 새색시 같은 토종 함박꽃나무의 꽃송이. 산목련으로도 불린다.

윤경식 건축가가 지어 ‘세계건축상’을 수상한 호접몽가 앞에 자리한 기본학교의 당당한 표지석과 팥배나무.

조롱조롱 매달린 꽃망울이 하늘의 별을 닮아 우주나무로도 불리는 향토 수종의 때죽나무.
정원의 편집자 격인 황지해 정원 디자이너는 세계 최대의 정원 박람회 ‘첼시 플라워 쇼’에서 수차례 최고상을 거머쥔 바 있다. ‘최진석’이라는 거목의 시작점인 미문에 토종의 꽃과 나무를 함께 구성하고자 애썼다.



황지해 정원 디자이너
자연과 마을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정원

정원 미문은 최진석 교수의 부모님에게서 시작한다. 정원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본다면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원작자인 셈. 의미를 존중하며 재해석해 보기 좋게 편집해준 작가는 환경 미술가이기도 한 황지해 정원 디자이너로, 그는 이곳의 화두를 ‘원시성’ 한 단어로 정의한다.

“본질 찾기는 언제나 중심이 되는 시작점이에요. 모든 식물은 원시로 돌아가고자 하는 관성을 지니고 있거든요. 정원 디자이너로서 그 관성을 디자인한달까요. 저만의 드로잉이라고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무심한 터치를 좋아해요. 교수님 댁에 새의 분뇨에서 발화해 우연히 자리 잡은 호랑가시나무처럼요. 그래서 이곳 미문도 본연의 것을 존중하면서 컬러와 향기, 계절만 살포시 끄집어내는 터치를 가미했어요. 부모님과의 스토리도 곳곳에 풀어냈고요. 그것이야말로 교수님의 원시성이니까요.” 이를테면 학교 선생님이던 아버지가 목에 좋은 모과나무와 고로쇠나무 등을 심고 가꾸면서 건강을 관리한 것이 본연의 것이라면, 약골이던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마음이 담긴 치자나무나 황칠나무는 그가 재현해낸 스토리이고, 계절감이 드러나는 토종 꽃과 야생화 등은 그의 의도가 담긴 터치인 것이다. 덕분에 마을의 중심부에 자리한 정원은 향수병이 되어 벌과 나비, 새 등을 불러들인다.

“정원의 꽃과 나무는 그저 보기에만 좋으라고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생태계의 이동 경로에서는 식물이 지도이자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거든요. 뒤에 보이는 고삼봉은 언덕이 낮으면서 평온한 느낌을 주는데, 저 산을 차경으로 들이고자 녹음의 띠를 연결하고 벌ㆍ나비ㆍ새들을 불러들이는 게 최초의 목적이었어요. 고삼봉이 내려와서 정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면 돼요. 생태계를 살리는 정원을 가꾸며 자연이 하는 일에 동참하는 거죠.”

글 최진석 | 사진 박찬우 | 진행 신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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