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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옥 시간이 깃든 한옥, 난호재
진료복 브랜드 호퍼의 쇼룸 겸 사무실이자 장승은 대표와 정가영 이사의 아지트이기도 한 서촌의 작은 한옥 난호재. 이번 행복작당 서촌을 통해 공개될 난호재 안에는 1930년대 지어질 당시 본연의 모습과 지나온 세월의 흔적, 그리고 두 사람이 가미한 모던한 감각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본채의 쇼룸에 모인 장승은 대표와 정가영 이사. 이곳의 바닥에 1970~1980년대 제작된 마당의 것과 동일한 붉은 모자이크 타일이 묻혀 있었다.
문간을 비롯해 집 곳곳에 외벽의 타일 무늬를 본떠 만든 창을 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것은 레인체인과 배롱나무 그리고 누마루방.
서촌 옥인동 작은 골목 안, 타일로 문양을 내 마감한 외벽이 시선을 사로잡는 한옥 한 채가 있다. 바로 6월 초에 열리는 행복작당 서촌에서 오뚜기×에싸의 협업 전시가 펼쳐질 ‘난호재暖好齋’다. ‘'따뜻하고 좋은 기운이 머무는 집'이란 당호의 뜻처럼 외관부터 어쩐지 양명한 기운이 느껴지는 이 집은 어느 가족의 아늑한 보금자리일까, 아니면 미감이 뛰어난 누군가의 세컨드 하우스일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 정체는 치과 개원의인 장승은 대표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지인 정가영 이사와 합심해 만든 스타일과 기능성을 모두 잡은 진료복 브랜드 ‘호퍼Hopper’의 쇼룸 겸 사무실이다.

쇼룸 겸 사무실을 한옥에 마련한 점도 독특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이들이 이 한옥을 구할 때만 해도 브랜드에 대한 청사진이 없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쇼룸을 구해서 대체 어떤 브랜드를 전개할 거냐고 주변에서 많이 물었어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답했죠. ‘나도 몰라’.(웃음) 남들은 굳이 왜 일을 벌이냐고 말하지만 저와 정가영 이사 모두 새로운 일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이 생기면 오히려 엔도르핀이 돌아요. 성향이 비슷한 둘이 오랜 논의 끝에 론칭한 브랜드가 바로 호퍼죠.”


서재에서 바라본 사무 공간. 들어열개문으로 시야를 조절할 수 있다. 중앙의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핀율, 벽의 액자는 2022년 행복작당 북촌 힐로재에 걸렸던 박찬우 작가의 작품이다.

한옥의 로망인 콩기름 한지 장판으로 바닥을 마감한 서재. 정가영 이사가 집안에서 물려받은 와상을 두었다. 천장에는 구가도시건축이 특별히 설계한 다락이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처음부터 쇼룸으로 사용할 목적이 뚜렷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옥에 둥지를 튼 연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두 사람은 되레 처음부터 한옥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고 말한다. 집에 따로 한실을 둘 정도로 전통과 오리지낼리티의 가치를 중히 여기던 정가영 이사와 이에 못지않게 본연의 것이 지닌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장승은 대표에게 한옥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역사가 살아 있는 한옥의 원래 모습을 되살려 아름답게 고치는 과정이 얼마나 즐겁겠어요. 그렇게 완성된 예쁜 한옥에서 새로운 일들을 꾸려나가는 건 또 얼마나 재밌을 테고요.” 그렇기에 한옥을 보러 다닐 때 가장 중요하게 살핀 점 또한 원형이 얼마나 잘 살아 있느냐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며 이미 지붕이 다 삭아버렸을 정도로 훼손됐거나 혹은 현대적인 개보수 과정을 거치며 본질적인 요소가 사라진 한옥이 많았죠. 그러다 1930년대 지었는데도 대들보, 서까래, 벽면 등이 모두 온전히 살아 있는 난호재를 만나게 됐어요. 보자마자 마음에 쏙 들었죠. 외벽과 마당 바닥에 붙어 있는 1970~1980년대 제작한 타일도 정말 아름다웠고요. 이를 보니 ‘훼손되기 전에 우리가 이 집을 구원해야 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서야 안 것이지만 육송으로 지은 이 집은 14평 남짓한 작은 한옥에서는 보기 드문 오량 서까래, 부연(겹처마에서 처마 끝에 걸리는 방형 서까래) 등을 갖춘, 굉장히 정교하게 지어진 집이라고.

기본 틀은 마음에 쏙 들었으나 오직 거주에만 초점을 맞춰 억지로 방을 늘리고 대문 입구에 창고를 설치해 사용하던 난호재는 고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들과 마음이 맞는 건축가를 찾는 일이었다. “여러 건축사사무소와 미팅을 했는데, 그중 구가도시건축이 집의 역사를 온전히 살리고자 하는 저희의 마음을 100% 이해해주었죠.” 이렇게 연을 맺은 건축주와 건축가는 난호재 개보수 작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프로젝트를 중추적으로 이끈 구가도시건축의 차종호 부소장은 집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을 이렇게 소회했다. “건축주의 안내에 따라 난호재에 이르기까지 자연스레 서촌의 골목을 거닐게 되었어요. 제 또래라면 유년기에 보았을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죠. 낮게 드리운 경사 지붕의 건물, 페인트칠한 양철 대문과 미장으로 마감한 담장, 그 아래 옹기종기 모인 화분들. 골목을 지나 난호재에 이르러 대문을 열고 들어가니 은은한 햇살 아래 아늑하게 빛나는 마당이 저희를 반겼습니다. 동네와 집의 시간은 그렇게 차분하게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죠. 시간의 흐름이 계속 이어져 오늘에 이른 ‘삶의 형상’이 어떠해야 할지 작업하는 내내 고민하고 상상했어요.”


집을 선택한 요소 중 하나인 마당의 붉은 모자이크 타일. 문창살은 구가도시건축이 특별히 집에 맞춰 디자인했는데 오른쪽의 낡은 나무문은 기존의 것을 그대로 살렸다.
공간 분위기를 고려해 조각보 커튼을 단 주방 창.
서까래와 천장 사이에 낸 다락은 장승은 대표와 정가영 이사의 히든 아지트다.
차종호 부소장은 집의 평면 구성과 목구조 짜임을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랜 고민 끝에 장독대는 철거해 마당의 원래 모습을 살리기로 결정하고 문간의 창고는 보일러실로 바꿨다. 이때 크기를 조정해 진입 공간에 여유를 더하기도 했다. 이후 기존 공간 구성에서 사라진 부엌 자리의 입면을 복원해 이 집의 원형이 갖는 구축적 질서를 되찾았다. 장승은 대표의 말에 따르면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은 감동의 연속이었다고. “우리의 의도를 이해하고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이 모든 순간 느껴졌어요. 일례로 오래된 한옥은 보통 조금씩 기울어져 있어요. 개보수시 이를 다시 바로세워야 하는데 대부분은 보강용 기둥을 덧대는 정도죠. 하지만 구가도시건축은 지붕을 위로 띄워 대들보를 하나씩 다시 맞췄어요. 지붕을 다시 올릴 때에도 집이 숨 쉴 수 있도록 대나무와 석회를 이용한 전통 방식으로 마무리했죠.”

난호재는 ㄱ자형 본채와 문간채가 이어진 ㄷ자형 한옥이다. 본채에서 기존에 살던 이가 부엌으로 이용하던 공간은 높은 공간감을 살려 쇼룸으로 꾸미고 오른쪽으로는 조망을 고려해 누마루방을 두었다. 두 ㅡ자가 만나는 곳엔 서재를 두고 사무 공간은 서재와 이어지게 구성했다. 벽은 쇼룸과 욕실을 제외하고 모두 한지로 마감하고 바닥은 공간 특성에 따라 쇼룸은 타일, 서재는 콩기름 먹인 한지 장판, 사무 공간은 원목 마루로 변주를 주었다. “보통 한옥이라 하면 클래식한 가구를 들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죠.” 사무 공간에는 블랙 컬러의 핀율 뉘하운 다이닝 테이블과 리딩 체어를 두고 박찬우 작가의 ‘Engram’ 시리즈를 걸어 모던함을 더했다. 한편 서재에는 정가영 이사가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받은 약 1백50년의 세월이 깃든 와상을 두어 옛것과 현대적인 것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이렇게 난호재의 공간 대부분은 원형의 공간구성을 밑그림으로 필요에 따라 개조됐지만 아예 새롭게 생긴 공간도 있다. 바로 다락이다. “서재를 만들며 천장을 덧댔는데, 구가도시건축에서 먼저 천장과 서까래 사이에 다락을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냐며 제안해줬어요.” 현대적인 집에서의 다락과 달리 서까래의 유기적인 형태 덕분에 한층 더 아늑한 느낌이 드는 다락은 만화책도 읽고 가끔 술 한잔하기도 하는 둘의 비밀 아지트가 되었다.


쇼룸 옷걸이에 걸려 있는 호퍼의 제품. 말하지 않으면 진료복인 줄 모를 정도로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한다. 그 위로는 박찬우 작가의 ‘Stone’ 시리즈가 걸려 있다.
작은 한옥에서는 찾기 힘든 부연. 이것만 보아도 얼마나 정성스레 지은 집인지 짐작할 수 있다.
타일로 장식한 난호재 외벽에는 집이 지나온 시간이 깃들어 있다.
대부분의 건물 개보수 과정이 그렇듯 난호재를 고치는 과정도 여러 난관을 헤쳐나가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집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담벼락과 마당 바닥에 깔린 1970~1980년대 제작한 타일이었어요. 다만 오랜 시간이 지난 만큼 바닥 타일이 많이 손상돼 있었는데 이젠 구할 수도 없는 터라 난감한 상황이었죠.” 하지만 집에 담긴 세월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지키고자 한 두 사람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은 걸까. 쇼룸의 레벨 조정을 위해 바닥을 판 자리에서 묻혀 있던 붉은 모자이크 타일이 나타났다. “타일은 한때 한옥, 양옥, 근생 건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정도로 한 시대를 풍미한 자재예요. 이처럼 시대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재료는 장소의 서사를 말로만이 아닌, 직접 보고 만지며 느끼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합니다.” 차종호 부소장이 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난호재는 처음 짓던 당시 본연의 모습은 물론 지나온 세월과 오늘의 시간까지 모두 머금은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사무 공간에서 열심히 일하다 날이 좋으면 마당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꽃이 피면 동네 산책을 나가 향기를 온몸으로 흡수하는 등 일과 삶, 그리고 여유를 함께 누리는 장승은 대표와 정가영 이사. 보통의 사람들에게 사무실은 가장 가기 싫은 장소이지만 이들에게 난호재는 새로운 모험을 꿈꾸게 한 요람이자 매일매일 들르고 싶은 아지트다.


차종호 부소장은 경기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수학하고 2003년부터 건축가로 활약해왔다. 현재는 구가도시건축 부소장으로서 다양한 한옥과 현대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2014~2019년에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겸임 교수로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다. 참여한 주요 프로젝트로는 소안재, 진관사 역사관 및 템플스테이관, 소연재, 진관사 한문화체험관, 제주문학관, 달마사 중창 불사, 성불사 중창 불사 등이 있다. guga.co.kr

글 양혜연 기자 | 사진 이우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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