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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지 않고 만들어낸 집
완숙에 이른 스타일리스트가 자신을 위한 집을 만들었다. 리모델링으로 집요하게 완성한 이 곳에는 새로 지은 집이 흉내 낼 수 없는 시간과 대체 불가한 특별함이 담겨 있다.

스타일리스트 이정화의 양평 세컨드 하우스 침실로 향하는 짧은 복도가 시작되는 벽이자 계단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곳에는 건축가의 스케치 원화를 붙여두었다. 드로잉의 부드러운 컬러와 프레임 없이 가벼워 보이는 종이 느낌이 하얀색 벽과 잘 어울린다. 박공지붕이 만드는 사선과 돌출된 벽면은 리모델링이 만들어주는 의외의 장면으로 집에 조형미를 더해준다.
플랫폼을 통해 스스로 집을 소개하고 지구 반대편의 집까지 구석구석 볼 수 있는 시대다. 소유나 형태와 별개로 집에 살지 않는 사람은 없다. 방송은 소개를 넘어 집을 탐구하겠다고 하고, 시청자는 자연스레 집의 탐구자가 되었다. 집에 대한 취향과 기준은 상향되었다. 누구나 경험에 기초해 집에 대한 생각을 지니며 당연하다는 듯 한마디씩 말을 얹는다. 집을 다루는 것은 이제 녹록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탐구자라면, 이 집을 평범한 외관만으로 판단하고 눈여겨보지 않을 수 있다. 하얀색으로 도장 마감한 벽체와 이제는 흔한 벽돌색 아스팔트 싱글shingle 지붕이 있는 3층 주택에 불과하다. 그나마 배경을 이루는 숲이 이 집에 다른 맥락의 장소성을 더해준다. 하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이곳에는 어떤 최고치에 도달한 범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범상치 않은 것이 아니라 범상함에서의 경지다.

긴 시간 스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 그리고 여전히 현역으로 호텔을 비롯한 상업 공간과 셀러브리티의 집을 만들고 있는 이정화 이사가 양평에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한 것은 지난해 6월이다. 리모델링 공사에 4개월, 그에 앞서 디자인에 6개월의 시간을 들였다. 처음부터 리모델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신축을 위해 2년에 걸쳐 건축설계와 인허가 단계를 거쳤다. 그러니까, 시작은 4년 전이다.


조명은 모두 매입형 스포트라이트와 조광기로 해결했다. 남향인 데다 하얀색 도장의 마감 덕분에 실내에 들어오는 빛이 부드럽고 밝게 퍼진다. 중앙의 H빔 모서리와 매입 조명의 테두리를 둥글게 마감한 것, 그리고 커튼 박스 위쪽을 곡선으로 처리한 작은 디테일이 이 집의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핵심이 되었다. 스타일리스트가 공간을 다룰 때 드러나는 장점이다.

계단실 2층에는 창 대신 유리블록을 사용하고, 틈을 만들어 2층에서도 현관이 바로 보이도록 하는 등 열어야 할 곳과 닫아야 할 곳을 현명하게 선택했다.
“메타세쿼이아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어요. 30년간 자란 나무들이 마치 숲처럼 보였거든요. 새로 지을 생각이었으니 집 내부는 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나무를 중심으로 설계를 하고 보니 땅이 제한적이었지요. 원래 있던 집에서 외관만 모던해지는 정도라면 처음 이 집을 봤을 때 느낀 동유럽의 시골집 느낌을 살리는 게 맞겠다고 판단했어요.” 숲에 살고 싶다는 것은 그의 오랜 바람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자유를 갈망했지만, 가족과 일을 위해 내내 아파트와 도시 생활을 유지했다. 태국 치앙마이와 농카이의 마을에서, 그리고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경험하고 강원도 정선의 흙집을 오가며 생활해보기도 했다. 그 후 땅을 사고 집을 지을 계획을 세우던 중 지금의 집을 소개받았다. 드디어 ‘중간 지점’을 찾아낸 것이다.


“집은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는 것뿐만 아니라 만들어주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인테리어 분야에서 오랫동안 공간을 정돈하고 새롭게 만드는 일을 해오면서 제가 그런 데에서 오히려 자유로운 삶을 원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진 공간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정리되고 조화로운 공간을 만들려고 애를 쓴 것이죠. 자연에는 오히려 질서가 존재하고 제가 개입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비로소 자유롭다고 느꼈어요” 땅의 형태를 살리고 긴 시간에 걸쳐 매만진 느낌이 드는 편안함을 살리는 집을 원했다. 1층과 2층의 메타세쿼이아를 볼 수 있는 위치에 침실과 욕실 그리고 서재를 만들었다. 한쪽으로 몰려 있던 주방은 중앙으로 배치해서 맞은편에 멀리 있는 산의 풍광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를 위해 정원수의 위치와 높이도 조정했다. 주방과 식탁에서 고개를 돌리면 (욕실 창을 통해) 메타세쿼이아를 볼 수 있도록 식탁 위치 또한 조정했다.


붙박이 냉장고, 수납장과 나란히 배치한 팬트리 문을 열면 살림 용품들이 천장까지 차곡히 수납돼 있다. 어둑해 보일 수 있는 곳이지만 시선이 가장 많이 가는 위치에, 글로시한 스테인리스 소재의 가전을 놓은 것이 포인트.

H빔을 우아하게 처리한 센스가 단연 돋보인다. 달과 새를 콘셉트로 대리석 소재의 구형 벽 조명과 도어 스토퍼를 올려 놓았는데, 선반을 설치해서 새 모형을 올린 것이 아니라 하이그로시 판재를 ㄱ자 형태로 길게 제작해서 끼워 넣은 것이 핵심이다.
인테리어의 마감에 사용하는 소재는 가짓수를 한두 개로 제한하고 단순하게 정리했다. 에지가 도드라져 보이거나 각진 모서리 등 심리적 불안 요소가 되는 부분은 최대한 없앴다. 공간 전체는 화이트를 베이스로 하되 블랙과 브라운 컬러를 군데군데 배치했다. 화이트는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고 빛의 변화에 따라 깊이가 있는 다양한 톤을 지니도록 신중하고 사려 깊게 조색했다. 이정화 이사에게는 흰색조차도 명료하게 구별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문은 가급적 포켓 도어를 사용했다. 기밀성이 떨어지는 단점을 감수하고 공간의 순환과 유기성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공간 안에 노출돼 보이는 선을 통일해서 면을 정리하고 시각적인 걸림돌을 줄이기 위해 고심했다. 덕분에 형태와 비례가 소박하고 단순한 공간이 됐지만 그만큼 다양한 형태의 가구와 컬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바탕을 갖추게 됐다. “구조가 정해진 공간을 역으로 디자인을 통해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건축이 아닌 리모델링을 한 덕분이에요. 70%는 처음부터 의도한 디자인이지만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30%에서 이 집의 매력을 더욱 살릴 수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요.”


‘불 맛’을 포기할 수 없어서 열을 사용하는 인덕션과 불을 사용하는 가스레인지를 함께 설치했다.

작은 2층 화장실에도 유리블록을 이용해 채광하도록 했는데, 벽 두께 때문에 유리블록을 이중으로 시공했다.

게스트 침실은 딸이 어릴 적 좋아하던 프렌치 시크 콘셉트로 꾸몄다.
건축적 규범이나 표준에서 벗어나 명료하게 구별되는 개념이 아닌 의외성의 공간을 만들어낸 것은 이정화 이사의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판단의 결과인 셈이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접하게 되는 ‘신축에 가까운 리모델링’이란 훈장 같은 표현은 전혀 상찬이 되지 못한다. 이 집은 오히려 리모델링의 신중한 작법에 더할 나위 없이 충실한 아웃풋이기 때문이다.


메타세쿼이아나무를 바라볼 수 있도록 창을 낸 2층의 서재 공간.
이쯤 되면 이 집은 관찰과 기록을 통해 전달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파악하고 해석해서 비평해야 하는 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뜻 보기에는 뚜렷한 특징으로 사람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지 않지만, 곳곳에 정확하게 구현된 요소들이 숨어 있다. 벽 안쪽으로 H빔을 감춰둔 것처럼 이 특징은 보이지 않는다(눈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전문가로서 이정화 이사의 능력이 드러난다.


2층 베란다의 양쪽 벽체 부분에 환기구 역할을 하는 슬릿slit(트임)이 디자인적으로 얌전한 외관에 재미를 더한다.
구배가 진 정원 한쪽에 평지를 조성해 허브와 쌈 채소를 기르는 텃밭을 만들었다.
앞으로 함께 지낼 시간을 위해 메타세쿼이아는 3년에 걸쳐 해마다 5m씩 잘라냈다. 이정화 이사는 이곳에서 와비사비를 실천할 다음 공간을 벌써 구상 중이다.
모더니즘을 따르지 않는 이 공간에서는 직업적으로 맥시멀리스트의 운명을 타고난 그가 채운 물건들이 각각의 히스토리와 함께 빛을 낸다. 이 집에는 오래전부터 선별돼 때를 기다리던 물건과 새로 주문한 제롬 오몽Jérôme Aumont이 설립한 콜렉시옹 파티큘리에르Collection Particulière의 테이블과 비앤비 이탈리아의 허스크 체어 같은 물건이 모순을 끌어안고 조화를 이룬다.

평범하지만 평범을 넘어선 것,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이 주창한 슈퍼노멀supernormal이 어쩌면 한국의 양평에서 이정화식으로 구현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이 각광받는 시대에 평범함을 상실한 자리를 대체할 만한 거리를 찾기보다는 외면하고, 다른 공간에서 도파민만을 반복해서 채우는 관습에 익숙한 지금, 이 집이 편안함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정화 이사에게 집은 좇는 대상이 아니다. 매번 그때의 생각과 관념을 구현하고, 이상적 삶을 향해 올라서는 계단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높이에 올라서서 삶을 바라보는 그는 벌써 다음 스텝을 구상 중이다. 키워드는 ‘와비사비wabi sabi’다.


시공 이안인테리어(02-408-2788)

글 이은석(학과꽃) | 사진 맹민화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4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