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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은 주택의 두 번째 인생
임채경 씨 가족은 평소 눈여겨보던 건축가가 지은 집을 구입하고, 그들과 결이 잘 맞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가족에 맞게 고쳤다. 그 결과 신축에 드는 시간과 비용 및 에너지는 줄이고, 가족에게 딱 맞춘 집에 사는 기쁨만 가득 얻었다.

거실에 앉은 남편 김동엽 씨와 아내 임채경 씨. 부부와 여덟 살 아이 세 식구는 1년 전 아파트에서 이곳 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오각형 평면의 거실은 가구와 오브제의 배치를 바꿔가며 유연하게 사용한다.

중정과 정원을 향해 열린 창과 탁 트인 층고가 인상적인 거실.
격자형 도로, 비슷한 크기의 사각형 필지에 벽돌집이 늘어선 동네. 지역만 바뀔 뿐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는 주택 단지에 새하얀 파사드와 조형미가 느껴지는 형태로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집이 자리해 있다. 차고와 울타리까지 온통 하얀 집의 대문을 열면 마찬가지로 흰색 타일 바닥의 중정과 함께 가려져 있던 주택 안쪽 모습이 드러난다. 임채경·김동엽 씨 부부와 여덟 살 아이 세 식구가 사는 보금자리다.

김동엽 씨가 로망이던 고층 시티 뷰를 포기하고 이곳을 택한 데에는 코로나19가 큰 계기가 됐다. “원래 저에게는 아파트가 편리하고 가장 이상적인 집이었어요.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코로나19가 터진 후로 고층 아파트에서는 고립된 느낌이 들 때가 많더라고요. 아내는 원래 주택을 선호하기도 했고, 마당까지 안전하게 쓸 수 있는 환경이 아이에게 좋을 것 같아 이사를 결심했죠.”

주택을 짓기 위해 동네를 옮길 결심까지 했건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동네는 마음에 드는데 적당한 매물이 없었어요. 그러다 정말 우연히 관심 있게 지켜보던 이병엽 소장님이 설계한 주택을 발견한 거예요. 그때 집주인의 SNS로 부동산이나 동네 정보를 여쭤보면서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는데, 어느 날 집을 내놓았다고 연락을 해주신 거죠.” 임채경 씨는 집 안을 둘러보고서 이곳에 더욱 마음을 뺏겼다. “일단 정원이 넓었고, 도심 주택에서 특히 활용도가 높은 중정이 있다는 점, 동네에서 가장 볕이 잘 드는 위치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어요. 차고까지 포함해 48평 정도 규모라 생각하던 것보다 면적이 작았는데, 짐을 줄여서 살면 되지 않을까 합리화할 정도로요.(웃음) 직접 짓기 전에 리모델링한 주택에 살아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었고요.”


스테인리스 스틸과 목재를 조합한 주방. 벽면 수납공간은 쓰지 않을 때 가릴 수 있도록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했다.

오크 무늬목으로 마감한 주방을 지나면 하얗게 도장한 높은 층고의 거실이 펼쳐진다. 가운데 놓인 소반은 양병용 작가의 작품.
건축가부터 비슷하던 취향이 바탕이 된 것일까. 여러 번의 인연이 겹쳐 임채경 씨 가족은 신축 대신 진돗개 세 마리와 부부가 살던 집의 두 번째 주인이 됐다(눈썰미 좋은 애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진돗개 세 마리와 부부는 지난 <행복> 1월호에 소개한 양평 혜담헌의 건축주다). 신축이 옷 한 벌을 짓는 행위라면, 색감이 적절한지,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며 새로운 주인에 맞추어 수선하는 것은 레노베이션의 몫. 이곳의 수선은 샐러드보울 스튜디오 구창민 대표가 담당했다. 그에게 이 집은 어려우면서도 고치는 재미가 있는 프로젝트였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은 대부분 공간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데, 이 집은 곳곳에서 건축가가 고심한 흔적이 느껴졌어요. 사실 목구조는 벽 하나하나가 구조체여서 뭔가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적어요. 굉장히 제약이 많은 현장이어서 원망스러울 때도 많았는데, 그럼에도 건축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그 모습을 존중하면서 저희만의 언어를 조금씩 더해갔습니다.”

2층은 가족 각자의 공간을 배치해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게 했다. 2층 거실은 원래보다 면적을 넓혀 아이의 공부방으로 사용한다.

주요 테마는 구창민 대표와 부부가 초기부터 공감하던 따뜻하고 편안한 집, 그리고 가족이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됐다. 구창민 대표는 세 식구의 생활을 상상하며 공간을 세심하게 조정했다. 가족이 함께 활동하는 거실과 다이닝 공간에는 넓은 면적을 할애하고, 각자 생활하는 안방과 아이 방은 필요한 면적만 확보한 후 2층에 집중 배치해 프라이버시를 챙겼다. 특히 큰 변화는 중정을 마당으로 바꾼 것. “원래는 중정과 바깥 정원 모두 잔디가 깔려 있었는데, 둘 다 똑같을 필요는 없겠더라고요. 바깥 정원은 가드닝에 집중하고, 중정은 바닥에 타일을 깔아 아이가 줄넘기나 농구를 하기도 하며 마당처럼 쓰도록 했어요. 덕분에 외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행위가 더욱 다양해졌습니다.”

집은 중정을 중심으로 크게 세 개 존으로 나뉜다. 현관을 지나 가장 먼저 드레스룸과 욕실이 등장하고, 기다란 다이닝 공간 겸 주방을 지나 방향을 꺾으면 마지막으로 층고가 높은 거실이 눈앞에 펼쳐진다. 구창민 대표는 원래 작은 방이던 곳을 드레스룸으로 바꿔 부족한 수납공간을 보완했고, 욕실은 욕조와 손을 씻는 세면대, 도기가 있는 세 공간으로 구분해 활용도를 높였다. 마감재의 선택과 배치는 공간의 시퀀스까지 고려하는 샐러드보울 스튜디오의 감각이 특히 돋보이는 부분. 손이 닿는 면적이 많은 복도와 다이닝 공간은 오크 무늬목으로 마감해 따뜻한 기운을 들이고, 거실은 반대로 온통 하얗게 도장해 높은 층고와 오각형 평면의 공간이 한층 드라마틱하게 느껴진다.


몬타나의 주황색 수전이 포인트인 2층 욕실.


정원은 작게 텃밭을 조성하고 가드닝하는 공간으로 이용하고, 중정은 바닥에 흰색 타일을 깔아 마당처럼 사용한다.

TV가 아니라 가족이 서로 마주 보는 공간이 된 거실은 본래의 독특한 공간감에 새하얀 분위기까지 더해 리조트처럼 기분 좋은 낯섦을 불러일으킨다. 임채경 씨에게는 가족 생활에 맞춰 그때그때 바꿔 쓰는 재미를 누리는 곳이기도 하다. “중정이 내다보이는 창가는 어느 날에는 데이베드를 두고 누워 지내다가 또 어느 날에는 소반을 두고 맥주나 차를 마시기도 하면서 유연하게 사용해요. 중정과 마당을 향해 곳곳에 창문이 나 있어 조목조목 시선이 닿으며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도 아이와 함께 사는 집에서 큰 장점이 되고요.”

리모델링은 공간을 고치는 행위이지만, 그 결과물은 단순히 생활을 편안하고 편리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가족이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기도 한다. “예전에는 보이는 모습에 신경 쓰고, 트렌드에 맞춰 집을 계속 바꿔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집을 모시고 사는 사람에 가까웠던 거죠. 지금은 가구 하나도 오래 쓰고 싶고 생활의 흔적도 가족의 시간으로 여기게 됐어요. 아이도 정말 많이 바뀌었어요. 전에는 남한테 관심이 없고, 개미 한 마리만 봐도 무서워했는데, 지금은 정원에서 달팽이를 발견하면 텃밭에서 상추잎을 뜯어서 줘요. 여름에는 잡초 뽑고, 가을에는 낙엽 쓸면서 다 같이 집을 가꾸는데, 아이도 집을 돌보는 일에 동참하면서 자존감도 훨씬 높아졌고요.”


서로 다른 높이의 매스와 박공지붕으로 조형감이 느껴지는 파사드. 대문부터 울타리까지 모두 하얗게 칠했다.
도면은 1층 평면도.

임채경 씨 가족의 집은 집주인과 디자이너가 모두 공감하던 ‘가족’이라는 확고한 우선순위를 바탕으로 집은 집다워야 한다는 당연해 보이지만 놓치기 쉬운 명제를 실현했다. 공간을 짓는 일은 결국 시간을 짓는 일이다. “알고 보니 집은 가족이 모이게 하는 곳이더라”는 김동엽 씨의 말처럼 이곳에서 세 식구가 각자 또 함께 보내는 시간이 쌓여가며, 새로 고친 집은 가족만의 행복이 가득한 집이 되어가고 있다. 




구창민 대표는 2014년 공간 디자인 스튜디오 샐러드보울 스튜디오를 설립했다. 편안하고 단순한 집의 감각을 디자인 언어로 삼아 주거 공간부터 상공간, 미술관까지 다양한 공간을 넘나들며 샐러드보울 스튜디오만의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다. salad-bowl.co.kr

글 정경화 기자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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