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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석 옹기장 · 정영균 이수자 가족 아들을 위해, 아버지를 위해 다시 물레에 앉는다
전라도 강진 칠량, 바다를 옆구리에 낀 ‘칠량봉황옹기’집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정윤석, 이수자 정영균 씨 가족이 산다. 아버지와 아들 모두 칠량에서 나고 자라 평생 옹기를 만들며 살았다. 그들이 공방과 작업장, 살림집을 합한 집 한 채를 지었다. 바닷가 마을에 자연스레 스미는,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건축이라 했다. 아버지의 시간과 아들의 시간이 바람처럼 스며든 집이라 했다.

1980년대 후반까지 무동력 돛단배에 옹기를 실어 전국 각지로 나르던 이들의 터전이 바로 칠량옹기마을이다. 그 동네, 대섬이 바라보이는 자리에 칠량봉황옹기가 자리한다. 왼쪽부터 정윤석 옹기장, 아내 이복비 씨, 며느리 이정인 씨, 아들 정영균 이수자, 손녀 정주희. 스페인 건축가 프란시스코 레이바가 ‘바다를 끌어안으면서 바다로 나아가는 집’을 바라며 이 집을 설계했다. 옛집 마당 역할을 하는 중정은 전시장으로도 사용한다. 사진 한가운데 옹기가 정영균 이수자 작품, 오른쪽 세 옹기가 정윤석 옹기장의 작품이다.
2층 전시장에서 바다를 바라봤다. 이 곡선 형태는 옹기 제작의 마지막 공정에서 윗부분을 잘라낸 형상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부연 안개가 봉황리 갯가에 피었다. 해무 덕분에 버석한 머리칼도, 옷깃도, 마음도 젖어든다. 시인의 글귀처럼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물 빠진 개펄 위에 난 물 자국 보며 생각한다. 물기로 가득한 동네, 강진군 칠량 봉황포구 지척에 이 가족이 산다. 7백여 년 전부터 옹기마을이었다는, 1960년대 마을 선착장에 드나들던 옹기 상선만 수십 척이었다는, 1988년 마지막 옹기배가 사라질 때까지 상인들이 포구에서 옹기를 실어 여수·부산·제주까지 넘나들었다는 그런 동네. 지금은 한국에서 두 명뿐인 국가 지정 무형문화재 옹기장 중 한 명인 정윤석 장인과 가족이 이곳에 산다(한 사람은 여주의 김일만 옹기장).

“노동력 있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옹기 일을 하다시피 해서 관련 직업이 서른 개가 넘었어요. 흙만 퍼다 주는 사람, 흙 깨끼질하는 사람, 나무만 갖다 대는 사람, 옹기 만드는 사람, 불만 때는 사람, 배에 실어서 파는 사람…. 지금은 그 일을 아버지와 제가 다 해요. 꼭 필요한 부분에서 최소한으로 기계의 도움을 받는 거 말고는 옛날 옹기 도공이 하던 방법을 그대로 지켜가면서요.”



아버지와 아들이 쳇바퀴 타래미 작업 중이다. 벽돌처럼 빚어놓은 흙 반죽을 땅에 내려치며 늘여서 쌓는다. 사람의 힘과 지구의 힘-중력-을 합해 만든 이 반죽은 옹기 벽의 적당한 두께를 잡아 올리는 데 안성맞춤이다.
갑근세도 한 번 안 내본 사람처럼 무심히 말하지만, 필설로 다 못 할 시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1941년생, 아들은 1968년생, 아버지는 열댓 살부터 시작했으니 70년 가까이, 아들은 스물댓 살부터이니 30년째다. 그 시간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독 짓는 이로 살았다. 밥을 짓고, 옷을 짓고,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글을 짓듯 독을 짓고 살았다.

“그 많던 옹기 공장이 문을 닫고 이 마을에 나 하나 남았네. 그래도 어쩌겄어요. 혼자라도 해나갔제. 광택 내는 화학 유약 그런 데 눈 돌리지 않고 천연 잿물 써감서 하는 데까지 해봤제.” 정윤석 옹기장의 짧고 투박한 한마디에 모든 게 다 들어 있다. 한 가계의 가장이라는 짠 내 나는 진실까지 짊어지고 산 그의 얼굴은 신기하게도 윤기 도는 옹기 빛깔이다.


2019년 <행복>이 한식 단행본 을 만들 때 한국의 옹기장으로 정윤석 장인을 소개했다. 당시 칠량봉황옹기 마당에서 바다를 바라본 모습.
“아들. 막내아들은 천방지축 사고뭉치였다. 성질이 급한 나를 피해 산으로 들로 바다로 도망다녔다. 그 아들이 옹기를 하겠다고 마을에 남았다. 밤늦도록 작업을 한다. 몸을 아끼라고 얘기해도 듣지 않는다. 그럼 화를 내며 돌아선다. ‘네가 있어 아버지는 든든하다’는 말은 못 하고…. 그리고 아들을 위해 다시 물레에 앉는다.”

“아버지. 어려서 호기심이 많은 나는 늘 아버지와 부딪쳤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잡히면 죽는다…. 빨리 아버지를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나만 고향에 남았다. 일을 마치고 일어서는 아버지의 등이 굽어 있다. 일을 줄이시라고 얘기해도 듣지 않는다. 그럼 화를 내며 돌아선다. ‘함께 오래 일하고 싶다’는 말은 못 하고…. 그리고 아버지를 위해 다시 물레에 앉는다.” 

아버지와 아들이 두세두세 나눈 이야기를 며느리가 옮겨 적어 작업장 바람벽에 붙였다. 시보다 더 시 같은 글이다. 필설로는 다 못할 어떤 인생을 담은.



2층 살림집. 전시나 기획 행사의 오프닝 장소로도 쓸 요량으로 간결하게 구성했다. 대신 침실 같은 사적 공간은 꺾인 벽체 속에 숨어 있다.
아버지의 옹기
저 바다는 ‘경계’다. 물과 땅이 만나는 경계, 이 세계와 저 세계가 만나는 경계, 나와 타자가 만나는 경계. 저 경계를 넘어야 새로운 세상에 들어설 수 있다. 경계를 넘으려면 해무처럼 사라져야 한다. 사라지는 것이 곧 알아내는 것이다. 그렇게 나를 녹여야 세상 속으로 스며 들어간다. 바람만 사는 빈집들이 곳곳이고, 2백여 명 주민이 굴에, 쏙에, 참꼬막 따며 사는 갯가 동네에서 나는 왜 경계를 말하는가.

정윤석 옹기장은 자신이 6대째인지 7대째인지 잘 모를 정도로 오래, 외가도 처가도 모두 옹기장이인 집에서 나고 자라 쳇바퀴 타림 기법으로 독을 짓는다. 다른 지역에서는 흙을 가래떡 모양으로 빚어 쌓아 올리는 타림 기법을 쓰는데, 그는 옹기 흙으로 네모진 판을 만들어 쌓아 올리는 ‘쳇바퀴 타림 기법(쳇바퀴 타래미, 혹은 판장 기법이라고도 함)’을 쓴다. 전남에서만 사용하는 이 기법을 쓰면 좀더 빨리, 쉬이 옹기를 만들 수 있다. 다만 판을 고른 두께와 크기로 두드려 쌓아 올리는 기술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정윤석 옹기장이 만드는 옹기는 배가 불룩하고 몸맵시가 후덕하다(일조량이 풍부한 남쪽 지방의 옹기는 입이 좁고 배가 부른 데 비해 북쪽 지방의 옹기는 햇빛을 많이 받기 위해 입이 넓고 날씬하다).


건물 사이 공간에 자리한 정윤석 장인의 옹기 전시장. 그가 옹기를 빚는 흙은 좀 다르다. 미세한 모래알이 많이 섞인 흙을 써서 항아리를 만들고 가마에 일주일씩 구워낸다. 그러는 과정에서 옹기가 수축하면서 흙 속 모래알이 밀려 나온다. 그렇게 그릇에 숨구멍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벽체 속에 숨은 침실.
“면 소재지로 조금만 나가면 쓸 수 있는 옹기 원토가 바로 나와요. 고려 때 청자를 구운 삼흥리가 이웃에 있을 정도로 이 동네 흙심이 좋다 했으니까요. 주변에 숲이 있어서 땔감 구하기도 쉬웠고요. 아버지는 아직도 이 동네 흙으로 옹기를 빚고, 이 동네 소나무로 가마를 때고, 옛날 사람들이 쓰던 발 물레를 차고, 소나무를 물에 불려 손수 깎은 나무 도구로 옹기 벽을 두드려요. 유약도 솔밭 밑을 걷어내면 나오는 약토로 만들고요. 옹기 일이 사양산업이 되면서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어머니와 농사도 지으시고, 이런저런 일 해가며 ‘칠량봉황옹기’를 지켜내신 거예요.”

아들의 말처럼 녹록지 않은 세월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틈새 많은 돌담처럼 세월에 운명에 맞서지 않고 자기 인생을 그저 충실히 산 사람. 무너질 듯 무너질 듯하면서도 바람과 비와 풍랑을 다 통과시키던 그런 삶이었다.


아들의 실험적 옹기를 앞에 둔 부자.
이 집은 부자의 공방 두 개, 전시실 두 개, 정영균 씨의 살림집으로 구성했다. 집 오른쪽에 나무 가마가 보인다.
오늘의 옹기
아들은 군대 제대 후 아버지 밑에서 건아꾼(옹기를 빚는 과정의 허드렛일을 통틀어 이르는 말)으로 기술을 익혔다. “국내에 옹기장으로서 그만큼 기능을 완전히 익힌 젊은 장인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기본기를 다져온 셈이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지방무형문화재 옹기장 전수자, 국가무형문화재 옹기장 이수자로 지정되었다.

지금 그는 전통 옹기도 만들면서 쳇바퀴 타림 기법을 응용해 새로운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재 유약이나 흙을 조금씩 바꿔가며 불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연구하길 수십 년째, “도자기로 못 쓰는 흙이 없고, 못 쓰는 유약이 없는 옹장”이 되어가는 중이다. 그 결과물은 백자 흙과 옹기토를 결합해 빚은 그릇(본래 이 둘은 수축률이 달라 결합한 상태로 한데 구우면 금이 가고 깨진다), 쳇바퀴 타림 기법으로 빚어 사람 몸통보다 크게 만든 달항아리로 이어지고 있다. 아버지도 “첨엔 자꾸 이상하고 묘한 걸 만든다 했는디, 무슨 전시회 같은 데 갖고 나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사부러” 했다는 그 이상한 옹기 말이다.



프란시스코 레이바가 그린 설계도와 스케치. 주방 벽에 붙여두고 아직 마무리하지 못한 조경 공사를 궁리 중이다. 그 아래 훅은 며느리의 작품.
“내가 해야 되고, 제일 잘할 수 있는 일 같으니까 하는 건데요, 뭐. 전통의 뿌리는 지켜나가면서도 시대와 통하는 특별한 표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거죠. 지금 당장 사람들이 안 알아주면 뭐 어때요. 저 옛날에 김환기 선생님도 그림을 안 팔기로 하고 어디 창고에 넣어놨다잖아요. 나는 그냥 땅에 묻어놔야겠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알아보겠지 해요. 어설프게 내놓기는 싫어요. 달항아리는 아직도 성에 안 차고요.”

모두 스티로폼처럼 물 위로 동동 뜨고 싶어 하는 시절에 그라고 왜 갯가를, 작업장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까. 매일 사람 사이에 살아도 망망대해에 홀로 있는 듯하던 그에게 가슴팍을 비집고 들어오던 저 바다, “바다가 있어 외로움으로 산다” 하던 그의 말처럼 그를 지탱해준 바다다. “해 질 녘 앞바다를 물들이는 노을을 보고 만들었다”는 옹기 접시만 봐도 그 마음을 조금 알겠다.


1층 전시실.
수축률이 다른 백자 흙과 옹기 흙을 결합해 만든 그릇.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쳤다. 앞바다 노을을 보고 만들었다는 그 그릇이다.
칠량봉황옹기의 ‘오늘의 집’
이 가족은 2019년 문화재청, 전라남도, 강진군이 함께 지원하는 공방 리모델링 사업에 선정돼 3년 넘게 집을 지었다. 작업장과 전시장, 살림집이 한데 모인 공간이다. 전통 의상을 재해석해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려온 ‘꼬세르’ 배영진 대표(해남의 80년 넘은 숙소 유선관을 최근 한옥 호텔로 변신시키기도 한)가 스페인 건축가 프란시스코 레이바Francisco Leiva(2023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에서 미래 서울의 지형을 추상화한 파빌리언 ‘서울 드로잉 테이블’로 우리를 만났다)를 소개하면서 건축이 시작됐다. 부족한 설계비에도 건축가를 설득하고, 한국에 맞는 설계 일정을 위해 한국의 양경모 건축가를 연결하고, 설계안이 결정되기까지 강진과 서울을 오가며 중요한 과정과 고비마다 함께한 사람이 배영진 대표다.



정영균 이수자는 옹기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색을 만들어냈다. 작은 잔에 쓰인 번호는 그 실험의 흔적.
“5년 전엔가 우연히 이 동네를 지나다 우리 옹기를 본 후 시작된 배영진 선생님과의 인연이 없었으면 이 건축은 완성되지 못했을 거예요. 옹기 공방이 발전해갔으면, 그걸 담는 좋은 건축물이 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고 해요. 프란시스코 레이바도 의미 있는 건축을 하려는 사람이라 어려운 결정을 내려주었고요. 그 건축가도 스페인 바닷가에 산대요. 그래서 집이 바다를 끌어안으면서 바다가 집을 끌어안기도 하는, 또 그러면서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역할을 하는 집을 만들고 싶었대요. 옹기가 세계유산으로 뻗어나가길 바라면서, 건물 외부 곡선을 옹기 만드는 과정 중 하나로 표현했다 하고요(항아리의 마지막 전을 잡기 전 윗부분을 잘라낸 형상으로).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저희 공방을 짓는 일도 마찬가지였어요. 국가 예산을 지원받은 일이라 규정을 지키면서도, 건축가의 좋은 계획을 구현하다 보니 점점 부족해지는 예산을 맞춰야 했으니까요. 거기에 건축적 난도가 높은 공사였고요. 많은 분이 ‘마을’이 되어 저희를 도와주셨어요.”


쳇바퀴 타림 기법으로 실험 중인 대형 달항아리.
며느리 이정인 씨의 말처럼 여러 사람이 마을이 되었고, 조용하지만 위엄 있는 건축이 완성되었다. 무엇보다 이 건축물은 1층 공방과 전시장, 2층 전시장과 살림집이 한데 모인 공간이다. “이 시대의 요구에 대해 옹기장은 어떤 답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고, 그 결과물이 칠량봉황옹기의 ‘오늘의 집’이다. “전통이야말로 과학을 기반으로 한 작업이라고 봐요. 그래서 더더욱 우리 공방을 현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짓고 싶었고요. 바다와 유리되지 않는, 인위적이지 않은 건축물에 젊은 세대가 옹기 보러 찾아오고, 소통하는 시간을 담아야겠다 생각했어요. 아버지도 그런 뜻을 지지해주셨고요.” 이들은 2024년에 외국인 대상 옹기 투어, 도예 전공자 워크숍, 젊은 세대를 위한 작업 참여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경계를 넘어서는 일
바다는 ‘경계’다. 물과 땅이 만나는 경계, 낮과 밤이 만나는 경계,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경계. 해무 속에 물과 땅이 동색으로 평등하더니 어느새 그 경계가 드러난다. 저 경계를 넘어야 새로운 세상에 들어설 수 있다. 경계를 넘으려면 해무처럼 자신을 녹여야 세상 속으로 스며 들어갈 수 있다. 그렇게 나를 녹이는 것이 세상을 아는 일이다. 대섬이 내다보이는 갯가에서 서로 의지하며, 서로 넘나들며 옹기 빚는 두 사람. 강진 봉황리에 독 짓는 부자가 산다.

글 최혜경 기자 | 사진 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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