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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건축가 다니엘 텐들러Daniel Tendler 돌과 식물과 고양이의 날들
‘한옥’을 전공하는 건축가는 독일인이다. 그런데 그의 새집은 양옥이다. 게다가 새로 건축한 게 아니라 오래된 집을 대수선했다. 다니엘 텐들러의 집은 쉬운 예상과 선입견을 가볍고 기분 좋게 벗어난다.

주방 쪽에서 바라본 거실 풍경. 현관 진입 동선을 사진의 중앙에서 왼쪽으로 옮기고 오른쪽에 벽을 만들어 거실 모양을 다듬었다. 지붕에 개폐식 유리 천장을 설치해서 온실을 만들어 식물 중심의 집이 완성됐다.
다니엘 텐들러 소장은 서울 북촌과 은평구 한옥마을 등에 여러 채의 주택 용도 한옥을 설계했다. 지난해에는 서울공예박물관 공예별당(SeMoCA)의 설계를 맡았고, 최근에는 아파트 인테리어(제주 부영) 설계를 하는 등 한옥을 설계 기반으로 영역을 확장 중이다. 최지희 소장과 함께 건축사사무소 어번디테일(www.urbandetail.co.kr)을 운영 중이다. 고양이와 함께 있는 그의 뒤편으로 보이는 방은 ‘어머니 방’.
EBS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 <건축탐구 집>을 통해 일반인에게도 친숙한 독일인 건축가가 서울에서 집을 마련해 대수선을 했다. 대수선은 건축물의 기둥, 보, 내력벽, 주계단 등의 구조나 외부 형태를 수선 변경하거나 증설 해체하는 것이다. 증축이나 개축 또는 재축에는 해당하지 않는 건축 행위를 말한다. 모든 과정은 보통의 한국인이 겪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집을 사기로 결심하지만, 아파트를 사기에는 예산이 부족했다. 건축가에게 아파트는 어울리지 않다고도 생각했다. 마침 감당할 만한 (대출을 포함한) 예산 범위에 드는 집을 찾았다. 그렇게 결론은 대수선이 됐다.


좁은 골목에 면한 대문을 없애고 벽을 안으로 밀어서(세트백set-back) 답답함을 없애는 대신 ㄱ자로 꺾이는 계단 동선이 외부인 시선에서 프라이버시를 지켜 준다. 단풍나무는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
작은 욕실의 죽은 공간을 이용한 그린 스페이스가 오히려 공간에 여유를 준다.
“바닥 면적은 서른 평이 약간 안 됩니다. 벽체는 거의 원래 집 그대로예요. 남겨둔 천장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에도 여기는 거실이었습니다. 작은 현관이 있던 입구를 옮기고 새로 벽을 세워서 방을 만들었지만, 화장실의 위치도 모두 그대로입니다.” 여기까지는 텐들러 소장의 설명대로 대수선이다. 그런데, 이것은 수선의 범위를 넘어서 의미를 바꾼 대수선이라고 해야 옳다. 대문과 현관이라는 전이 공간을 없애고, 골목에서 별도의 대문 없이 현관문을 거쳐 곧장 거실로 들어선다. 대문을 없앤 것은 함께 사는 고양이 두 마리가 쉽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대문 자리에 세운 벽은 이 집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더해준다. 마당에도 고양이가 나가지 못하도록 네트를 설치했다.


거실에 벽을 세워 만든 방에는 소파와 TV, 테라리엄 온실 등을 배치했다. 독일에서 부모님이 오실 때면 텐들러 소장의 침실로 바뀐다. 물푸레나무(ash)로 마감한 천장이 이국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머니 방. 장식을 피하고 한지로 벽을 마감한 이 방은 고요한 휴식을 떠올리게 한다. 한옥의 스케일감을 떠올리게 하는 방 크기는 이전 집 그대로이다. 집의 첫인상과 전혀 다른 의외의 공간.

현관 안으로 들어서면 펼쳐지는 광경은 드라마틱하다. 이곳은 집이면서 집이 아닌, 온실이면서 온실이 아닌, 한국이면서 한국이 아닌 풍경이다. “제가 자란 독일의 집에도 큰 마당이 있었습니다. 오랜 취미인 식물을 마음껏 키우고 싶었고요. 서울에서 땅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작지만 마당이 있는 이 집을 찾고는 마음의 준비 없이 바로 샀습니다.”

마당과 대출을 포함해 가능한 예산의 범위는 자연스럽게 동네를 결정한다. 대중교통이 더 편리한 서울에서는 굳이 차를 갖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참고가 됐다. 공사 계획과 비용 확보를 위해 1년여간 지인에게 세를 주면서 여유 시간을 가졌다. 그사이 생각은 자연스럽게 ‘온실이 중심이 되는 집’으로 모아졌다. 고무나무류의 열대식물을 좋아하는 그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다. 상상 속에서는 규모가 너무 커서 불가능해 보이던 온실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정작 현실에서의 상황이었다. 너무 낡은 지붕을 반드시 수선해야 했고 이왕 그렇게 된 것, 집 한가운데의 지붕을 개방형으로 만들기로 했다.


기존 거실 천장을 일부 살려서 헤리티지가 느껴지도록 했다. 실제로는 판재 하나하나를 떼어내서 사포질한 뒤 다시 붙이는 등 품을 꽤 들였다.
지붕을 수선하면서 중앙에 있던 용마루의 위치를 뒤로 움직였다. 거실의 유리 천장과 주방의 천장이 보인다. 꼭 써보고 싶었지만, 한옥에서는 쓸 일이 없던 골강판을 지붕 소재로 사용했다.
어머니 방의 다락을 통해서 지붕에 마련한 테라스로 나갈 수 있다.
“한옥에는 중정이나 마찬가지인 마당이 늘 있잖아요. 저 역시 마당을 정말 좋아하는데, 여기 중앙에 마당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실내 마당이지요. 그렇게 식물을 심으면 되니까요.” 중정 겸 마당 위로는 전동 개폐식 유리 천장을 만들고 바닥에는 사비석이라고 부르는 화강암 판석을 깔았다. 계단이나 디딤돌처럼 외부에 사용하는 돌을 실내에 바닥재로 쓴 이유는 단순하다. 이곳이 ‘실내 마당’이기 때문이다. 유행이나 트렌드를 따를 생각은 없었다. 독일의 집에서도 익숙한 돌바닥의 촉감은 낯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옥에서도 얇고 넓은 돌을 방바닥에 깔고 구들장이라는 귀여운 이름으로 부르지 않던가. 난방을 켜면 ‘돌마루’는 가장 먼저 따뜻해지고 가장 나중까지 따뜻함이 유지된다. 텐들러 소장의 의도가 잘 들어맞았다.


확장한 포치porch 공간의 유리창을 통해 마당이 보인다. 거실과 새로 만든 방 사이에는 세로로 길게 틈을 만들어 개방감 확보와 함께 현관 상황을 쉽게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바닥에 돌을 깔고 나니, 자연스럽게 벽도 돌로 마감하고 싶어졌습니다. 같은 재료로 석축을 쌓듯 모양이 다른 돌을 맞춰서 쌓으면 어떨까 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봤더니 괜찮았어요. 중정 마당 아이디어가 가장 핵심이었는데, 나중에는 식물들이 돌을 타고 자라 올라가면서 자연스러워졌습니다. 물을 줄 때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편하고요.” 방에는 어머니 방과 아버지 방으로 이름을 붙였다. 독일에서 부모님이 오실 때, 각자 편하게 쉬시도록 하려는 의도다. 어머니 방에는 ‘한옥 건축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담았다. 모든 장식을 배제하고 벽과 천장을 한지로, 방바닥은 옻칠로 마감했다. 침대를 놓는 대신 다리가 없는 프레임을 써서 좌식 느낌을 살리고, 시선 역시 낮춰서 공간이 넓어 보이도록 했다. 다락을 없애고 지붕 위 테라스로 나갈 수 있도록 했다. 고양이를 위한 궁리다.


주방에서 바로 이어지는 뒤뜰에는 무화과 같은 과실수를 심고 한쪽은 토마토 등을 재배하는 텃밭으로 사용하는 중이다. 텐들러 소장이 가장 아끼는 공간이다.
거실에서 바라본 주방 모습.

주방은 간소하다. 주방의 크기가 살림과 생활의 크기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1인 생활자용이다. 더 크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공간 배치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대신, 냉장고와 오븐, 식기세척기와 가스레인지와 커피 머신, 전자레인지의 수납을 고민했다. 주방의 천창은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레인지 후드를 설치하지 않고도 충분히 환기된다. 신축보다는 수선이 많은 한옥을 다루는 건축가에게 대수선은 익숙한 작업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세계를 쌓고 싶은 욕구를 유보하는 데에는 스스로를 설득할 이유가 필요하다. 답은 건축의 본질에 있었다.



“집을 구할 때쯤, 독일의 어머니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부모님이 집을 정리하셨어요. 기운이 있을 때 이사하시겠다고. 저도 추억이 있는 집이라 반대했지만, 나중에 그 집에 이사 온 가족이 정말 행복하게 지낸다고 말씀해 주셔서 꽤 위로가 됐습니다.” 대수선이 신축에 비해 결코 비용을 아끼는 방식이 아니고, 좁은 골목으로 인해 지금 내가 사는 집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집이 될 수도 있다면, 집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대신 오래된 집을 고치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텐들러 소장은 키우는 식물의 양만 보더라도 미니멀리스트는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의 집은 삶에서 뭔가를 하나씩 덜어낼 때 얻게 되는 다른 선택지가 얼마나 삶을 풍요롭게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글 이은석(학과꽃) | 사진 정호석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