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날아가는 물고기(Flying Fish)’ 벽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애덤과 에이미 부부.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 벽지는 초현실적 디자인, 선명한 색감과 더불어 거울처럼 반짝이는 질감이 특징이다.
문을 열자마자 스카이 블루 컬러 페인트로 마감한 현관 복도가 부엌까지 길게 이어졌다. 잘 가꾼 정원을 보듯 꽃과 식물, 그 사이를 유영하는 나비와 잠자리 등이 액자에 담겨 벽과 천장으로 날아다닌다. 세 명의 어린 자녀가 함께 사는 집이라고 예상할 수 없을 만큼 신발 하나 굴러다니지 않는 고요한 풍경. 디자이너 애덤 엘리스Adam Ellis가 자신의 분신 같은 집을 만들기 위해 공들인 장치 중 하나다. “이제 보이는 모든 공간마다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아트 벽지가 요동칠 겁니다. 현관과 복도를 말끔하게 비워내 잠시 숨을 고르고 세상과 단절되는 시간을 만들었죠.”
슬레이드 미술학교(Slade School of Fine Art)를 졸업하고 그래픽 디자이너로 전향한 후 직접 디자인한 비스포크 벽지와 판화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 애덤 엘리스. 오래된 집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유지·관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영국인답게 오래전부터 빅토리아Victoria시대의 집을 구입해 자신의 작품으로 채우고 싶다는 소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 벽지의 특징인 동식물 패턴, 아날로그 프린트 스타일, 금속처럼 빛나는 표면 광택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주거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정원을 테마로 한 거실. ‘지중해 알로에 베라(Mediterranean Aloe Vera)’ 벽지와 절묘하게 궁합을 맞춘 버디어Verdure 판화 작품 모두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 제품. 암체어는 캠튼 빈티지 마켓에서 구입한 후 페르모이Fermoie의 폰타나Fontana 코튼 패브릭으로 업홀스터리했다.
그렇다고 벽지만 내세울 수는 없다. 인테리어는 삶의 배경이어야지 삶을 가려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그는 벽지 사용을 절제하는 동시에 강조하고자 노력했다. “더 블룸버리 호텔, 스콧츠, 아이비 레스토랑, 프라이빗 클럽 애나벨 하우스 등 많은 상업 공간을 통해 저의 비스포크 벽지가 널리 알려졌지만 주거 공간 프로젝트는 거의 없었어요. 그래픽 스타일의 화려한 벽지가 일상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았고요. 이 집 레노베이션은 벽지에 대한 편견을 허무는 동시에 영국식 인테리어 방식에 딴지를 건다는 목표로 시작했죠. 모든 상황마다 ‘와이 낫why not?’이라는 막무가내 발상이 필요했어요.”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글라스 아이 피시 Glass Eye Fish’ 벽지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1층 파우더룸. 다시마 정원을 헤엄치는 열대어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벽지가 급부상한 빅토리아 시대
세월의 흔적을 좋아하는 영국인답게, 영국에는 1400년대 튜더Tudor 시대부터 최근에 지은 뉴빌드 하우스까지 다양한 집의 형태를 볼 수 있다. 1백 년 된 집이라면 젊은 편에 속한다. 주거 건축 역사를 간단히 간추리면 이렇다. 1400년대 튜더 시대의 목조 초가집, 1600년대 스튜어트Stuart왕조 시대의 돌과 벽돌을 활용한 집, 1700년대 조지안Georgian 시대의 대칭 구조를 강조한 석조 건물, 1830년대 이후 빅토리아 시대의 비대칭적 벽돌집, 1880년대 앤Anne 여왕 시대의 붉은 벽돌과 목재 처마 지붕을 강조한 집, 1900년대 에드워디언Edwardian 시대의 바로크 스타일 집으로 나뉜다. 1920년대에는 장식을 절제한 애디슨Addison 주택과 장식을 강조한 아르데코art deco 주택이 공존했다. 세계대전이 끝난 후 철제 구조의 에어리Airey 주택이 등장하면서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게 된다.
욕실 문을 열자 마자 보이는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수영 선수(Swimmer)’ 작품은 1920년대 미국 디자이너 로즈 마리 리드Rose Marie Reid가 작업한 잡지 표지에서 영감받았다. 이처럼 애덤 엘리스는 일상에서 다양한 영감을 얻는다.
“벽지는 빅토리아시대에 대중화되었는데,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 운동의 영향이라기보다 인쇄 기술 개발과 연관 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영국에는 16세기 초부터 벽지가 있었고, 귀족보다는 상인의 집 찬장이나 작은 방을 장식하는 데 사용했어요. 이후 인쇄법이 발달하고 장식을 강조하는 빅토리아시대가 되자 벽지가 인테리어 요소로 떠올랐죠. 벽지가 점점 아름다워지고 정교해지면서 왕실 귀족도 탐내기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벽뿐만 아니라 천장, 계단, 욕실까지 벽지로 도배했다고 해요.”
윌리엄 모리스 앤 코William Morris&Co., 샌더슨Sanderson, 콜 앤 선Cole&Son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핸드메이드 벽지 브랜드도 이 시기에 태동했다. 꽃·식물·동물 등 자연을 모티프로 한 무늬가 주를 이뤘고, 종이 위에 잉크를 묻힌 목재 블록을 반복적으로 찍어 패턴을 만들었다. 벽지 가격이 점점 내려가자 사람들은 벽을 상·중·하로 나누어 다른 패턴으로 도배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앤 여왕 시대에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한 묘책으로 벽지세를 제정했다. “벽지가 대중화되면서 동시에 독특한 재료와 광택을 활용한 하이엔드 예술 벽지 시장이 열렸죠.”
영국 집은 정원 뒤편이 상대적으로 넓다. 애덤은 정원의 일부를 할애해 사시사철 빛이 잘 드는 부엌과 다이닝 공간을 만들었다. 복도에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입구 천장에는 조지 쇼의 <자연주의자 선집>에서 영감을 받은 판화 시리즈 ‘아쿠아틱Aquatic’을 배치했다. 책장과 주방 가구는 데볼 키친스deVol Kitchens 제작. 한스 웨그너 스타일을 닮은 의자 다이닝 테이블 스리Three는 어나더컨트리Another Country, 다이너Diner 조명은 오리지널 비티시Original BTC 제품.
아이들과 함께 일하고, 놀고, 즐기고
흥미롭게도 빅토리아시대 집을 선택했지만, 인테리어 목표는 빅토리안 스타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빅토리아시대 건축물은 도서관·음악실·응접실 등 목적에 따라 공간이 나뉘고, 공간 크기도 제각각이다. 그는 차터드 프랙티스 건축사무소(Chartered Practice Architects)에 각기 다른 사각 공간을 합쳐 정사각형 공간을 만들고, 뒤편 정원 일부를 주방 공간으로 확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로써 1층의 긴 현관 복도 양쪽에는 넓은 거실과 놀이방이, 복도 끝에는 정원과 이어지는 다이닝룸과 주방이 등장한다. 2층에는 어린이 침실 두 개와 마스터 침실 공간이, 3층에는 어린이 침실 한 개와 게스트룸이 자리한다.
사과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욕실은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컬럼비대Columbidae’ 벽지와 스톤 앤 세라믹 웨어하우스Stone&Ceramic Warehouse의 다크 메트로Dark Metro 타일을 혼용했다.
“보통 영국 집은 아래층에 공용 공간을, 위층에 사적 공간을 둡니다. 또 아이들 공간을 별도로 나누죠. 하지만 저는 1층 전체가 가족 공간이 되길 바랐어요. 거실, 주방, 놀이방 모두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를 겸합니다. 또 일터와 가정도 합치고 싶었어요. 선생님이던 아내도 현재 제 일을 돕고 있어 거실 한쪽에 사무실을 마련했어요. 제 스스로 일과 삶 두 가지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공간 또한 분리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전 아이들과 함께 일해요.”
정원 또한 가족용 놀이터이자 일터다. 보통 영국의집 정원은 집 앞과 뒤에 자리하는데, 뒤편은 사적 공간으로 쓰기에 넓은 편이다(뒤편 정원은 건물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애덤은 잔디와 장미, 수국 등으로 꾸민 영국식 정원 대신 조경 디자이너 조애나 아처Joanna Archer에게 구불구불한 길 사이로 채소 텃밭과 도롱뇽, 개구리 등이 서식하는 작은 연못이 있는 실용적 정원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다. 단정한 정원에는 집 안을 장식하는 벽지 속 동식물이 살아 숨 쉰다. 부부는 정원에서 아이들과 놀다가 반짝이는 영감을 얻고 거실로 달려가기도 한다.
거실 벽에는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오마주 투 메스키타’ 시리즈 작품을, 바닥에는 에이미의 친할아버지 조지 보글George Bogle의 초상화를 배치했다. 쿠션은 모두 수전 델리스Susan Deliss 제품으로 아내 에이미가 오랜 시간 수집한 것이다. 암체어는 인드리흐 할라발라Jindrich Halabala의 빈티지 작품으로 폴루체Polluce 패브릭으로 업홀스터리했다. 천장 조명은 세르주 무이Serge Mouille의 빈티지 작품.
벽지는 장식이 아니라 마음
그렇게 5개월간 집 내부 구조를 완전히 바꾸고 나서야 벽지 작업을 시작했지만 공정은 일사천리였다. 집을 구입하기 전부터 이미 점찍어둔 작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바다·수영·낚시 등 여름휴가를 떠올리게 하는 생동감 있는 풍경을, 아내는 잠자리·참새·딱정벌레 등 정원 풍경을, 애덤 자신은 조지 쇼George Shaw의 <자연주의자 선집(The Naturalist’s Miscellany)>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벽지와 판화 시리즈 작품이 일순위였다. “저에게 벽지는 ‘장식’이 아니라 ‘저의 또 다른 마음’이라 생각해요. 기분에 따라 달라지고, 무엇이나 다 볼 수 있고, 어디든지 다 갈 수 있는 마음을 대변하죠. 강력한 패턴 벽지도 삶의 순간과 기억이 담겨 있다면 매일 봐도 질리지 않고 가구가 없어도 허전한 느낌이 안 들어요.”
그래서 그가 클라이언트에게 던지는 첫 질문은 “어떤 집에 살고 있나요?”가 아닌 “어떤 풍경을 좋아하나요?”다. 미팅 첫날 바로 벽지를 선택하는 것도 금지. 천천히 시간을 두고 편안하게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보라고 조언한다. “눈보다 마음이 끌려야 합니다. 벽지는 매일 바라보는 거울과 같거든요.” 그는 벽지 컬러에 맞춰 가구를 선택하는 방식에도 물음표를 남긴다. 오히려 불협화음처럼 다른 스타일의 벽지와 가구가 조화를 이뤘을 때 흥미로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1839년부터 1900년 사이에 지은 빅토리아시대 주택은 영국의 전형적인 하우스 건축물로 꼽힌다. 비대칭 구조, 화려한 우드 장식 지붕, 밤색 벽돌 벽이 특징이다. 이 시기에는 장식적 요소가 환영받는 분위기에 맞추어 목적과 용도에 따라 공간마다 다른 인테리어를 적용했다. 가구와 벽지를 가장 활발하게 활용한 것도 이때다.
벽지로 허전한 벽을 채우기보다 벽지를 예술 작품처럼 활용한다는 생각은 집 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커다란 벽을 벽지 한 장으로 채우지 않고 여러 개의 액자 작품으로 나누어 걸거나 일부를 벽지로, 나머지를 비슷한 컬러의 페인트 또는 타일로 채워 질감의 맛을 더한 점이다. “벽지가 좋은 점은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취향과 일상이 변화함에 따라 계속 덧칠할 수 있으니 조금씩 내 것으로 채우는 과정을 누릴 수도 있고요. 변덕스러운 영국인에게 그만이죠.(하하)”
그는 재차 이 집의 주인공은 벽지가 아니라 가족이라고 했다. 강렬한 벽지와 프린트 작품 때문에 많은 인테리어 잡지에서 섭외 전화가 들어오지만, 이 집의 핵심은 가족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벽지를 고르고 짜임새 있게 공간을 만들면서 담아낸 살가운 온기라는 것. 특히 에이미의 패브릭 컬렉션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여기서도 영국인의 특색이 어김없이 드러났다. 영국인은 누구보다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가족에게도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다. 각자의 의견과 다양성을 최우선으로 인정하는 사회. 그의 속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Styling Tips
벽지 대신 벽지를 잘라 만든 액자 작품을 걸어보자. 액자 틀을 교체하거나 배열을 바꾸는 식으로 계절에 따라 변화를 줄 수도 있다.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곤충 채집 시리즈(Insecta Pattern’ Series)’ 판화가 장식된 2층 게스트룸. 랩처 앤 라이트Rapture And Wright의 클라우드 가든 인 버트 드 그리Cloud Garden in Vert de Gris 헤드보드와 틴스미스Tinsmith의 리넨 베드 컬렉션이 짝을 이룬다.
복잡한 패턴 벽지가 부담스럽다면 벽지로 전체를 마감하기보다 일부 포인트 벽지로 활용하자. 어두운 컬러의 페인트, 가구 컬러로 벽지 주변 공간을 차분하게 정돈하는 것도 좋은 방법. 오른쪽 거실 벽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 이미지를 차용한 ‘오마주 투 메스키타Hommage to Mesquita’ 판화 작품 시리즈가 걸려 있다. 테이블 조명은 오카Oka.
보통 계단 주변이나 현관 복도는 어둡고 좁기 마련이다. 이런 공간에 대담한 장식 벽지나 액자를 걸면 집 안의 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스튜디오 애덤 엘리스의 판화 작품을 모아 놓은 계단. 동식물과 관련한 다양한 추상 작품을 프린트한 후 각기 다른 모양의 액자에 넣어 걸었다.
벽지 대신 페인트 앤 페이퍼 라이브러리Paint&Paper Library의 ‘템플Temple’ 컬러로 마감한 침실. 모든 공간을 벽지로 도배하기보다 이렇게 페인트 벽으로 틈틈이 쉼표를 더하면 벽지의 힘이 더욱 강하게 드러난다. 침실 거울은 이탤리언 프레이밍 컴퍼니Italian Framing Company의 디자이너 리처드 코널리 Richard Connolly가 디자인한 제품, 가구와 러그는 모두 포토벨로 마켓에서 구입한 빈티지 제품.
사진 Bénédicte Drummond | 취재 협조 adamellis.com
- Adam and Amy Ellis 애덤과 에이미의 원더랜드
-
영국인에게 집은 ‘진짜 속마음’이라는 말이 있다. 밖에서 보면 비슷비슷한 건물처럼 보이지만,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사는 이의 감각대로, 열정대로, 편의대로 개보수하고 습관과 동선에 맞게 구조를 바꾸고 확장한 집은 그렇게 주인을 닮으며 한 몸처럼 성장한다. 디자이너 애덤Adam&에이미 엘리스Amy Ellis 부부의 집 또한 문을 열자 밖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던 화려한 아트 벽지와 프린트 작품이 넝쿨처럼 쏟아졌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