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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의 집 조각가 존 배의 집
철이라는 소재에 매료된 존 배 작가. 그의 코네티컷 집을 방문했다. <행복> 1987년 9월호 창간호에 그의 뉴욕 집을 취재한 후 36년만이다.

아름다운 반려의 모범을 보여주는 존 배 작가와 배은숙 여사. 등 뒤로 존 배 작가의 작품(왼쪽)과 김환기 작가가 1967년에 그린 작품(오른쪽)이 나란히 보인다. 김환기 작가의 작품은 1970년 작가가 직접 선물한 것. 그곳에 있는 작품 중 제일 크고 좋은 것을 고르라고 했는데, 너무 황송해서 제일 큰 것이 아닌 이 작품을 선택했다고 한다. 존 배 작가의 작품은 ‘The Vigil’(1986)로 닥터 매슈 킴Dr. Matthew Kim이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에 작가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존 배 작가의 작품, ‘Untitled’(1968).
지난 5월 11일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데뷔 공연이 있던 링컨센터 로비에서 존 배 작가 부부를 만났다. 코네티컷에서 한 시간 30분을 달려온 노부부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순의 부부는 맨하튼에서 좋은 공연이나 전시가 있으면 빠뜨리지 않고 손잡고 나선다고 한다.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며 삶을 편안하게 즐겨서인지 부부의 얼굴이 너무도 평화롭다.

존 배(86세) 작가는 1960년대부터 철을 주재료로 조각 작품을 창작하는 미국의 대표적 현대 조각가다. 오는 10월 작가를 다룬 책 〈JOHN BAI〉가 아트 책 출판으로 유명한 출판사 리졸리Rizzoli에서 출간, 전 세계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존 배 작가의 작품과 배은숙 여사의 남다른 감성으로 꾸민 인테리어와 꽃꽂이로 흡사 갤러리에 들어선 듯한 거실 풍경.
<행복이 가득한 집> 창간호인 1987년 9월호에 존 배 작가의 뉴욕 브루클린 집을 소개했다. 발행인 이영혜 대표가 직접 글을 썼고, 제목은 ‘세계 속의 한국인 가정-뉴욕의 존 배 교수댁’이었다.
열두 살에 부모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존 배 작가는 20대 중반 프랫 인스티튜트의 최연소 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40여 년 동안 교육자, 행정가, 작가로 살면서 뉴욕·파리·서울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탁월한 인사이트로 액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철이라는 소재에 매료되었고, 평생 철과 사랑에 빠져 있다. 철사 조각이 선과 선으로 이어지며 기하학 작품으로 완성되는 그의 작업은 오롯이 혼자 해내는 땀과 열정, 철학과 과학 그리고 영감의 결실이다. 그래서 작품 하나 완성하는 데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작가와 나눈 얘기 중에 ‘작품의 삶’이라는 의미가 사진작가인 필자에게 특히 공감이 갔다.

“작품을 세계 각지의 소장가에게 떠나보내면 마음이 허전해요. 하지만 그런 게 전업 작가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겠지요. 작품에도 작품 나름의 삶이 있어요. 다른 장소 다른 시간에서 삶을 살게 되는….” 


The Great Underestimater(1987)
Here and Now(1986)
Forgotten Rule(1990)
5월 17일 필자는 코네티컷주 페어필드에 있는 그의 집을 두 번째 방문했다. 1990년 구입해 4년여 동안 수리하고 1994년 이사 와서 30년째 살고 있는 집이다. 존 배 작가는 2000년 퇴직한 후 이 집에서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집에 들어서면 아름답고 널찍한 마당에 매료되고, 집 안에 들어서면 독창적 인테리어와 살림 규모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집 구경을 빨리 하고 싶었지만 우선 ‘작가’에 집중했다. 먼저 작품 구상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다.

“구상은 안합니다. 제로에서 시작합니다. 모르는 길을 가다 보면 새롭게 저를 발견합니다. 그 발견을 따라 나아가면 작품이 됩니다.” 



각종 과일과 치즈, 햄, 올리브 등으로 화려하게 디스플레이한 에피타이저. 방문 전 어떤 스타일의 식사를 원하는지 먼저 물어보고는 손님이 원하는 식으로 준비하는 배은숙 여사의 센스는 손님에게 남다른 감명을 준다.
그는 공식 포트폴리오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예술작품을 만드는 것은 혼자만이 거행하는 종교의식과 같다. 침묵의 감각으로 영적 교섭을 하며 그 침묵의 안과 밖에서 나의 길을 찾는다.” 무의식의 여정이라지만 엄청난 시간과 노동, 영혼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예술혼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그래도 뭔가 가장 많은 영감을 주는 것이 있을 것 같았다. 

“저는 바흐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어요.” 역시 존 배 작가의 작품 세계는 바흐의 음악 세계와 공명한다. 철을 이용해 공간의 선율을 그려낸 그의 작품 앞에 서면 바흐의 음악처럼 신성한 기운으로 마음이 경건해지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거실 한쪽에는 피아노가 있고, 수많은 CD와 음악 관련 책이 보인다. 그는 25년째(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 이 집에서 음악회를 열고 있다. 오는 10월에도 유명 피아니스트의 음악회를 열 계획이다.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친 그는 60대에 성악을 배울 정도로 음악 사랑이 남다르다. 

“딸이 배우였어요. 식구들이 모이면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나만 잘 부르지 못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성악 공부를 했지요.” 그는 음악가들과도 교분이 두터워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는 뉴욕에 오면 이 집에서 지낸다고 한다.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 주방. 천장에 매달린 주방기구들, 테이블 위에 첩첩이 쌓인 접시 등등 주방 장식을 위한 디자인인 듯 독특하고 신기롭다. 배은숙 여사는 혼자서 150명 파티도 거뜬히 해내는 수퍼 셰프요 홈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다름없다.
매일 사용하는 된장, 고추장, 국물용 멸치, 다시마, 마른 대추 등 건조한 조미료가 담긴 병들이 안주인의 정성과 감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교통수단이 역마차이던 시절인 1700년대에 지었다는 이 집은 도달하기 쉽게 길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1705년에 부엌만 짓고 살다가 1740년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은 집이다. 그 느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아늑하고 아름다운 집과 스튜디오로 리모델링한 이 집에 들어서면 안주인 배은숙 여사의 남다른 감각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집 안팎이 흡사 박물관이요 문화재 같다. 가구 하나하나도 역사가 담긴 앤틱크로, 소쿠리 등 한국적 정취가 가득한 소품과 멋진 조화를 이룬다. 집 안에 자리 잡은 존 배 작가의 작품 14점은 ‘주인공’이라 뽐내지 않고 그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곳곳에 탐스럽게 자리한 꽃장식은 마치 프로페셔널 플라워 아티스트의 손길이 닿은 것만 같다. 손주들을 위한 방에는 한쪽에 손주들이 어릴 적 입던 옷이 오브제처럼 걸려 있어 방 자체가 테마가 있는 작품과도 같다.

이 집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역시 주방이다. 천장에 매달린 주방 도구, 테이블 위에 첩첩이 쌓인 접시 등은 주방 장식을 위한 디자인인 듯 독특하고 신기롭다. 필자는 평생 이런 부엌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모두가 주방 주인이 즐겨 사용하는 집기다.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중매로 만난 아내 배은숙 여사의 감각은 예술가 그 이상이다. 혼자서 1백50명이 참석하는 파티도 거뜬히 치러내는 슈퍼 쉐프요, 홈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다름없다.


가지각색 유기농 토마토 슬라이스를 멋지게 플레이팅한 접시를 들고 있는 배은숙 여사. 음식 플레이팅과 플라워 데코레이션은 전문가 수준이다.
필자를 위해 마련한 점심 식사는 참으로 경이로웠다. 필자가 방문하기 전 배 여사는 먼저 어떤 음식이 좋으냐고 주문을 받았다. 필자는 한식보다는 이탈리아식이 좋겠다고 답했다. 

커다란 접시에 처음 보는 유기농 토마토, 자주색 야채와 애피타이저 와인, 그리고 랍스터를 발라서 넣은 특별한 스파게티…. 이 모든 것을 금세 뚝딱 차려냈다. 배 여사를 보면 ‘현명한 아내’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배 여사는 존 배 작가가 한창 활동할 시절, 학교와 작업 시간 등 자신의 세계만 몰입하는 남편 때문에 삶이 외로웠다고 한다. 하지만 역발상으로 동반하는 삶의 예술을 만들어냈다. 거꾸로 남편의 세계로 파고든 것이다. 남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 한국어로 어느정도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매니저 역할까지 해내고 있다. 필자와 인터뷰할 때도 영어로 표현하기가 더 쉬운 존 배 작가의 답을 열심히 통역해주었다.


왼쪽부터 배은숙 여사와 존 배 작가, 필자, 뉴욕코리아뮤직파운데이션 김태자 이사장.
커다란 통창을 통해 보이는 푸른 잔디와 나무가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집, 이런 집에서 맛있는 음식과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아내와 함께 사는 존 배 작가의 삶은 지금 너무도 안온해보였다. 차갑고 강한 철에서 따뜻한, 혹은 뜨거운 에너지가 느껴지는 그의 걸작은 어쩌면 바흐도 무의식도 아닌 행복한 가정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지금 피아노가 있는 방, 밖은 조용해서 새소리만 들리고, 방 안에는 바흐의 음악이 흐르고, 존은 책을 읽고…. 인생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며, 이 순간이 참 아름답네요.”


글을 쓴 이은주 작가는 성균관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뉴욕 School of Visual Art와 보스턴 뉴잉글랜드 사진학교에서 수학했다. 제30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사진 부문 대상(1981)을 수상하고, 동아일보사 ‘올해의 예술가 5인’(1982)에 선정. 한국무용 사진전(1983~1989)을 비롯해 <이은주가 만난 108 문화예술인>(프레스센터, 2003), <인연의 향기>(선아트갤러리, 2012) 등 국내 유명 문화 예술인 사진전을 개최했다. 특히 백남준 선생과는 생전에 초상권을 허락할 정도로 각별한 인연을 이어왔고, 유일하게 백남준 선생의 장례식 사진을 촬영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하는 백남준 복원 기념 전시 <다다익선>에 사진작가로 참여중. 최근 40여 년간 촬영해온 필름 자료를 국립 아르코 예술기록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글과 사진 이은주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9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