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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박선영의 누상동 84㎡ 빌라 비어 있음으로 드러나는 집
생활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이 단정한 집에는 갤러리의 서늘한 공기가 흐른다. 점·선·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집 곳곳을 작품 감상하듯 천천히 거닐어본다.

거실과 인접한 방은 꼭 있어야 할 가구 몇 점으로 단출하게 꾸몄다. 수납력이 뛰어난 르네 장 카이유René-Jean Caillette가 디자인한 캐비닛은 오랜 빈티지 가구 애호가인 박선영 씨가 특히 좋아하는 가구. 묵직한 부피감으로 어느 공간에서든 남다른 존재감을 발한다.
거실은 시스템창으로 프레임을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하고, 창 쪽으로는 가구를 두지 않았다. 파란 소파 앞에 서면 동네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지노 사파티 Gino Sarfatti 램프가 놓인 침실.
골목을 굽이 오르고 돌고 또다시 올라 다다른 종로구 누상동의 한 빌라. 이곳은 칼럼니스트 박선영 씨와 남편을 위한 집이다. 동네가 한눈에 담기는 창 밖 풍경 외에는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거실 공간으로 북동향 특유의 부드러운 빛이 스민다. 그제야 새하얀 벽의 주인공처럼 서 있는 가구와 그림이 보인다. “오전 시간은 대개 명상하듯 고요하게 보내요. 자연스럽게 이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그 시간이 아주 좋아요. 우측으로는 인왕산 자락이 완만하게 흐르고, 좌측은 북악산이 펼쳐지죠. 이상하게 매일 봐도 전혀 질리지 않아요. 어제보다 무성하고 짙어진 초록이 보이네요. 하루하루가 다르고, 아침과 오후가 또 다르죠. 이 집은 풍경이 다했다고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박선영 씨는 오래도록 서촌을 좋아했다. 구체적인 이사 계획을 세우고는 2년이 더 걸려 이 집을 만났다. 결혼 후에는 줄곧 아파트였지만, 유년 시절에는 마당 있는 2층 주택에 살았다. 사춘기 때 틀어박히기 좋아하던 다락방, 불꽃놀이를 구경하던 옥상, 마당에 피어나던 장미와 목련. 이런 선명한 기억 덕분인지 자연을 가까이 들이는 집을 선망해왔는데 산을 품은 이 집 전망이 마음에 쏙 들었다. 집을 레노베이션해 고친 지 이제 한 달 남짓. 현관 앞 욕실 진입부에 가벽을 세워 수납장을 제작해 복도식 구조를 만든 것 외에는 특별히 바꾼 부분은 없다. 복도에서 오른쪽은 주방·침실·드레스룸의 프라이빗한 공간이, 왼쪽으로는 전면 창이 있는 거실과 큰방이 자리한다.


현관 왼쪽에 가벽을 세워 수납장을 짜 넣은 덕분에 복도형 구조가 만들어졌다.
화이트와 스테인리스 소재로 꾸민 최소한의 화장실.
선과 면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도화지 같은 실내 공간은 흡사 갤러리에 있는 듯한 공간감이 느껴진다. 형광등과 바 형태의 스테인리스 조명을 나란히 배치한 점이 눈길을 끈다.
“거실에서 손님과 차를 마시다가, 분위기를 바꿔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며 이 방을 라운지로 만들었어요. 폴 매코브Paul McCobb의 큰 책상이 있어서 홈 오피스로도 유용하고, 작은 게스트 화장실도 딸려 있어요. 아직 이 공간에 어울리는 라운지체어를 찾지 못했는데, 그게 즐거운 숙제이기도 해요.”

84㎡의 평범하고 오래된 빌라를 지금 모습으로 바꾸는 데는 샤우스튜디오(@shawoostudio) 박창욱 소장의 공이 컸다. 유리공예 작가의 작품으로 작은 창을 낸 부엌문, 언뜻 보면 조형 작품처럼 보이는 주방 후드, 공간 속에 감쪽같이 숨은 벽 같은 가구는 물론, 각종 손잡이와 비디오 폰 같은 집기를 모두 커스텀 제작했다. 레노베이션의 모든 원칙은 원래 것을 최대한 살리는 것. 벽을 치는 대신 최대한 콘크리트 벽을 살려 면을 다듬고 그 안에 전선을 넣는 방법으로 새하얗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지금의 미감이 완성되었다.


상부장을 없앤 일자형 주방 공간에는 오직 이 공간을 위한 후드를 제작해 달았다. 유리편집 김은주 작가(@yuri_edit)에게 의뢰해 다용도실 문의 창을 낸 것은 박창욱 소장의 아이디어.
도화지처럼 희고 말간 공간
이사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라지만 짐 정리가 덜 되었나 싶을 정도로 짐이 없다. 우선 빛을 가릴 블라인드나 커튼, 등을 받쳐줄 쿠션이 없다. 가족을 모이게 한다는 식탁 위로 늘어뜨린 펜던트 조명도 없다. 나란히 줄을 맞춘 형광등, 밤새 읽다 아무렇게나 덮어둔 책 한 권 놓이지 않을 것 같은 단정한 책상, 생활 가전을 완전히 숨긴 희고 말간 주방. 그러고 보니 생활감이 없다.

“과거 유럽은 벽에 태피스트리나 그림, 거울 등을 꽉 채워 권위나 부를 드러냈다고 해요. 그러다 20세기 모던 시대로 들어서면서 벽을 비워 지성을 표현하게 되었지요. 어떤 사람은 빈 벽을 보면 무언가로 채우고 싶어 불안해진다지만 저는 이 집을 레노베이션하면서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비울 것인가를 내내 생각했어요.”


그림 한 점만 오롯이 걸어둔 최소한의 침실.
거실과 연결된 방은 특정한 기능이 없는 라운지로 계획했다. 방 사이의 문을 없애고 슬라이딩 도어로 문을 숨겨 공간과 공간은 유연하게 연결된다.
색과 스타일이 아닌 시대적 양식에 대한 끌림으로 한 점씩 들인 빈티지 가구. 지금은 그마저도 에센스만 남았다. 박선영 씨는 여전히 무엇을 더 빼야 하나 골몰하고 있다. 역설적이지만 비어 있음으로 드러나는 집. 건축·예술·문화·디자인을 개인적 관점에서 해석해온 그에게 지금 당신의 집에 어떤 이름을 붙이면 좋겠냐고 물었다.

“이 집에 어떤 이름을 부여한다면 ‘중성적(neutral)’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치우치지 않는 무덤덤한 톤이랄까요. 지금은 1950~1970년대의 직선이 강조된 빈티지 가구가 주를 이루지만, 언젠가는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양식이라 일컫는 유겐트슈틸Jugendstil(아르누보의 독일식 명칭)도 적용해보고 싶어요. 요제프 호프만이나 오토 바그너의 보다 장식적이고 유려한 의자가 이 곳에 놓이는 상상을 해보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중성적 팔레트’로서 지금의 콘셉트를 오래 유지하고 싶어요.”

작년 12월 첫 단행본 <독일 미감>(모요사)을 출간한 박선영씨는 요즘 빈티지 가구에 관한 강의 준비에 한창이다. 앞으로는 이 집을 통해 할 수 있는 재미난 기획도 함께 구상할 예정. 7월에는 늘 궁금하던 이탈리아 북부로 여행을 떠난다. 늘 그래왔듯 마음이 끌리는 대로 발길을 옮길 예정이다. 볼로냐, 비첸차, 만토바, 베로나…. 그가 다시 긴 여행을 통해 길어 올릴 귀한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영혼까지 바닥난 기분이 들면 미술관이나 갤러리로 달려가곤 했다. 간결한 하얀 벽, 공공장소가 주는 안정감,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시공간. 그렇게 어느 예술가가 풀어놓은 세계를 가만히 응시하면 머릿속을 부유하던 상념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 도화지 같은 하얀 집에서 갤러리의 그 서늘한 공기가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늘 그와 물 흐르듯 나눈 대화를 곱씹으며 오랜만에 맑아진 눈과 마음으로 서촌을 걸었다.


행복교실
박선영 작가의 빈티지 여정과 독일 가구 디자인
박선영 작가의 빈티지 아이템과 컬렉션 노하우, 바우하우스 출범 전후로 살펴보는 독일 가구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대해 알아봅니다(마르셀 브로이어, 빌헬름 바겐펠트, 디터 람스, 에곤 아이에르만 등).

일시 2023년 7월 4일(화) 오후 6시
장소 장충동 디자인하우스 갤러리 모이소
신청하러 가기 https://www.designhouse.co.kr/classtour/view/959

글 성정아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23년 6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