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고 닫힌 공간 구획이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갑. 그 위에 간결한 붓걸이를 걸어 리듬감을 주었다.
여기저기 사랑방에서 흘러나온 가구들이 최순우 선생의 옛 사랑방에 모였다. 흥선대원군이 쓴 글씨 아래에 서안과 연상을 나란히 놓고, 양쪽 벽에는 낮은 문갑과 붓걸이·고비를 짝지어놓았다. 실크 보료는 김종학 화백이 고른 배색으로 염색한 것이다.
김종학 화백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작가 생활을 시작할 즈음 스승인 유광열 교수를 통해 최순우 선생을 처음 만났다. 그 후 196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순우 선생이 주관한 전시 <조선문방목공예전>이 열렸는데, 김종학 화백은 이 전시에서 사방탁자를 보고 조선 목가구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이를 계기로 화백은 목가구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도자기나 그림에 비해 목가구는 관심을 덜 받았기에 가난한 젊은 예술가가 수집하는 데 적당한 대상이었다. 목가구 같은 민속품을 높이 평가한 최순우 선생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 되면서 바로 민속품 전시를 기획했고, 이 전시에 화백은 수집품 대여섯 점을 출품했다. 목가구로 시작한 화백의 수집은 이후 조각보와 베갯모 같은 수예품, 전통 복식, 농기구, 석물 등 우리 조상의 삶 속에 깃든 거의 모든 물건으로 확장되었다. 이 어마어마한 수집품을 늘 곁에서 쓸고 닦으며 때로는 애정 어린 대화를 나누는 이는 화백의 큰딸이자 문화 콘텐츠 컨설턴트로 일하는 김현주 씨다. 최순우 선생과의 인연이 아버지의 수집 역사에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이번 전시를 기획하고, 아버지의 수집품 중 각 방에 맞춤한 수작을 선별해 방치레를 갈무리했다.
안방에는 사방탁자와 의걸이장을 놓았다. 최순우 선생은 사방탁자를 포함한 “조선 탁자류의 공간미는 거의 세계에서 독보적인 조형”이고 “그 비례의 아름다움에서 풍기는 미의 질서는 거의 실내 전반의 조형미를 주름잡는다”고 썼다. 사방탁자에 진열하는 소품들은 방 주인의 품격을 말해준다.
담담한 수묵화 같은 사랑방 가구
최순우 선생은 1976년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사랑방 처마 아래에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 즉 ‘문을 닫으면 이곳이 바로 깊은 산중이다’라는 뜻을 지닌 글씨를 직접 써서 걸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색에 잠기던 심산深山과 같은 사랑방을 그대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옛 선비들이 이상으로 삼은 사랑방은 ‘한 점 속기가 없는’ 공간이다. 사랑방 가구는 이에 걸맞게 군더더기 없이 소박하면서 실용에는 더없이 성실하다. 방 주인이 필요와 취향에 따라 디자인해서 목수에게 맞춤 제작한 것이라 크기부터 세세한 장식까지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 사랑방에서 흘러나와 김종학 화백의 눈에 들고 마음에 든 옛 목가구들. 그중에서도 첫손에 꼽는 것이 최순우 선생의 ‘심산’에 모였다. 책 한두 권 펴놓기에 족한 서안과 먹·벼루·연적 등을 담아두는 연상, 조촐한 장석을 단문갑 한 쌍, 그리고 사랑방과 이어지는 안방에는 최고의 비례미가 특징인 사방탁자와 서탁이 자리한다. 이 전시를 위해 새로 들인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자리에 있는 것인 듯 자연스러운 이 가구들의 조화를 김현주 씨는 ‘교향곡’에 비유한다. 낮은 가구 위 빈 벽에 건 붓걸이와 고비는 그의 표현에 따르면, 공간에 ‘비트’를 더하는 화룡점정이다. “규방 가구에 비해 수수하고 색도 절제된 사랑방 가구에는 의외의 위트가 담겨 있습니다. 이건 질박한 함처럼 보이는데 남성용 경대이고, 연상 뚜껑을 열면 그 안에 거울이 숨어 있어요. 이 문갑은 몇 번째 칸을 먼저 열어야 나머지를 열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습니다.” 이는 가구를 겉만 감상해서는 절대 알 수 없고,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발견하게 되는 묘미다. 엄격한 줄만 알고 있던 선비 문화에 숨어 있는 여유와 유머가 허를 찌른다.
몇 번째 칸을 먼저 열어야 나머지를 열 수 있는 문갑과 김종학 화백의 겨울 그림. 이번 전시에서는 화백의 그림 중 조선 목가구와 어울리는, 선과 색이 절제된 그림을 걸었다.
건넌방에 놓은 삼층장. 장식이 화려해 규방 가구로 보이지만, 각 층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남성용 가구로 추측한다.
겹겹이 쌓인 한지의 농담, 그 자체가 예술
조선 목가구는 면과 선의 비례와 분할에서 뛰어난 조형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실용적 가구를 넘어 미니멀한 조각품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방탁자가 미니멀한 조각품으로는 대표 격인데, 지장 역시 이에 못지않다. “지장은 가난한 선비들이 사용하던 가구로, 좋은 목재로 짓지 못했어요. 잡목으로 만든 프레임에 종이를 겹겹이 붙여나갔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 집적된 한지의 색과 질감은 독보적인 미감을 지닙니다.” 한지에 은근히 비치는 격자 프레임과 가구를 장식하는 장석은 지장 고유의 조형성을 완성해준다. 최순우 옛집의 대청에는 형태가 다른 지장 두 점을 전시한다. 대청 밖에서 볼 때 정면에서 잘 보이도록 두 지장은 거리를 두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이렇게 방 밖에서 문을 통해 볼 때 가장 잘 감상할 수 있는 자리에 가구를 배치했다. 가구와 적당한 거리를 두면 가까이에서는 놓치기 쉬운 전체 형태와 다리의 뛰어난 디테일까지 살펴볼 수 있다. 각 지장 앞에는 새하얀 다듬잇돌과 목안이 한 쌍씩 놓여있다. 다듬잇돌의 매끈한 윗부분과 달리 불룩하게 배부른 아랫부분과 동네의 솜씨 좋은 어르신이 깎은 제각기 다른 목안에도 눈길 한번 주기를, 기획자는 바란다.
이번 전시를 위해 마련한 베갯모 콜라주. 도발적인 색 조합과 자수 문양이 황홀하다. 그러면서 약간의 촌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우리 베갯모의 매력이라고, 김현주 씨는 말한다.
대청 문밖에서 볼 수 있도록 배치한 지장(책장). 면과 선의 비례미가 사방탁자 못지않다. 그 앞에는 다듬잇돌과 목안을 한 쌍씩 놓았다.
문갑 위에 전시한 김종학 화백의 겨울 그림.
도발적인 베갯모 콜라주
바깥채 방에는 문갑 위에 베갯모 수십 개를 콜라주해놓았다. 형태와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비슷하지만 디테일에서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억눌린 규방 여인들의 욕망과 감각이 손바닥만 한 화폭에서 폭발한다. 전시를 위해 이 멋진 ‘평면 작품’을 완성한 이는 김현주 씨다. 수많은 베개 수집품 중 색 배합이나 자수 솜씨가 뛰어난 것은 남겨놓고 나머지는 베갯모만 분리해 그 색채와 문양의 향연을 즐길 수 있게 준비한 것이다. 김종학 화백은 여러 인터뷰에서 수집품이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조선 목가구에서는 비례감, 조형성, 여백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이런 자수품에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황홀한 색감을 얻었을 것이다. 김종학 화백의 수집품이 한옥에 전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간의 현대적 갤러리에서는 기물 본연의 조형성을 부각했다면, 이번에는 한옥과의 교향交響에 집중했다. 게다가 이 한옥은 화백에게 수집의 영감을 제공한 최순우 선생의 옛집이다. 김홍남 혜곡최순우기념관 관장은 이번 특별전을 마련하며 “김종학의 작품에서 보이는 우리 전통문화의 현대적 지속성은 아마 작가가 그의 수집품들, 그리고 그들을 만든 조선 장인들과 평생 이어온 속 깊은 대화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평생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다간 혜곡 최순우와 김종학의 특별한 미학적 교감과 그 창조적 파장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혜곡 최순우 선생은···
평생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국내외에 알리고자 애썼다. 특히 박물관인으로 살며 전시, 유물 수집·보존 처리, 조사, 연구, 교육과 인재 양성에 애정을 쏟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제4대 관장을 지냈고 우리 문화에 관한 글 6백 편을 남겼다. 이를 엮은 <최순우 전집>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등이 발간됐다.
사진제공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전시 안내
기간 11월 16일까지(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4시) 전시 해설 프로그램은 매주 수·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2시
문의 02-3675-3401~2, www.choisunu.com
전시 도슨트
김종학 화백의 큰딸이자 콘텐츠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김현주 씨가 <행복> 독자를 위해 전시 해설을 진행합니다.
일시 10월 4일(금) 오전 10시 30분
장소 최순우 옛집
참가비 2만 원(정기 구독자 1만 5천 원)
인원 10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또는 전화 02-2262-7222로 신청하세요.
- <김종학 화백 수집가구전-혜곡의 영감>展 최순우 옛집을 채운 조선 목가구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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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화백은 1960년대 중반부터 조선시대 목가구와 민예품을 수집해왔다. 우리 전통 공예품에 대한 화백의 관심과 애정은 실로 대단해서 수십 년간 집적된 수집품의 폭 역시 깊고 넓다. 화백의 수집품은 이미 여러 전시를 통해 공개되었으나 이번 최순우 옛집 전시는 여러 면에서 좀 더 특별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10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