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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가 곽경화∙최홍선 지극함에 대하여
삶의 진정성과 지극한 마음으로 미적 가치를 수행하는 도예가 곽경화·최홍선을 만났다. 작업은 머리, 혹은 정보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온몸’으로 하는 것. 정신과 마음까지 포함된 ‘몸’만이 손쉬운 일을 진중하게 처리하고 어려운 일을 놀이하듯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도예가 곽경화·최홍선의 따로 또 함께하는 작업실. 경기도 일산 끝자락의 컨테이너를 개 조한 작업 공간은 그들이 집보다 더 오랜 시간 머무는 곳이다. 높은 층고의 장점을 살려 복층 메자닌 구조로 구성, 가운데 리빙룸을 중심으로 왼쪽 2층은 곽경화 작가의 작품이, 오른쪽 2층은 최홍선 작가의 작품이 놓여 있다. 정면의 설치 작품은 곽경화 작가의 ‘Let it flow’ 시리즈로 모두의 바다를 표현했다.
작업실에는 여러 유형이 있다. 복작복작 모여 일하는 작업실, 등을 지고 제각각 일하는 작업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작업실 혹은 모두가 공유하는 작업실. 도예가 곽경화·최홍선의 작업실은 이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 도자 작가로 활동하는 이들은 집도 작업실도 함께 쓰는 부부 사이다. 하지만 ‘부부 도예가’라는 수식이 썩 달갑지만은 않다. “회화나 다른 예술 장르는 부부 작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없는데, 유독 도자 분야는 ‘부부 도예가’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해요. 작가로서 작업 방향이 다르기도 하고, 최홍선씨도 저도 워낙 독립적인 성격이라 작업도 라이프스타일도 ‘따로 또 함께’라는 표현이 적합하죠.”

일산 끝자락 한적한 주택가. 4년 전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두 사람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작업실 문을 열면 논밭이 펼쳐졌다며 달라진 풍경을 아쉬워한다. 컨테이너를 개조한 작업실은 가운데 리빙룸을 중심으로 지붕 양 날개 쪽을 메자닌 구조의 복층으로 구성했다. 위층은 두 사람의 작품을 각각 전시했고, 아래층은 작업 과정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용도별로 공간을 분리했다. 작업실은 전체적으로 무언가를 더하거나 꾸미려 하지 않았다. 테이블과 작업대, 싱크대와 수납장 등 공간을 채우는 가구는 미감보다는 사용감이 돋보인다. 으레 갖춰야 하는 가구나 연출을 위한 소품도 없다. 실제로 쓸모를 다하는 지극히 사사로운 물건이기 때문에 더욱 자연스러운 멋이 있다. 재료와 작업 도구, 작품이 혼재된 공간인 만큼 자칫 복잡해 보일 수 있는데, 그리드를 맞추듯 네모반듯하게 정리한 책상과 선반장은 들여다볼수록 정갈하다.

“흙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말이 있어요. 흙은 매 순간 움직이는 작가의 손놀림과 작은 흔적까지 잊지 않고 뜨거운 가마의 열기 속에서 소홀함을 기어이 고발해버리고 말죠. 그런 면에서 도예만큼 그 과정이 치열하게 기록되는 예술 분야가 또 있을까요? 따스함과 간결함이 느껴지는 이미지가 나올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또 매우 예민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어요. 이러한 과정만이 밀도 있는 작업을 가능하게 하지요.” 자신의 작업이 단순한 침묵 형태가 아니라 동사적 감각, 즉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길 기대한다는 최홍선 작가는 그 말을 증명하듯 온종일 바지런히 움직였다(평소와 같이!). 작은 체구에서 분출되는 에너지는 작업대 위에 우뚝 솟은 그의 신작 ‘산’과 오버랩됐고, 자연스레 작업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졌다.

리빙룸과 작업실 사이의 가벽에 가로로 긴 파노라마 창을 구성해 틈새로 공간을 들여다보는 묘미를 살렸다. 가벽 안쪽 창틀에 최홍선 작가가 모으는 피겨를 장식했다.

2층 곽경화 작가의 공간에서 바라본 작업실 풍경. 낮은 책장 너머로 최홍선 작가의 '것' '호흡' 시리즈가 전시되었다.

오후의 티타임. 작업실을 찾은 많은 사람과 군고구마와 따뜻한 차, 와인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산을 들고 바다를 지나온 사람
“제가 상상하는 산의 이미지는 우뚝 솟아 있는 강인함이죠. 온화하고 따뜻하기보다 강렬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산을 표현하기 위해 날렵한 선의 형태를 살렸어요.” 최홍선 작가는 초창기에는 손맛 나는 둥근 합과 같은 전통 작업을 해왔다. 묵직한 덩어리, 형태감에 대한 관심은 세상 모든 사물로 이어져 간결한 특징만 살린 ‘것(오브젝트)’을 빚어냈고, 우리 고전 읽기에 빠져 전통 기물의 부피감있는 형태를 평면으로 옮기는 ‘기형도’ 작업도 진행했다.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두루뭉술한 덩어리에 구멍을 뚫어 숨결을 부여하는 ‘호흡’ 시리즈는 작가 자신에게도 수행 같은 작업이다.

“10년 전쯤 곽경화 씨랑 길게 유럽을 다녀왔는데, 독일의 블랙 포레스트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숲에 적막강산 두 사람 발소리만 들리는데, 신비롭게도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몽실몽실 둥근 형태의 ‘호흡’ 시리즈는 그렇게 탄생했죠.” 숲길을 지나 시선을 옮기니 바다가 펼쳐진다. 곽경화 작가의 설치 작업 ‘Let it flow’ 시리즈다. 곽경화 작가는 형태보다 색이나 드로잉이 드러나는 설치 작업을 한다. 작업실 전면 벽 가득 놓인 수백 개의 도자 잔은 하나하나 잔잔한 물결을 구현한 것. 컵 표면에 물의 흐름을 그려나가는 방식으로 전체가 모였을 때는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베니스의 바다, 지중해 바다, 동해 바다…. 초창기에는 바다마다 텍스트 설명을 붙였다. 그런데 관객 역시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바다를 찾고, 바다가 품은 근원적 에너지에서 각자의 영감과 힐링을 얻는 모습을 보며 의미 부여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2017년 5월 갤러리 우물에서 열린 개인전 의 한글 제목 ‘그냥 흐르게 하세요’는 이런 깨달음, ‘순리’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첫 전시 때 일화가 있어요. 욕심은 나고 의욕이 앞서니 잠도 안 자고 정말 열심히 작업했어요. 불이 그런 욕심을 알았나 봐요. 두 가마가 다 깨져서 나오는 거예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작업해서 아슬아슬 완성하긴 했는데, 그냥 평범한 하얀 단상이 싫어 쇠꼬챙이에 용접을 해서 작품을 올렸어요. 저 또한 내려두는 용기, 흘러가는 대로 하라는 순리를 깨닫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죠. 하지만 남들이 안하는 걸 하겠다는 생각은 여전해요.”

“물을 컵에 담아본다. 물 높이를 달리해 자연스럽게 물의 흐름을 그려나간다. 그러다 보면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흘러 바다에 도달하는 여정처럼, 그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가 펼쳐진다. 그 바다를 한 모금 들이마시면 푸르름이 폐 속까지 스며든다 .” _곽경화

흙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독립적인 두 사람도 생각이 일치하는 지점이 있으니, 바로 전업 작가로서 지난한 삶을 견디겠다는 의지다. 최홍선 작가는 장 그르니에의 에세이 ‘일상적인 삶’ 중 “내가 즐겨 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은 숲처럼 원을 그린다. 그래서 그것은 평원에도 도시에도 이르지 않는다. 마치 끝없는 길 같아서 모든 곳을 통과하지만 아무 데도 닿지 않는다. 그 길을 나는 일생 동안 걸어갈 것 같다”는 구절을 인용해 도예가의 수행 같은 지극한 작업에 대해 설명했다. 평생 생활 자기를 만들지 않았고, 여전히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는 어쩌면 제도 교육이 아닌 직접경험으로 지식을 터득한, 스스로 비주류라는 의식이 만든 소신일 수 있다. 곽경화 작가는 미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분야를 전공하고 뒤늦게 도자를 배우기 시작했다. 공예나 디자인을 전공한 친구가 많아 자연스레 영향을 받았다는 그는 최홍선 작가를 만나면서 우연히 첫 전시를 하고, 역사적 도자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제 작업실 가마가 고장 나서 최홍선 씨 작업실 가마를 빌려 쓴 적이 있어요. 마침 최홍선 씨 작업실에 들른 큐레이터가 제 작업을 보고 미팅을 하자고 연락이 왔죠. 선후배 쟁쟁한 도예과를 나오지도 않았고, 전시 경험도 없던 제가 운 좋게 첫 개인전을 치렀어요. 그리고 1999년 우리나라에 도자 엑스포를 유치하면서 엑스포를 홍보하기 위해 큰 공모전이 열렸는데, 최홍선 씨가 제 작품을 가져다 출품한 거예요. 국내 미술 공모전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1인 심사제였는데 분청에 드로잉을 그려 넣은 제 그릇이 대상을 탔어요. 관례를 뒤엎은 일이었죠.”

촬영팀을 위해 뚝딱 만든 쿠스쿠스와 삶은 토마토 샐러드. 최홍선 작가가 전시 소품으로 만든 백자 볼은 일상과 예술이 만났을 때의 아름다운 시너지를 느끼게 한다.

도예만큼 과정이 치열하게 기록되는 예술이 또 있을까? 최홍선 작가는 규모가 큰 설치 작업을 할 때는 바닥에 앉아 반죽을 치고 형태를 다듬는다. 지극한 마음을 지니고 수행에 가까운 작업을 하면서, 어떤 작업이 되면 좋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적당히 자학도 집착도 하면서 그 과정을 즐긴다.
수상 기념전으로 개최한 두 번째 개인전 <컨버세이션>은 그릇을 받친 손 설치 작업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즈음 신분증을 만들 일이 있어서 동사무소에 갔는데 지문이 안 찍히더라는 것. 거친 흙을 많이 써서 지문이 다 닳아 없어진 손을 바라보며 다른 작업보다도 자신의 손을 빚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주류가 대상을 거머쥐고 돈 벌 걱정 없이 작업에만 매진 하는 그를 시샘하는 이도 적지 않을 터. 하지만 조금의 시간도 허투로 보내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지문이 닳아 없어진 손까지 작업으로 승화하며 그 모든 여정을 도예가의 자양분으로 돌린 건 분명 운으로 단정할 수 없는 노력이고 실력이다. “수상 후 비슷한 작업이 있냐고 숱하게 연락이 왔지만 모두 거절했어요. 1년간 작업해도 안 되는 양이더라고요. 당시 컵 하나를 만들기 위해 판, 물레, 핀칭, 두들김 등의 공정을 모두 거치는 비효율적 작업을 했으니까요. 전공자라면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작업 방식이죠. 당시에는 엄두가 나지 않아 피한 것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작업을 연장하지 않고 바로 다른 작업을 시작한 것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 같아요. 몇 개만 만들면 금방 질려서 같은 작업을 못 하는데, 어떻게 생활 자기를 만들겠어요. 제가 쓰는 그릇을 보고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해도 한 번도 만들어준적이 없어요. 이 못된 성격 때문에요!”

“도자 작업은 어떠한 이미지를 구현하는 데 바로 반응하는 양식이 아니라 정서적 감응력을 바탕으로 무한 반복하는 성찰의 회로다. 따라서 도예가에 열정적 작가라는 의미는 역설적으로 자기 내면을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내려 그 깊이에 활성을 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_최홍선

따로 또 함께
작업실 한가운데는 리빙 테이블이 자리한다. 평소 두 사람이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이 테이블은 갤러리와 미팅하는 테이블이, 많은 동료 작가와 교류하는 파티 테이블이 되기도 한다. 불을 다루기 때문일까? 도예가 중에는 유독 미식가와 요리 실력가가 많다는 정설은 이번 취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삶은 문어와 쪽파, 두릅과 미소 소스, 블랙올리브를 갈아 올린 아스파라거스구이, 쿠스쿠스, 껍질 벗긴 삶은 토마토 샐러드, 냉이모시조개 파스타, 바질 페스토를 가미한 딸기 디저트까지…. 제철 재료에 좋은 소금과 기름, 조선간장만 있으면 특별히 양념을 안 해도 맛있는 상차림이 완성된다. 긴 오브제가 필요해서 만든 굽접시는 어떤 음식을 담아도 근사한 요리로 만들어준다. 단지 굽 역할을 하는 뒷면에 문양을 새겨 넣고, 칸을 나눠 앞뒤로 사용할 수 있는 디테일까지!

“부엌도 작고 평소 요리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지 않으려다 보니 주로 이렇게 일품요리를 먹어요. 손님들이 와도 쉽게 차릴 수 있어 부담도 덜하고요. 와인을 나누어 먹으며 작업 이야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게 저 위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이렇게 일상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만들려는 노력이 필요해요.” 전시를 한다는 것은 자신과 타자가 마주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다른 사람을 향하는 동시에 내 자신에게 다가가는 서로를 탐색하는 ‘의미 있는 여행’. 이 여행은 누군가와 함께할 때 그 의미가 커지는데, 그래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 과 함께 느끼는 친밀한 소통이 중요하다. 두 사람이 많은 사람과 소통하고 교류를 즐기는 이유다. 그리고 이는 비단 작가와 관객을 너머 일상에서 관계 맺기, 우리의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곽경화 작가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드로잉 북.

압도적 공간감을 느낄 수 있는 작업실. 곽경화 작가가 벽면에 작품을 설치하고 있다. 밑그림으로 바다를 그린 뒤 그 위에 막대 형태의 도자 조각을 약간의 틈을 두고 연속으로 달면 수평선이 이중으로 겹쳐져 입체적 바다가 완성된다.

묵직한 덩어리에 구멍을 뚫은 백자 오브제는 최홍선 작가 작품. 곽 작가의 초록 연필을 꽃으니 그 자체도 또 하나의 작품이 된다.

완연한 봄을 맞아 커튼도 걷고 작업실 문을 활짝 열었다.
두 사람은 각자 일하다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자연스레 리빙룸에 모인다. 장작 난로에서 구운 고구마에 차를 곁들이는 오후의 휴식 시간은 아무리 쓴소리가 오갈지라도 달콤하다. “전시를 열면 주변에서는 좋은 말만 해주잖아요. 언제나 나를 지지하되, 때론 곧은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이 커요. 작가는 아무래도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길게 마련인데, 이렇게 고민을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소가 될 때가 있죠. 저희 역시 여느 전업 작가와 마찬가지로 생활은 늘 애쓰면서, 견디면서 살아요. 느닷없이 다른 일을 해서도 안 되고 할 줄도 모르죠. 그런데도 아직 아내에게 한 번도 잔소리를 들은 적이 없으니 이 또한 축복이겠죠.”

부부여도 결국은 혼자의 삶이라고, 어떤 작업이든 외롭고 힘들어도 기꺼이 견디겠다고, 평생 어린아이처럼 살고 싶어서 2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는 두 사람은 어린 왕자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여전히 꿈꾸듯 이상점을 향하고 있다. 근사함의 앞에는 근사함의 계보가 있다. 그래서 취재를 하면서 근사한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이 영향을 받는 이가 누군지, 근사함의 계보를 꼭 물어본다. 두 사람에게는 굳이 질문하지 않았다. ‘곽경화 씨’ ‘최홍선 씨’라는 답을 이미 들었으니까.


오픈 스튜디오
담백한 맛과 멋을 품은 곽경화·최홍선 작가의 작업 공간에 독자 분들을 초대합니다.
일시 5월 24일(금) 오후 2시
장소 경기도 일산
참가비 1만 원(정기 구독자), 2만 원(비구독자)
인원 8명
신청 방법 <행복> 홈페이지 ‘이벤트’ 코너에 참가하고 싶은 이유를 간단히 적어 신청해 주세요.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9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