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궁둥근린공원 아래 나지막이 위치한 주택가. 1급 주택 지구로 상업 시설이 못 들어오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26년간 어머니가 가꿔온 2층 주택에 푸드 스타일리스트 메이가 둥지를 틀었다. 툇마루를 새로 만들고 지난여름 더위에 타버린 정원도 손봤다.
안방 벽을 허물고 경계선을 없애 더욱 넓어진 개방형 주방. 조명은 루이스 폴센의 PH5.
원래 안방이 있던 자리를 터서 널찍한 거실을 만들었다. 나무 창호는 26년 전 어머니가 만든 것을 다시 달았다.
윤현상재에서 구입한 타일을 부착한 1층 화장실. 세면대는 화이트 오크 재질로 공사 현장에서 제작, 오일 스테인으로 마감했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오른편의 다락방. 평소 즐기는 요리 만화책을 보거나 개인 다실로 쓴다. 조명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센터에서 구입한 블루밍 빌레의 펜델 램프.
2000년대 초, 미국에 사는 동안 생소하던 전 세계의 다양한 식재료와 요리를 경험했고, 이를 소개하는 사이트 출출닷컴을 오픈했던 푸드 스타일리스트 메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실용적이면서 세련된 요리 콘텐츠를 소개하며 <행복>을 비롯한 잡지와 방송 등 각종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메이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는 넷째 이모 최병랑 씨와 가족들이 함께한 동지팥죽 파티를 <행복>에 소개하기도 했다. “홍천에 집을 지은 넷째 이모와 파리에서 건축디자인을 공부한 막내 이모, 상명대학교 사진학과 교수인 외삼촌 등 다재다능한 외가 쪽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외할머니부터 다섯 이모와 어머니 모두 손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고요.” 메이가 20대 후반을 보낸 연희동의 주택은 1973년에 지은 전형적인 양옥집으로, 1995년에 가족이 이사하면서 어머니가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 “야외 연못을 만들고 나무 창호와 미닫이문을 달았어요. 소나무의 한 종류인 홍송으로 서까래를 만들어 동양적 분위기의 주택으로 개조하셨지요.”
엄마의 오랜 주택에 대해 고민하다
2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딸은 출가했고, 재작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남은 어머니 최병령 씨는 막내딸에게 작업실 겸 살림집으로 이 집을 사용해볼 것을 제안했다. 2층 구조로 주거 공간을 분리할 수 있고, 1층은 천장이 높아 작업실로 쓰기에도 제격인 공간이다. “연희동 궁둥근린공원 아래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어요. 머무는 것 자체가 힐링이 되는 곳이죠. 26년간 꾸준히 손보기는 했지만, 집이 하도 오래되다 보니 대대적인 수리를 해야 할 시점이었고요.” 그렇게 어머니의 세월이 쌓인 집을 매만져줄 전문가를 물색하다가 집 곳곳에 배어 있는 어머니의 흔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본인이 직접 리모델링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가꿔온 집이라 제가 직접 꾸미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1백 년, 2백 년이 흘러도 어머니와 저의 이야기가 제 아들 지원이를 비롯한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요.”
가장 먼저 아침에는 해가 쨍하게 들지만 밤에는 추운 동향집의 난 방을 보완하기로 했다. 보일러를 교체했고, 기존의 벽과 바닥을 뜯어내 새로운 난방재를 시공했다. 그리고 메이가 총괄 작업반장으로 바닥, 벽지, 타일 전문가들을 진두지휘하며 한시도 현장을 떠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싹 뜯어버리고 죄다 새로운 것으로 채웠다면 공사가 훨씬 더 수월했을 거예요. 시간과 비용도 적게 들고요. 하지만 어머니가 사용하던 나무 창호, 미닫이문, 서까래, 나무 계단 등을 꼭 지키고 싶었지요. 특히 미닫이문이 그래요.” 매년 새 창호지를 발라가며 관리해온 어머니의 노고가 밴 미닫이문. 오래되다 보니 아귀가 안 맞는 문을 떼어내 대패로 문질러 다듬고 다시 달았다. 그중 한 곳인 식탁 옆 다실은 평소 차를 즐기고 차 수업을 하는 메이에게 꼭 필요한 공간. 벽은 기계 조색이 아닌, 현장에서 마음에 드는 색을 일일이 맞춰가며 만든 겨자색 페인트로 칠했다. 바닥에는 한지를 깔고 총 일곱 번에 걸쳐 콩기름을 먹여 장판지를 완성했다.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조선시대의 혼례상과 반닫이를 뒀어요. 한국 고가구를 모으는 어머니를 보고 자라서인지, 저도 묵묵하면서 찬연한 우리 가구를 좋아해요.”
비튼디자인가구 박정균 작가의 식탁, 헤이의 의자를 놓은 1층 다이닝룸. 서까래 아래에는 무이의 랜덤과 레이몬드 조명등을 설치해 입체적 양감을 줬다.
침실을 비롯한 2층 방문에는 모두 직접 페인트칠을 해 색조를 더했다.
단출한 살림을 위해 수납공간에 신경을 썼다. 부엌을 가리는 벽에는 그릇을 넣어둘 수 있는 매입형 수납장을 만들고, 계단 밑으로 이어지는 주차장 아래에는 계절마다 달리 쓰는 살림을 모아뒀다.
직접 조색한 겨자색 페인트로 칠한 1층 다실에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조선시대 반닫이와 혼례상을 뒀다. 조명은 루이스 폴센의 파테라.
어머니가 쓰던 30년 된 그릇장에는 그간 자신이 모은 차 도구를 수납했다. 방석은 교토에서 구입한 패브릭을 커버로 제작해 입혔다. 3D 프린팅으로 옛 소반을 재해석한 류종대 작가의 현대식 소반도 있다.
1층 다이닝룸이 내려다보이는 2층 거실. 동향이라 강한 아침 햇살을 가리려고 핑크색 프렌치 벨벳 원단으로 직접 만든 커튼을 달았다.
정원에 벽돌을 쌓아 만든 화덕. 각종 직화구이나 고기 파티를 하기에 제격이다. 칼집을 내 껍질을 쉽게 깔 수 있는 ‘홀딱 밤’은 제철 식재료를 판매하는 메이스 꾸러미에서 판매할 예정이다.
엄마의 정원에 딸이 만든 툇마루
1층은 작업실과 다이닝룸, 다실, 2층은 주거 공간으로 꾸몄다. “1층에 있던 안방 벽을 모두 허물고 기존 부엌과 경계를 터서 널찍한 거실과 개방형 주방을 만들었어요.” 주방의 아일랜드 작업대에는 공사 현장에서 제작한 다음 초록색 페인트를, 이전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싱크대 겸 수납장에는 보라색 페인트를 칠했다. “예전에는 안방 창문을 열면 바로 마당이 보이는 구조였는데, 이렇게 거실로 만들고 보니 툇마루가 있으면 어떨까 했어요. 툭 걸터앉아 어머니의 정원과 연못을 내다볼 수 있도록요. 그래서 철제 구조물로 바닥과 다리를 만들고 오일 스테인으로 마감한 원목을 덧댔어요. 을지로에서 맞춘 미닫이문 여섯 쪽을 달았고요. 맞은편 벽에 빔 프로젝터를 쏘면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어요.” 연못에는 메이의 어머니가 키워온 붕어가 살고 있는 데 기특하게도 무더운 여름을 잘 견뎌주었다.
하지만 공사 기간 내 쌓아둔 자재 때문에 물을 주지 못한 데다 기록적인 무더위에 상당 부분이 타버린 정원은 재정비를 해야 했다. “일본식 정원처럼 정형화되지 않고, 드넓은 들판처럼 자연스러운 정원을 원했어요. 함께한 조경 디자이너 김현아 씨가 제안한 건 지금 당장 예쁘지 않아도 되는 정원이었어요. 식물을 듬성듬성 심어 당장은 엉성하지만 해마다 자리 잡아가는 식물들의 앙상블로 점차 아름다워지도록요.” 정원과 1층 거실, 개방형 주방을 빼고는 구조변경을 하지 않았다. 원목 마루를 새로 깔았지만 어머니의 서까래와 나무 창호가 그대로 있고, 역시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한국 고가구, 메이가 모은 그릇과 빈티지 소품을 채워 한국적이면서 고풍스러운 집이 완성되었다. 가장 신경 쓴 것은 조명. 각 공간마다 조명등을 달리 선택해 포인트를 줬다. 식탁 위로는 무이 랜덤과 레이몬드 조명등, 주방 아일랜드 위에는 루이스 폴센의 PH5가 있다. 2층 거실에는 깃털 조명으로 유명한 비타 에오스, 계단에는 앤트래디션의 플라워팟 VP1이 있다. 모두 브랜드와 디자인이 각각 다른 램프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지기 전, 엄마와 딸은 툇마루에 앉아 카메라 를 마주했다. 그리고 셔터 소리가 끼어들지 못할 모녀만의 살가운 대화를 나눴다. 어머니의 보금자리를 보드랍게 매만져 지금의 집을 완성한 딸과 여전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손발 걷어붙이고 고친 집이 감개무량한 어머니. 대를 이은 위대한 유산은 오늘도 새로운 덧칠을 하며 더욱 단단하게 여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