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과 다이닝룸, 거실을 겸하는 2층 가족실. 벽과 천장은 흰색에 가까운 밝은 회색 페인트를 칠하고, 바닥은 미색의 고강도 콘크리트를 씌워 모던한 가운데 따스한 기운이 감돈다. 목재 현관문도 온기를 더하는 요소.
침실이 있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대각선으로 비스듬하게 낸 계단 난간이 훌륭한 장식 요소가 되어준다.
버릴 수 있는 용기
양평의 주상 복합 아파트에 살던 김새봄 씨 가족은 이웃과 돈독하게 지내는 전원주택 생활을 꿈꿔왔다. 하지만 그곳은 집집마다 거리가 멀어서 이웃과 마주할 일이 없었고, 아이가 한창 자랄 시기여서 도심 지역의 필지를 알아보게 됐다. 우연히 연남동에 왔다가 정겨운 골목과 도란도란 붙어 있는 주택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 것에 반해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부부가 구입한 필지는 대지 면적이 55.66㎡인 협소한 땅이었지만 제2종 근린생활시설 및 단독주택이어서 건폐율을 53%까지 올릴 수 있었다. 부부는 1층과 지하층에 상가 시설을, 2층과 3층에 살림집이 있는 연면적 103㎡의 건물을 짓기로 했다. 널찍한 평면구조의 아파트에 익숙한 가족을 위해 협소 주택을 설계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을 터. 설계를 맡은 에이라운드 건축의 박창현 대표는 가족에게 꼭 필요한 물건만 추린 리스트를 만들어보길 권했다. 처분 1순위는 덩치 큰 소파와 침대, 테이블과 대형 가전들. 모두 오랜 시간 고민하고 구입한 제품이지만, 새로운 생활을 위해 망설임 없이 처분했다.
“일본에서의 생활이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저희 부부는 일본 유학 중 만났는데, 둘 다 원룸에서 지내다가 결혼하면서 조금 더 넓은 빌라로 이사했지요. 그곳은 집 규모는 작지만 수납공간을 치밀하게 짜 넣었기 때문에 살면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작은집에서도 충분히 생활할 자신이 있었지요. 게다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대지진이 일어나서 옷가지만 챙겨 한국으로 돌아오고 신혼집을 처분했어요. 신혼살림도 거의 포기했고요. 안타까운 마음이 컸지만 지금 보다시피 전혀 문제 될 게 없어요.” 리스트를 만들기 위해 물건을 하나둘 정리면서 새봄 씨는 한 가지 법칙을 발견했다. 한때 유행한 물건이나 급하게 구입한 물건, 일회용품 등은 거의 버리고, 작품이나 공예품처럼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것만 남겨두었다는 점. 버림으로써 오히려 좋은 물건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오후 2시, 가족실 풍경. 창가에 디터 람스의 초창기 디자인 의자와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판화 작품, 사이드 테이블과 화분이 정갈하게 놓여 있다.
작은 집에서는 틈새 공간도 아쉽기 마련이다. 계단 밑에 수납공간을 마련하고 침구와 계절이 지난 옷을 정돈해두었다.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헤드보드와 프레임을 없애고, 목재를 붙인 뒤 매트리스만 놓아 좌식 침실로 꾸몄다. 유리 파티션 너머에는 개방적으로 꾸민 드레스룸이 있다.
여백의 미에 빠져들다
건축가는 그 안에 터를 잡은 사람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공간이 생활 방식과 패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박창현 대표 역시 마찬가지. 그는 젊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세 식구를 위해 공간에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특히 가족이 보다 풍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숨은 1mm까지 찾아내 활용하는 데 주력했다. 벽과 천장을 건축선까지 확장해 공간을 최대한 확보한 뒤, 하나의 공간에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 설계 포인트!
간결하게 디자인한 연남동 주택. 계단을 내려오다 마주 보이는 벽면에는 이상민 작가의 조명등을 설치했다. 침실로 이어지는 벽은 낮게 설계해 빛이 자유롭게 유영한다.
가령 현관이 있는 2층은 주방과 다이닝룸, 거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가족실 개념으로 꾸미고, 3층은 움직이는 벽처럼 너비가 넓은 슬라이딩 도어를 활용해 부부의 침실과 드레스룸, 화장실, 아이 방까지 요긴하게 마련했다. 지금은 문을 닫아둘 때가 많지만, 훗날 아이가 독립한 뒤에는 슬라이딩 도어를 완전히 오픈해 서재를 꾸밀 수도 있다. 문 앞에는 욕실과 파우더룸을 만들고, 세면대 하부에 세탁기를 배치해 외출 후 돌아오면 이곳으로 올라와 옷을 벗고 샤워할 수 있도록 동선을 간편하게 짰다.
적재적소에 수납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단 하부 공간에 창고와 수납장을 마련한 것. 꼭 필요한 요소만 남기고 남은 세간을 차곡차곡 정리하니 집에 여백의 미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을 잇는 담백한 선,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계단 난간, 헤드보드 대신 벽에 붙인 원목 패널, 이따금씩 눈에 띄는 황동 소재의 훅과 조명등만이 유일한 장식 요소. 밝은 천장과 벽, 바닥은 빛을 반사하며 오묘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밝은 회색 벽과 잘 어울리는 미색 바닥은 고강도 콘크리트 소재로, 물성도 물성이거니와 열전도율이 높아서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난방을 하면 금세 따뜻해진다는 장점이 있다.
화이트 큐브처럼 심플하게 디자인한 연남동 주택의 외관.
계단 밑 공간을 활용해 만든 수납공간. 외출했다가 돌아왔을 때 외투나 가방 등을 걸어놓기 편하다. 조명등과 훅은 금속 소재로 골라 장식 효과를 더했다.
가족이 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공간인 욕실. 벽과 바닥을 대리석 타일로 시공해 호텔 스파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별도로 세탁실을 만드는 대신 수납장을 세탁기 규격에 맞춰 제작해 깔끔하게 빌트인했다.
계단에 놓인 사진 벤체 버코니의 작품으로, 루마스갤러리가 오픈했을 때 구입했다. 판화와는 또 다른 감성으로 집 안을 꾸며준다.
부부의 침실과 마주 보는 일곱 살 딸아이의 방. 움직이는 벽처럼 너비가 넓은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공간 활용성을 높였다.
잘 정돈한 찬장에는 로얄코펜하겐의 찻잔과 에르메스의 테이블웨어, 박수이 작가의 옻칠 트레이 등이 소담하게 놓여 있다.
집에 들어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풍경. 꼭 필요한 물건만 간결하게 놓여 있다.
“집이 작으면 설계 비용, 시공의 공정과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 거라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여러 공정의 시공팀이 한 번에 투입될 수 없기 때문에 대형 주택을 시공할 때보다 훨씬 더 들 수 있어요. 이 집도 첫 미팅 후 완공하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으니까요.” 박창현 대표는 공간에 따라 창도 다양하게 냈는데, 특히 부부의 침실에는 이른 아침 햇살에 눈이 부시지 않도록 창을 천장 가까이 설치해 빛을 반대쪽 벽면으로 깊숙이 끌어들였다. 오후 2시, 이 집에서 채광이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다. 정남향으로 낸 가족실의 창문 앞에는 디터 람스의 초창기 디자인 의자와 간결한 사이드 테이블, 에두아르도 칠리다의 판화 작품이 놓여 있다. 선이 아름다운 식물 화분도 눈에 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고요한 풍경에 보는 이의 마음마저 차분해진다.
- 연남동 56㎡ 주택 비우며 알아가는 삶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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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라이프, #심플라이프, #미니멀리스트’라는 키워드가 내 몸에 맞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조금씩 줄여가는 삶’은 어떨까? 의미 없이 일상을 메운 물건을 줄이고 또 줄여서 최소로 남겼을 때 비로소 우리는 공간의 주인이 된다. 빼곡히 채운 주상 복합 아파트를 벗어나 연남동에 56㎡ 주택을 지은 김새봄 씨 가족은 요즘 담백한 삶의 재미를 알아가는 중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