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가구로 꾸민 아파트. 남편이 아내에게 선물한 펠리컨 체어와 항구에서 픽업해온 나빌리오 소파, 한 개만 나뭇결이 미묘하게 다른 식탁 의자 등 가구마다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국에 돌아와 첫 번째로 구입한 가구인 USM 수납장. 천장이 낮은 아파트에서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흰색으로 골랐다.
1969년에 건축가 유하 레이비스카가 디자인한 JL341 빈티지 조명등이 장 푸르베의 EM 테이블과 스탠더드 체어와 아름답게 어울린다.
결혼 후 남편의 해외 근무로 10년 가까이 워싱턴 D.C. 근교의 메릴랜드에서 지내온 김덕원 씨는 2년 전 한국에 돌아와 지금의 아파트를 레노베이션했다. 갈 때와 달리 미국에서 돌아올 때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두 딸 서인ㆍ정인이의 짐과 그간 구입한 디자인 가구가 더해져 살림이 컨테이너로 한가득이었다. “살던 곳이 워낙 조용한 동네인 데다 한국에서처럼 친구도 많지 않았어요. 또 미국은 가정 중심의 문화여서 자연스레 집을 꾸미는 데 시간을 많이 보냈지요.” 그곳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한 부부는 수많은 신혼부부가 그러하듯 이케아에서 꼭 필요한 가구만 구입했다. 그 후 마음에 드는 디자인 가구를 발견할 때마다 하나둘 장만한 것이 모여 지금에 이르렀다. 하나하나 특별한 이야기가 깃든 가구들이다.
가구로 쓰는 가족 일기
허먼밀러의 임스 책상과 2009년 이베이에서 구입한 ph5 조명등으로 꾸민 서재.
#2009년, 부부의 첫 디자인 가구
집에서도 일할 때가 많은 남편을 위해 덕원 씨는 방 하나를 서재로 꾸몄다. 온라인 쇼핑몰 하이브 모던의 책상 카테고리에서 가장 눈에 띈 가구는 허먼밀러의 임스Eams 책상&서랍장 유닛. 몬드리안 작품을 연상시키는 파란 패널과 빨간 패널의 조합이 부부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첫 가구이다 보니 무난한 블랙&화이트 패널 조합으로 골랐다. 그동안 벽에 붙여두고 사용할 때는 몰랐는데, 이처럼 공간 중앙에 배치하고 보니 수직과 대각으로 이어지는 와이어 장식이 더욱 멋스러워 보인다. 훗날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을 만큼 견고하며, 디자인 가구의 위력을 일깨워준 가구다.
원목 가구와 조명등 두 개만으로 꾸민 침실. 커튼 대신 루버셔터를 설치해 단정한 분위기를 냈다.
#2010년, 자매의 놀이터가 된 가죽 암체어
뷰가 근사한 거실 창 앞에 가죽 암체어가 하나 놓여 있다. 7년 전 구입한 SCP의 발자크Balzac 체어로, 서인이와 정인이의 추억이 가장 많이 깃든 가구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독서광인 서인이가 틈만 나면 여기에서 책을 읽는 바람에 쿠션 한쪽이 움푹 꺼졌다. 물이나 액체를 쏟은 흔적도 있고, 팔걸이 옆에는 볼펜으로 낙서한 흔적도 있다. 범인은 정인이일 가능성이 크다. 낙서를 바라보며 덕원 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이들이 하도 눕고 매달려서 의자가 온전치 않네요. 하지만 조심히 사용하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침대처럼 크고 넓은 저 의자가 아이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놀이터니까요. 가끔씩 집 안에서 돌아다니다 보면 장난기 넘치는 둘째의 흔적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저희 부부는 좋아요. 볼 때마다 ‘여기서 또 뭘 했구나’ 하고 웃음이 피식 나오거든요. 무얼 하고 놀았는지 상상도 하게 되고요.”
장난감 같은 가구로 꾸민 정인이 방. 노란 의자는 카살리노 빈티지 체어인데, 현재 이 색은 생산하지 않아 더욱 의미가 있다.
#2011년, 4인 식탁에 의자가 다섯 개인 이유
집에 손님이 왔을 때 대화를 이어가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 요긴하게 꺼내는 대화 주제는 다이닝룸에 놓인 EM 테이블과 스탠더드Standard 체어.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구에 한창 빠져든 때가 있어요. 장 프루베의 가구도 마찬가지였죠. 스탠더드 체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하나만 사용하다가, 식탁을 바꿔야 할 때 EM 테이블의 존재도 알게 됐어요. 좋은 기회에 테이블과 스탠더드 체어 네 개 세트를 구입했더니 총 다섯 개가 되었네요. 자세히 보면 먼저 쓰던 의자 하나는 나뭇결이 미묘하게 달라요.” 부부가 구입한 가구는 대부분 건축가가 디자인한 가구다. 가구 제작에 대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은 건축가의 발상이 조형적 가구로 탄생한 것. 모두 시간이 흐를수록 더 아름다운 타임리스 디자인이다.
원목 선반을 설치해 깔끔하게 꾸민 서재 벽. 책장 앞 의자는 야르네 야콥센이 디자인한 앤트 체어다.
#2012년, 소파 찾아 삼만 리
5년 전, 뉴욕 콘란숍에서 한눈에 반한 알플렉스의 나빌리오Naviglio 소파. 하지만 집에 돌아와 고민하던 때 뉴욕에서 콘란숍이 철수해버렸다. 결국 마음에 드는 다른 소파를 찾을 수 없어서 영국에 주문해 배편으로 받았는데, 덕원 씨는 직접 일손과 차량을 구해 근처 항구에 가서 가구를 픽업했다. 매장에서 비교적 쉽게 구한 가구보다 더 추억이 많고, 애착이 가는 가구다. 게다가 좋은 가죽으로 만들어서인지 시간이 갈수록 색감이 깊고 풍성해졌다.
가벽을 활용해 책장과 아지트를 꾸민 서인이 방. 회색 트립트랩 의자는 오래전 구입한 가구로, 이번 레노베이션 작업 때 김은정 실장이 새롭게 도장했다.
#2014년, 로맨틱한 생일 선물
언제나 가구 쇼핑의 출발은 덕원 씨였지만 펠리컨 체어만큼은 달랐다. 남편이 아내의 생일 선물로 펠리컨 체어를 제안했기 때문. 하지만 가구 숍이 모여 있는 서울과 달리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디자인 가구를 구입하기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여섯 살 된 서인이와 부부는 렌터카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미국은 국내 배송비가 굉장히 비싼 편이다. 렌터카 비용과 뉴욕 호텔에서의 1박 비용을 합해도 배송비보다 저렴하기에 겸사겸사 가족 여행을 떠난 셈). 새빨간 펠리컨 체어를 가져오기까지의 짜릿한 1박 2일 여행기는 거듭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는 가족의 소중한 추억. 거실을 오가며 펠리컨 체어를 볼 때마다 그 낭만 가득했던 여름이 생각난다고 한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행잇올 행어는 데코 포인트로도 훌륭하다.
사람과 가구 모두 주인공이 되는 공간
이 집의 레노베이션도 가구에서 출발했다. 가족도 가구도 공간의 주인이 되도록, 디자인 가구가 집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굳이 스타일을 정의하자면 ‘마이너스 옵션’ 스타일이랄까. 최대한 비워서 사람과 가구만 남는 집. 그러기 위해서는 수납을 완벽하게 해결해야 하고, 공간을 구성하는 면과 선을 단정히 정리해야 하며, 벽과 바닥 그리고 가구의 톤앤매너가 잘 맞아야 한다. 그래야 가구가 산다. 디자인과 시공을 맡은 김은정 실장은 최대한 빼고 덜어내는 데 집중했다. 이 과정을 거쳐 완성한 공간은 단정하고 차분하다. 가죽 가구가 많은 거실은 화이트 컬러를 메인으로 담백하게, 원목 가구와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가 많은 주방은 그레이&블랙 컬러를 입혀 세련되게 꾸몄다. 천장과 바닥에 맞닿은 벽 모서리는 몰딩 대신 홈을 얕게 팠는데, 천장의 홈은 본래의 마이너스 옵션이고 바닥의 홈은 천장에 맞춰 대칭으로 낸 장식으로 갤러리 같은 우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또 주방과 거실의 커튼은 모두 그레이 컬러지만 공간에 따라 속지를 한 톤 밝게 혹은 어둡게 사용해 공간의 톤앤매너에 충실했다. 여기에 채광 정도에 따라 공간이 한층 깊고 풍성해 보인다.
다용도실을 메인 주방으로 꾸미고 본래 주방은 세컨드 주방으로 바꿨다. 아일랜드 키친은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용도로만 활용하고, 평소에는 바 테이블로 더 많이 쓴다.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 창가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발자크 체어가 놓여있다. 가구가 돋보이도록 최대한 비우는 인테리어에 집중한 공간.
커피와 차를 좋아하는 덕원 씨를 위해 가벽을 활용해 바 공간을 꾸몄다.
가구를 최소한으로 들여 꾸민 침실은 오직 휴식에 집중한 공간. 드 라 에스파다의 원목 침대와 셔너Cherner 체어의 나뭇결을 살리기 위해 바닥에는 웜 그레이 톤의 타일을 깔고, 커튼 대신 루버셔터를 설치해 빛을 조절했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는 타일을 일일이 자르고 엇각으로 붙여 소소한 즐거움을 더했다. 하지만 침실의 하이라이트는 침대를 배치한 벽 뒤의 아담한 드레스룸이다. 평범한 벽처럼 보이지만 슬라이딩 도어를 열고 들어가면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폭의 일자형 드레스룸이 펼쳐진다. 공간이 넓든 좁든 ㄷ자형 드레스룸은 단정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의 드레스룸은 공간을 적게 차지하면서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생활을 완벽히 감춰준다. 또 디자이너는 점점 감수성이 풍부해질 서인이를 위해 혼자서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낮은 가벽을 세워 비밀 아지트를 꾸며주었고, 정인이에게는 장난감 같은 디자인 가구와 소품을 배치해 놀이하듯 머물 수 있는 공간을 선물했다. 이 집에서 벌써 2년 가까이 살았지만 하루하루 지날수록 집이 더욱 좋아진다는 덕원 씨네 가족들. 가족이 함께 가구를 고르고, 집을 꾸미는 일은 단순히 인테리어가 아닌 가족만의 추억을 쌓는 일이다.
디자인과 시공 김은정(010-4288-4684, blog.naver.com/0612kim)
- 아파트먼트 라이프 가구에 깃든 가족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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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내리쬐던 2014년의 여름 어느 날, 미국 메릴랜드의 조용한 마을에 사는 가족은 렌터카를 타고 뉴욕으로 향했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펠리컨Pelican 체어를 선물하고 싶었던 남편의 깜짝 제안이었다. 지금도 펠리컨 체어를 보면 가족들은 행복했던 그날을 떠올린다. 함께 가구를 고르고 집을 꾸미는 일은 이렇듯 가족의 추억을 기록하는 일이기도 하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7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