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칼 한센앤선 크누드 에리크 한센의 헬레루프 매너하우스 위대한 유산
기능주의 디자인의 미학이라는 표현은 왠지 뻔하고 유행의 정점이라는 말은 어딘지 가볍다. 과연 우리는 ‘덴마크 디자인’의 진정한 매력에 얼마나 공감하고 있는지? 1950~1960년대 오리지널 디자인, 메이드 인 덴마크를 고수하는 가구 브랜드 칼 한센앤선의 고향 오덴세에서 그 진면목을 확인했다

헬레루프 매너하우스에서 만난 크누드 에르크 한센 회장. 홍콩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진행한 인터뷰인데도 여유롭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줬다. 매너하우스에는 칼 한센앤선 제품 중 프로토 타입이나 첫 번째로 만든 제품 등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가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덴마크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고 한 시간 반, 푸넨Funen섬에 자리한 안데르센의 마을 오덴세에 도착했다. 느린 배경음악처럼 도시 전체에 여유로움을 자아내는 녹음과 운하, 북유럽 고전 양식의 빨간 벽돌 건축물이 조화를 이뤄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다. 크래프트맨십을 토대로 1950~1960년대 덴마크 디자인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이자, 오리지널 덴마크 가구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칼한센앤선은 바로 이곳 오덴세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왼쪽) 시간, 장소를 초월해 어떤 공간에도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고전의 가치! 400m가 넘는 종이 끈을 엮어 만든 한스 웨그너의 CH25 체어와 한국 약장이 마치 세트 가구처럼 잘 어울린다. (오른쪽) 계단 참에서도 셸 체어, 올레 옌서의 데이베드 등 칼 한센앤선의 빈티지 가구를 만날 수 있다.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칼 한센앤선의 크누드 에리크 한센Knud Erik Hansen 회장을 오덴세의 더 퍼스트 호텔 로비에서 만났다. “환영합니다! 이 호텔 자리가 바로 할아버지(설립자 칼 한센Carl Hansen)가 처음 공방을 연 곳입니다. 집은 여기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어요. 집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아주 좋아요.”

2002년 최고경영자로 취임한 뒤 칼 한센앤선 팩토리 근처의 헬레루프 매너하우스Hellerup Manor House를 구입한 그는 17세기에 지은 문화유산급 저택을 레노베이션해 현재 집과 게스트를 위한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매너하우스는 원래 귀족이나 영주의 사택으로, 규모가 커 최근에는 호텔로 레노베이션하는 경우도 많다. 크누드 회장은 1670년도에 지은 4백 살의 목조주택을 본 순간 칼 한센앤선의 빈티지 가구가 어우러진 모습을 상상했다. 일상의 모든 순간에 자연을 담아내는 덴마크 디자인 정신을 이만큼 잘 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을까?

가장 오래 공들인 공간은 바로 다락방이다. 쇠못 대신 나무 못을 사용하고, 나무를 켤 때도 옛 방식 그대로 톱 대신 도끼를 사용했다. 익스텐션 테이블, 가죽 다이닝 체어 모두 칼 한센앤선에서 제작한 빈티지 제품. 
“덴마크 사람의 80%는 아직도 목조나 빨간 벽돌로 지은 오래된 집에서 살아요. 이 집은 시각적으로 보일 만큼 뒤쪽으로 상당히 기울어져 있어요. 기존 구조와 마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골조를 보강하는 데만 3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오래 비어 있던 집이라 배관, 난방 설비를 재정비하고 현대 생활에 맞도록 부엌 구조를 바꾸는 일도 쉽지 않았죠. 내부 페인팅은 마르고 다시 칠하고, 마르고 다시 칠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해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4백 년 된 집은 시각적으로도 느낄 만큼 뒤로 기울어져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건물이라 하나하나 정부의 허가를 받은 뒤 레노베이션을 진행. 벽면은 난방 배관 공사 중이라 아직 컬러가 미완성이다.



1 아치 벽과 몰딩 등 옛 구조를 그대로 살렸다. 2 PK87 라운지 체어는 매너하우스에 둔 유일한 타 브랜드 가구다. 3, 7 사이드보드, 콘솔 위에는 가족들이 하나 둘 모은 작은 소품을 장식했다. 벽에 건 액자는 한스 웨그너 1 백 주년 기념 에디션. 4 종이 등 천연 끈(페이퍼 코드) 을 가구 재료로 활용하는 칼 한센앤선. 남은 노끈 재료로 만든 사자 오브제가 귀엽다. 5 한센가의 가족사진이 라이브러리 곳곳에 장식되어 있다. 6 가구, 카펫,조명 등이 조화를 이룰 때 편안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을 완성할 수 있다. 빈티지 카펫과 쉘 체어가 라운지의 안락한 분위기를 완성한다.

“지난봄, ‘3 Days of Design’에 참석하기 위해 코펜하겐에 갔다가 크누드 회장의 오덴세 집을 방문했어요. 새벽 6시쯤 됐을까, 크누드 회장이 강아지와 산책을 마치고 마당에서 아이패드로 메일을 체크하고 있더군요.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 치열하게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자연 속의 집’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 와서 자연과 더 많은 시간을 누리고 좋은 공간에서, 좋은 가구와 생활하는 것이 삶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중요한 열쇠 아닐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 크누드의 집은 생활 공간에 가구를 어떻게 매치하고, 또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공간이에요. back to basic! 덴스크가 얘기하고 싶었던 크래프트맨십의 가치를 다시금 담금질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_ 김효진(덴스크 대표)


시간이 전하는 가치
1908년 주문 제작 가구 공방으로 시작한 칼 한센앤선은 평범한 덴마크 가정에 두루 잘 어울리는 가구를 제작했다. 1940년대 중반까지 프리츠 헤닝센과 손잡고 소파, 암체어, 윙백 소파 등 수많은 명작을 탄생시켰지만, 2대 경영을 맡은 홀거 한센은 이에 안주하지 않았다. 당대 획기적 디자이너라 꼽힌 젊은 건축가 한스 웨그너와 협업해 ‘위시본 체어’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선보인 것.

Y체어라 불리는 위시본 체어는 의자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되 인체 공학적 기능에 따른 최소한의 디자인으로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가구를 만든다는 칼 한센앤선의 정신에 가장 잘 부합하는 제품이다. 다만 외형이 복잡하지 않은데도 1백 가지 이상의 단계를 거쳐 완성한다고 하는데, 헬레루프 매너하우스를 둘러보니 왜 여전히 그 복잡한 과정을 고수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새 제품을 생산할 때면 가장 먼저 이 공간에 매치해보곤 하지만, 위시본 체어만은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현관 입구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이동해서 사용하죠. 계단에 있는 셸 체어는 어떤 인테리어에도 잘 녹아드는 오브제예요. 복도 끝이나 계단 코너 같은 곳을 장식할 수 있죠.”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바닥을 그대로 살린 공간 곳곳은 칼 한센앤선의 빈티지 가구와 새로운 컬렉션이 조화를 이룬다. 옛 모습을 유지하면서 크누드 회장 가족의 취향과 개성을 반영하기 위해 공간 곳곳에 컬러를 도입했다. 노란색을 칠한 1층 거실과 책이 가득 꽂힌 라이브러리가 가장 자주, 오래 시간을 머무는 곳이다(사실 방이 몇 개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커 여전히 부분적으로 개조 중이다).

지하에 있는 주방을 1층으로 옮기면서 거실을 다이닝룸으로 확장했다. 한스 웨그너의 위시본 체어는 좌석에 종이 끈을 활용해 가볍고 사용하기 편한 것은 물론 Y자형 등받이 디자인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뤄 다이닝 체어의 표본으로 불린다. 식탁에 매치한 팬던트 조명등은 딱 두 피스만 생산한 특별한 제품. 
꼭대기 층은 지붕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가장 오랜 시간 공들여 고쳤다. 거실과 주방, 손님용 침실은 그대로 드러난 보와 빈티지와 모던 가구가 어우러져 조금씩 다른 부드러움을 풍긴다. 그가 공간을 꾸밀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온기’. 칼 한센앤선의 모든 가구가 원목, 가죽, 양모 등 천연 소재만 고집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가구, 조명, 카펫 모두가 조화를 이뤄야 편안한 공간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특히 카펫은 감성적 터칭이 필요한 현대의 주거 공간에 꼭 필요한 아이템이에요. 또한 거실에 책상과 소파를 모두 두어야 한다면 그 아래 각각의 러그를 까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시각적으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마법처럼요.”

그의 집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동양 가구와 오브제다. 홍콩에 오래 살면서 중국 가구와 그림을 하나 둘 모았는데, 한국의 고가구인 약장까지 컬렉션했을 정도다. 특별히 테마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영감에 따라 수집한 것들이지만, ‘시간의 켜’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저택 곳곳과 조화를 이루며 또 다른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적용해보는 살아 있는 쇼룸. 빈티지 제품과 새 제품이 조화를 이루며 크래프트맨십의 가치를 전한다.
‘메인드 인 덴마크’의 자부심
사실 크누드 회장이 처음부터 가구와 인테리어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어머니에서 형으로 가업을 잇는 동안 그는 26년간 해운 회사에 근무하며 남아프리카에서 동남아시아로 해외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삶의 방식은 시간이 지나고 나라를 옮긴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홍콩, 싱가포르에 근무하는 동안 의식주 중에서도 특히 ‘주생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 안타까웠다는 그는 칼 한센앤선을 비롯한 덴마크 가구를 직접 사용하며 가구의 중요성을 열심히 설파했다.

가구와 상관없는 기업에 근무하며 국제 업무와 비즈니스 감각을 익힌 것 역시 지금의 칼 한센앤선을 있게 한 플러스 요인. 칼 한센앤선은 2002년 크누드 회장이 경영을 시작할 때만해도 스무 명 남짓한 직원이 위시본 체어만 생산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3백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수백 가지 제품 라인을 가동하며 세계 곳곳으로 수출하는 덴마크 가구 브랜드의 자존심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가치는 ‘메이드 인 덴마크’를 고수한다는 점입니다. 디자이너가 제작 현장을 볼 수 있고, 장인들이 디자인을 지켜나간 것이 덴마크 디자인의 가장 큰 경쟁력이니까요. 덴마크 제작의 퀄리티는 유지하면서 인건비를 낮추기 위해 초반 작업은 기계로 하고, 조립과 샌딩은 수작업으로 하는 등 생산 라인의 변화는 꾀하면서요.”

(왼쪽) “빠르게 변하는 유행에 싫증 난 대중은 결국 오리지널 디자인을 선택할 것”이라며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크누드 에리크 한센 회장. (오른쪽) 2002년 최고경영자로 부임하면서 고향 오덴세로 이주한 크누드 회장은 17세기에 지은 매너하우스를 구입해 한 채는 개인 주거 공간으로, 다른 한 채는 게스트 하우스로 사용한다. 정면에 보이는 건물이 게스트 하우스, 왼편이 주거 공간이다. 
칼 한센앤선은 프리츠 헤닝센을 비롯해 한스 웨그너, 카레 클린트 등 당대 최고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의 오리지널 디자인을 그대로 생산하되 해마다 컬러나 소재 등을 달리한 에디션을 출시한다. 또 점차 다양해지는 주거 환경에 부응하기 위해 작은 공간에 유용한 가구를 생산하는 것은 물론, 시그너처 라인도 수종이나 시트, 다리 소재, 색상 등을 달리 선택할 수 있도록 커스터마이징 서비스를 도입했다. CH88 체어 신제품의 경우 등받이를 그린 컬러로 도장했는데, 신선하면서도 클래식함을 동시에 느꼈다. 화이트 일색인 모던 다이닝 공간에 포인트를 주기 제격.

“저는 덴마크의 유명한 가구들과 동시대를 살아왔어요. 좋은 가구를 모아서 삶을 조금씩 풍요롭게 만들고 싶다는 가치관을 기본으로 갖고 있지만, 미래 세대를 설득하는 것도 저의 중요한 역할이죠.“

엘보 체어, 윙 체어, CH88 등 60~70년 후까지 내다본 칼 한센앤선의 살아 있는 포트폴리오, 헬레루프 매너하우스를 둘러보며 가구는 패션이 아닌 ‘삶’이라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다. 유행이 지나서, 체형이 바뀌어서, 낡아서 다시 사야 하는 ‘옷’이 아니기에, 우리는 좋은 ‘가구’를 써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첨단,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정서적 어루만짐, 크래프트맨십의 가치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11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