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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윤경식 회장 건축가의 상상, 현실이 되다
지속 가능한 친환경 건축으로 국내외에서 여러 건축상을 수상한 한국건축 윤경식 회장은 다양한 단체를 대상으로 건축 주제의 강연을 한다. 보다 많은 사람이 건축을 이해해야 더 나은 건축이 가능하다는 믿음 때문. 건축가가 직접 밝힌, 인문적 상상력을 공간으로 구현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1 CJ해슬리 나인브릿지 클럽 하우스의 목조 구조물. 죽부인의 육각형 구조에서 영감받아 첨단 공법으로 집성목을 결합해 완성했다. 2 사무실로 활용하는 청평 호반 청담헌의 테라스. 윤경식 회장은 이곳 풍경에서 설계에 필요한 영감을 받곤 한다.
호수에서 수상 레저를 즐기는 이들이 유난히 시원해 보이는 날이었다. 서울에서 차를 타고 한 시간 남짓, 청평호가 내려다 보이는 산 중턱에 한국건축 윤경식 회장의 사무실이 자리한다. 세로로 긴 통창으로 청평 호반의 풍경이 눈앞에 훤히 펼쳐진다. 무더위를 잊을 만한 절경. 음식점, 숙박 시설 등 상업 시설하나 없이 보이는 것이라곤 호수 건너 고즈넉한 별장 한 채뿐이다. “매주 주말 등산을 즐깁니다. 1년이 52주라면 50번 정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행을 떠나지요. 몇 시간이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산을 오르면 육체가 온통 소진된 상태가 됩니다. 그런 후 다음날 사무실 책상에 앉아 호수를 바라보면 직관이 빛납니다. 온전히 나 자신이 되는 순간이지요. 내 생각과 상상을 공간으로 탄생시키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한국건축을 이끄는 윤경식 회장은 정각사 미래탑, CJ해슬리 나인브릿지 클럽 하우스, IK 사옥 등의 작업을 통해 여러 국제 건축상을 수상했다. 특히 지난 2010년엔 이탈리아에서 주최한 ‘지속 가능한 건축상’에서 비유럽 건축가로선 최초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했다. 윤 회장은 디자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후 비로소 진짜 건축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건 인간이기 때문. 건축에서 인간에 대한 학문인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도 그와 같다. “지난 10년간 제가 해온 프로젝트를 돌아보면 공간을 통해 나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건물에서 건축가가 보이지 않을 때 진정한 건축이 시작된다는 깨달음 때문이었지요.그전엔 건축을 통해 나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건축가는 예술가가 아니다’라는 확신으로 건물에서 나 자신을 지우자 오히려 사람들이 내 건축을 예술로 평가하고 여기저기서 상도 따라오더군요.”

노자가 쓴 <도덕경>엔 이런 글귀가 있다. “성인은 배를 위하지 눈을 위하지 않는다(聖人爲腹不爲目).” 일시적 감각의 충족이 아닌, 본래의 필요를 따라야 한다는 이야기. 시각적 아름다움보다는 본연의 쓸모에 가 닿는 건축. 윤경식 회장이 말하는 지속 가능한 건축의 핵심이다.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걸 욕심내기 때문에 오래가지 않는 겁니다. 형태도 그렇지만 과도한 인테리어 디자인에도 거부감이 있습니다. 인테리어는 결국 화장입니다. 몇 년만 지나면 낡아 뜯어내고 새것으로 바꿔야 하지요. 욕심을 줄여 건물 바깥 형태와 내부 인테리어를 최소화하면 공사 기간과 비용이 줄어들고, 불필요한 자재를 아낄 수 있습니다. 보수할 필요도 없지요. 이런 게 친환경 건축 아닐까요?” 최소한의 형태와 인테리어로 공기 잘 통하고 빛 잘 드는 공간을 만드는 것. 단순히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것보다 환경에 더욱 좋고 오래 지속되는 건축일 터다.

르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보아, 필립 존슨의 글라스 하우스 등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일수록 별다른 장식 없이 단순한 직사각형으로 표현했다. 건축가가 미리 규정하지 않은 공간에 책상과 서가를 두면 서재가, 식탁을 두면 식당이 된다.“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건축가의 특성과 개성이 아닌,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입니다. 노자 말씀처럼 눈이 아니라 배를 위한 건축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건축 지식이 아닌 인문학적 상상력과 직관을 최대한 활용합니다. 그렇게 완성한 공간을 통해 안과 밖, 인간과 자연, 사람과 사람이 통通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윤경식 회장은 여러 계층의 다양한 단체를 대상으로 자신의 건축 철학을 알리는 강연을 진행하기도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지속 가능한 공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구체적 사례를 통해 건축을 모르는 이들이라도 쉽고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건축은 건축하는 사람이나 전문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불특정 다수가 더욱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지요. 일반인이 건축에 대해 더 잘 알아야 더 좋은 건축이 나올 거라고 믿습니다.” 윤경식 회장의 최근 프로젝트를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과 직관이 어떻게 인간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했는지, 그 구체적 양상을 지면을 통해 전한다.


1 IK 그룹 백년사옥의 지하. 면적의 상당 부분을 비워냄으로써 통풍과 채광을 해결한 멋진 공간으로 다양한 사내 행사가 열린다 . 2 정각사 미래탑의 야경. 심오한 불교철학을 구조물을 통해 표현했다. 미래탑 안에 모신 4백55좌 금속 불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계속 변한다.

3 고택으로 가득한 안동에 들어설 예정인 현대 주택 ‘청청청.’ 수영장에 ㄱ자 구조물을 만들어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4 2017년 완공 예정인 불영사 국제명상센터 ‘선선선’의 전경.

죽부인, 첨단 공학을 만나다 CJ해슬리 나인브릿지 골프클럽하우스
2010년, 이 건물로 비유럽 출신 건축가로는 최초로 ‘지속 가능한 건축상’에서 최고상인 금상을 수상한 윤경식 회장은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과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다들 궁금해 어쩔 줄 모르더군요. 내 부인이라니까 다들 믿지 않고 웃기만 했어요. 껴안고 자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어떤 용도의 물건인지를 알아차리더군요.” 올 초 BBC에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 개의 천장 중 하나로 꼽힌 CJ해슬리 나인브릿지 골프 클럽 하우스의 나무로 엮어 만든 구조는 죽부인의 육각형 구조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죽부인 안으로 보이는 육각형이 교차, 반복하는 구조를 목조건축으로 재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소문해서 찾아간 목수에게 거절당하길 수차례. 마침 비슷한 난이도의 목구조물로 난관에 빠져 있던 10년 지기 건축가 반 시게루의 협력과 스위스 목구조 업체인 레이만, 스위스에서 날아 온 목수 40여 명의 열정을 통해 구상을 현실화할 수 있었다. 1mm도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 그들의 프로페셔널리즘은 그야말로 놀라웠다. 그 결과 구조물 자체로 기둥과 천장이 되고, 나무 사이로 바람과 햇볕이 통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클럽 하우스가 완성되었다. 독일산 집성목으로 제작해 완공한 지 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뒤틀림이 전혀 없다. 대규모 작업이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저렴한 공사비에 건축주가 깜짝 놀랐다는 후문.


비움으로 통하다 IK 백년사옥
인천 검단공단에 위치한 IK 그룹 본사 사옥. 건축주의 요구는 싫증 나지 않고 견고한 건물을 만들 것, 그리고 건물 맨 위층에 사내 행사를 할 수 있는 공용 공간을 만들 것이었다. 그런데 인접한 서해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닷바람이 골칫거리였다. 맞바람에 대응하는 건축가의 해법은 무언가를 더하고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고 빼는 것이었다. “비우니까 다 통했지요.” 그는 웃으며 도가의 무위無爲 사상 덕을 봤다고 말한다. 건물로 불어오는 강한 북서풍이 건물을 관통해 지나갈 수 있도록 건물 아래쪽을 비워 커다란 바람길을 낸 것. 바람의 부담을 덜어낸 건물은 기둥과 보(beam)를 최소화해 탁 트이면서도 견고했고, 환기 효과도 탁월했다. 건물 아래를 비운 효과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애초 건축주가 요구한 대로 공용 공간을 최상층에 만들었다면 일하는 직원들과 동선이 겹쳤겠지만, 바람길을 시원하게 뚫어 충분히 밝고 쾌적해진 지하로 옮겨 해결했다. 애초의 의도와 달랐지만 건축주는 ‘거저 생긴 공간’이라며 반색했다고. 윤 회장은 IK 그룹의 백년사옥뿐 아니라 조경과 CI 디자인까지 맡았다. 건축을 통해 임직원의 복지가 향상되고, 회사 이미지 역시 일신한 좋은 사례.


허공에 모신 부처 정각사 미래탑
정각사 경내에 유리로 지어 4백55좌의 금속 불을 모신 탑. 윤경식 회장이 정각사 주지 정목 스님을 처음 만난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유리로 된 직사각형 탑의 구상을 완성했을 정도로 직관적으로 해낸 설계다. 사찰 내에 있는 대부분의 탑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형태지만, 윤 회장에 따르면 실용적인 중국인이 이전의 것을 활용한 것일 뿐, 본래 인도의 탑은 그렇지 않았다. 불경 없이도 미래탑을 통해 불교 사상의 핵심을 느낄 수 있도록 의도했다. 에칭과 그러데이션 처리해 가장자리로 갈수록 반투명해지는 유리를 통해 안과 밖이 따로 없고, 실재와 허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불교 철학을, 금속 불을 공중에 매달아 허공이라는 심오한 개념을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스테인리스 스틸 와이어에 신소재 두랄루민으로 만든 얇은 판을 3열로 매달고, 그 위에 금속 불을 모신 구조. 시선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모두 다르다. 밤이 되면 금속 불이 조명을 받아 사면 유리에 수없이 반사되는 황홀경을 감상할 수 있다.


부처의 눈썹 불영사 국제명상센터 선線·선善·선禪
경북 울진에 자리한 불영사는 1천4백 년 전 신라 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지난 20년간 주지를 맡아 이곳의 살림을 키워온 일운 스님이 직접 부탁한 프로젝트. 일운 스님은 “건축물이 아름다우면 명상할 필요 없다”고 말할 정도로 건축에 대한 소양과 감각이 뛰어나다. 건축가는 태극처럼 크게 굽이진 계곡과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의 지형을 보고 부처님 눈썹을 닮은 지붕의 형태를 생각해냈다. 템플 스테이를 위한 숙소 공간에는 창문 높이와 모양을 모두 다르게 설계해 근처 금강송 군락지, 불영계곡 등 객실마다 다른 풍경을 보며 자연스럽게 선禪을 체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선線으로 시작한 명상 센터 안에서 선善을 베풀고 참선禪에 이른다’는 이름의 의미에 충실한 공간. 2017년 완공할 예정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주택 청靑·청淸·청晴
안동 지방 양반가 종손이 의뢰한 건물. 건축주는 도시 생활에 익숙한 배우자가 만족할 수 있도록 주변에 즐비한 고택과 조화를 이루는 현대 주택을 짓길 원했다. 의뢰받은 건축가는 고려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가문 선조의 시 2백50여 수를 읽는 것으로 구상을 시작해 그 감흥으로 푸르고, 맑고, 맑게 개인다는 의미를 지닌 ‘청靑·청淸·청晴’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콘셉트는 수월하게 합의했지만 그 밖에도 문제가 있었다. 주택을 지을 만한 부지가 건축주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한옥보다 7m쯤 위에 있는 것. “부모가 아들 내외를 모시고 산다”는 뒷말이 나올 것이 뻔했고, 고택에서 바라보는 뒷산 풍경을 가릴 우려도 있었다. 건축가는 거실 부분을 프레임 없이 격자 구조의 통유리로 처리해 통풍과 채광을 해결하고, 뒷산 풍경을 살렸으며,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 내려다보이는 수영장에 ㄱ자 형태의 구조물을 설치해 부모님을 공경하는 액자처럼 풍경을 처리해 위계 문제를 해결했다. 2017년 완공할 예정.


글 정규영 기자 | 사진 김종오, 이경옥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8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