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의 곡선 구조와 마름모 창, 테라스로 통하는 빨간 문, 아치형 벽, 둥근 천창, 유리 펜던트 조명등이 이 집만의 특유한 개성을 만들어낸다.
1 수집은 때론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을 재발견하는 행위가 되기도 한다. 나무 훅에 빗자루와 아이용 핸드백을 걸어 장식했다. 2 코너 공간을 채워주는 나무 벤치와 왕골 바구니. 3 1970년대 초반에 튼튼하게 지은 집은 개성 있는 구조로 고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낡은 집일수록 고치는 재미가 더 크다
오래된 주택으로 집을 구하러 다니다 보면 실망하는 사람이 많다. 수 십 년 전 칠한 방문과 창문의 번쩍이는 니스 자국, 화장실과 단짝 친구가 된 시커먼 곰팡이, 우울한 누수 흔적까지…. 독일 유학 시절부터 지금까지 작고 낡은 집을 옮겨 다니며 고치고 살았던 경험으로 이사할 때는 집의 현재 상태보다 바뀔 가능성을 꿰뚫어본다는 정혜승 씨. 실제 이 집은 큰 구조 변경 없이 낡은 주택 요소를 최대한 살리고 디자이너의 아이디어와 건축가의 꼼꼼한 마감, 집주인의 감성을 버무려 놀라운 변신을 이끌어낸 사례다.
“연희동에 살면서 많은 집을 둘러봤지만, 이 집은 꿈에까지 나왔을 정도로 유난히 마음이 끌렸어요. 마당이 먼저 펼쳐지는 게 일반 구조라면, 이 집은 주차장이 나오고 집을 지나 뒤편으로 정원이 펼쳐지죠. 마당이 보호받는 느낌이 좋았고, 또 혼자 관리할 수 있는 적당한 규모가 마음에 들었어요.” 발코니와 지붕 선, 1층과 2층으로 이어지는 라운드형 계단 등 전체 형태가 예뻐 잘 고치면 개성 있는 집이 완성될 것 같은 기대가 컸다. 하지만 모든 초년 부부가 그렇듯 예산이 넉넉지 않았다. 함께 재미있게 작업해줄 ‘협업자’가 필요했고, 그래픽디자이너 구선모 실장과 다나 디자인의 김정홍 소장이 조력자로 나섰다. “결과만큼 과정도 재미있었던 작업”이라는 혜승 씨의 말에 외려 “집주인의 감각을 한 수 배웠다”고 화답하는 구선모 실장. 본인의 작업실을 꾸미는 과정을 블로그에 올려 공간 디자인까지 영역을 넓힌 구 실장은 그래픽 디자인 특유의 비례미와 색감 등 자신의 특장점을 공간에 잘 녹여냈다. 단, 낡은 집인 만큼 건축설계의 전문성이 필요했다. 구선모 실장의 사촌 누나이자 건축사인 김정홍 소장은 시공할 때 필요한 실질적 부분들을 보완, 체크해나갔다. 혜승 씨가 밤새 고민한 디자인을 구 실장과 의논해 조율하고, 이를 김 소장이 실제 공간으로 구현하기까지, 한 달 반의 여정 동안 완벽한 역할 분담과 합을 이룬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1 유학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가구와 핸드메이드 오브제, 이베이에서 하나 둘 컬렉션한 조명등이 조화를 이루는 다이닝룸. 2 좋아하는 사이트 ‘etsy’에서 구입한 오브제. 3 평소 하나 둘 모은 피겨를 거울 선반에 조르르 장식했다. 소품은 짐블랑 같은 편집매장에서 종종 구입한다. 4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만나는 화사한 주방. 블랙 하이글로시와 레몬옐로 컬러로 도장한 주방 가구, 바닥 타일이 잘 어울린다. 5 사다리꼴 창문 역시 원래 이 집에 있던 구조로 창틀만 도장해 모던한 느낌을 자아낸다.
6 기존의 다락 문짝도 매트한 회색 페인트로 도장하고 이베이에서 산 손잡이로 바꿔 달았다. 7 집 안 구석구석 키덜트 감성의 소품이 많아 놀이 아이템이 무궁무진한 유하. 8 손으로 만든 물건의 가치를 알게 된 뒤부터 핸드메이드 오브제에 탐닉하는 정혜승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선인장 화분 오브제에 툭 올려둔 센스가 재치만점. 9 오랜 친구이자 동료 아티스트인 MK2의 철제 장식장과 세컨 호텔 초창기에 구입한 국종훈 디자이너의 통가죽 소파. 장식장 가장 위 칸에 그가 처음 만든 코끼리 인형을 올려두었다.
선택과 집중, 가성비를 높여라
레노베이션 의 키워드는 가성비. 구선모 실장과 김정홍 소장은 가성비 높은 디자인을 위해 첫째, 컬러&도장 리폼을 최대한 활용했다. 우선 외관의 파사드는 기존 마감재를 건드리지 않고 화이트와 카키색으로 도장한 후 레드 컬러로 포인트를 줬다. 현관과 전실 문, 창문 등 목공사와 새시 비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문 역시 기존의 것을 교체하지 않고 리폼해 필요한 공간에 재구성했다. 2층으로 오르는 둥근 계단은 이 집의 독특한 구조미를 완성한 일등 공신. 현관부터 이어지는 벽면의 패턴은 기존 유광 화이트에서 연한 그레이 컬러의 수성으로 색을 갈아입었다. 바닥도 유광 니스로 반짝이던 것을 모두 벗겨내고 무광 코팅을 했다.
둘째, 구조 변경을 최소화했다. 1층은 가운데 거실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부엌과 안방, 오른쪽으로 작은 방이 있는 구조. 2층 역시 1층과 같은 위치 그대로 방과 거실이 구성되어 식구 수에 비해 공간이 잘게 쪼개져 있는 게 단점이었다. “요즘은 식구 수가 적어 방을 많이 두지 않고 스튜디오처럼 탁 트인 공간을 원하는 건축주가 많아요. 하지만 이 집은 굳이 탁 트인 공간을 원하지 않았어요. 작게 쪼개진 공간을 그대로 두고 가구 배치만으로 각 공간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죠. 작은 방이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어 프라이빗한 침실을 제외하고는 모 문을 없앴어요.” 보통 안방으로 사용하는 1층 침실은 다이닝룸으로 용도를 바꿨는데, 부엌과 마주 보는 동선으로 문을 없애 편의성을 높였다. 계단 옆 게스트룸은 소파 겸 데이베드를 두어 평소에는 바느질하거나 차 마시는 응접 공간으로 이용한다. 유일하게 구조 변경을 한 공간은 화장실로, 1층 계단 아래 있던 화장실은 유하 놀이 공간으로, 2층 침실과 작업 공간 사이에는 침실 안쪽으로 작은 화장실을 구성했다.
셋째, 마감재를 고를 때는 선택과 집중을 명확히 했다. 1층 거실 바닥에 광폭 원목 마루를 깔았다면 2층은 블랙 컬러의 마모륨을 시공했다. 20년 전에는 흔히 시공한 마모륨은 사실 코르크 소재로 본드를 사용하지 않으면 알아서 수축, 팽창하는 친환경 소재다. 비용도 원목 마루를 시공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하다. 1층 화장실 바닥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나무 무늬 타일이라 습식에도 용이하며, 건식 분위기를 낸다. 건축주와 디자이너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른 컬러로 제작한 싱크대는 특별하고 고급스러운 컬러 조화를 보여주는 예. 매트한 무광부터 반광, 하이글로시까지 벽, 가구, 문짝 등 각 용도에 맞는 페인트를 사용한 덕분이다. 모든 페인트는 외장재까지 벤자민 무어 친환경 페인트를 사용. 친환경도 중요한 이슈지만, 고유한 컬러 칩이 있는 제품을 사용해야 다시 도장할 경우 색감의 오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1 2층 작은 거실. 둥근 천창과 조명등, 행잉 오브제의 매치 등에서 집주인의 안목을 느낄 수 있다. 2 1층 다이닝룸과 부엌 사이의 화장실. 화장실이지만 과감하게 창문을 냈다. 바닥에는 나무 질감 타일을 시공. 3 간접조명과 건축주가 평소 모아둔 펜던트 조명 등, 벽부 조명등 그리고 소품의 조화와 공식을 깬 디테일한 배치까지…. 노출 천장의 1층 거실은 가족이 가장 많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자, 디자이너도 시공 후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이다. 4 사선 지붕 구조로 아늑한 느낌을 자아낸 침실.
5 마당으로 이어지는 외부 벽면에는 칠판 페인트를 칠해 유하는 물론 동네 꼬마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린다. 6 디자인을 맡은 구선모 실장과 그의 사촌 누나이자 건축 자문과 시공을 맡은 다나 디자인 김정홍 소장. 연희동 레노베이션 프로젝트는 집주인의 감각과 디자이너의 열린 생각, 건축사의 꼼꼼함이 빚어낸 완벽한 협업이다.
내 마음대로 조금씩 채워가는 게 집 꾸밈의 재미
단독주택 레노베이션으로 새로운 인사이트를 만들었다는 구선모 실장. 무엇보다 건축주의 감성과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점을 높이 산다. “공사가 끝난 다음 초대받았는데, 건축주가 원래 사용하던 오래된 가구와 하나 둘 모아온 소품들이 공간과 조화를 이루며 제자리를 잡은 모습이 왠지 뿌듯하더라고요. 공간은 결국 사람이 완성한다는 말을 실감했죠.”
구 실장의 말처럼 건강한 생명력이 넘치는 이 집에는 구석구석 가족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층 소파는 세컨 호텔 국종훈 대표가 전시를 위해 만든 제품으로 잘 태닝된 가죽이 그간의 세월을 말해준다. 핸드메이드 공예품들이 놓인 파란색 철제 랙은 MK2 제품. 스토케의 트리트랩부터 공간 곳곳에 퍼져 있는 의자는 20년 전, 유학 시절부터 하나 둘 모아온 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유난히 손맛이 느껴지는 핸드메이드 제품이 많다.
“결혼과 육아, 집 꾸밈까지 핑계 삼아 요즘은 작업을 못 하고 있지만, 한창 많은 작업을 쏟아내던 때는 오히려 손으로 하는 작업의 가치를 몰랐던 것 같아요. 특히 설치미술에서도 제 작업 방식은 대부분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구현하는 작업은 협업으로 진행돼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경험이 많지 않았죠. 그런데 몇 년 전 작업을 쉬면서 바느질이라는 걸 처음 해봤어요. 헌 이불을 뜯어서 처음으로 만든 게 거실에 있는 코끼리 인형이에요. 그때부터였을 거예요. 인형, 그릇은 물론 조명까지 마음을 준 모든 물건의 기본은 핸드메이드예요. 그러다 보니 집도 이렇게 손맛 나게 꾸밀 수 있는 것 같아요.”
타고난 수집가인 정혜승 씨는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나뭇가지나 돌을 모으기도 하고, 거기에 색을 칠하거나 툭 놓아 자신만의 설치 작업을 완성했다. 이렇게 물건 사이의 관계를 찾고 그에 맞춰 수집품을 배치하다 보면 공간에는 마법처럼 개성과 정체성이 더해지고 그만의 스토리가 완성된다.
이 집을 고치면서 단독주택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는 구선모 실장. 집은 자고로 결로 없고 단열 잘되는 것이 기본이라며 기본기를 충실히 다진 김정홍 대표. 그리고 공간에 다정하고 따스한 진짜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정혜승 씨 가족. 예쁘고 번듯한 집을 찾아 사진 속에 폼 나게 담아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이들처럼 서로를 채워주는, 함께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를 듣는 것 아닐까.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대문 앞 놀이터에 아이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차 소리가 아닌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맑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게 생경하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더라고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다가도 아이들 노는 소리를 들으며 마당에 물 주고 잡초 뽑기를 하다 보면 또 언제 그랬나 싶어요.”
디자인과 시공 구선모(사사이프로젝트, 02-737-2117), 김정홍(다나 디자인, 02-518-2201)
- 설치미술가 정혜승의 연희동 주택 개조기 헌 집 주고 '내 집'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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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하고 나면 편집부로 문의가 쇄도하는 집이 있다. 작더라도 아이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마당, 자연을 벗 삼아 사는 여유로운 일상, 실용적이면서도 재치 있는 아이디어…. 여러 가지 이유로 ‘딱 내가 찾던 집’이라 여겨지는 그 집에는 사실 공통점이 있다. 잘 꾸민 인테리어나 집 규모보다 다정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가족의 이야기가 먼저 읽히는 집. 설치미술가 정혜승ㆍ공윤영 부부와 네 살 유하가 사는 소담한 이층집도 그런 집이다.#주택 개조 #정혜승 #연희동 레노베이션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6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