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와 문화, 전통을 중요시 여기는 레스토랑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든 윤가명가의 전시관. 조선 정조대왕의 행차도 같은 궁중 기록화를 새겨 넣어 주문 제작한 그릇으로 상차림을 선보였다.
공예가 맛있는 집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 주관한 의 하이라이트 전시는 바로 주제관 ‘공예가 맛있는 집’. 서울을 비롯해 전라도, 경상도의 맛집 중 공 예품을 식기로 사용하는 식당 다섯 곳과 한국 전통의 맛을 살린 석계종가의 오찬 상차림을 만나보자.
고즈넉한 한옥을 연상시키는 고두반의 전시관. 직접 만든 분청사기 그릇으로 정갈한 상차림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백자 속에 담긴 정갈함 달개비
백자의 매력은 넉넉한 자태와 꾸미지 않은 듯 한 담백함에 있다. 달빛처럼 희고 고운 자태를 보노라면 마치 어떤 음식이든 품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달개비는 백자의 멋을 한껏 살린 상차림을 선보이는 콘퍼런스 레스토랑이다. 전통 방식으로 빚은 막걸리, 통대나무에 수수ㆍ찹쌀ㆍ조 등을 넣어 지은 밥과 숯불구이가 주메뉴인 이곳은 여러 작가에게 부탁해 특별 제작한 공예품을 사용해 손님상을 차려낸다. 또 달항아리로 유명한 김판기 작가, 유세림 작가, 이영호 작가 등의 공예품을 전시 및 판매한다. 2009년부터 해마다 ‘버금이전’을 열어 신진 작가를 뜻하는 버금이들을 지원하며 공예의 가치를 알리는 데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다.
공예품을 식기로 사용하는 식당 다섯 곳을 선정해 이기조 작가가 직접 빚은 ‘2015 공예가 맛있는 집’ 백자 명판을 수여했다.
정감 어린 농민 밥상 고두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고두반은 국내산 콩과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 시절식을 차려내는 곳이다. 가마솥을 사용해 옛날 방식으로 만든 손두부로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 고두반은 분청사기로 풋풋하면서 정겨운 밥상을 차려 눈길을 끌었다. 투박한 질감과 독특한 무늬가 매력적인 분청사기 그릇은 최성자 대표의 남편인 김정윤 씨가 콩깍지, 나비 등 다양한 모양으로 직접 디자인한 후 1000℃가 넘는 장작 가마에서 구워낸 것이다. 정성을 다해 만든 그릇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내고 싶다는 주인장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통대나무에 수수, 찹쌀, 조 등을 넣어 지은 밥을 선보이는 콘퍼런스 레스토랑 달개비는 김판기, 유세림, 이영호 작가의 백자를 사용해 기품 있는 상차림을 제안했다.
‘제7차 세계물포럼’에서 한글 최초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 속 음식을 재현한 상차림을 선보인 석계종가. 이세용 작가의 그릇, 꽃 센터피스로 꾸민 테이블이 눈길을 끌었다.
놋그릇에 담긴 궁중 음식 궁
유기는 음식 맛과 영양을 보존하고 살균 효과가 뛰어나 음식을 담을 때 더없이 좋은 그릇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이나 전통있는 사대부집에서 주로 사용하곤 했다. 요즘 유기는 현대적 디자인을 입어 그 기능과 가치를 새롭게 주목받고 있는데,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한정식집 궁은 故 황혜성 궁중음식기능보유자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으로, 궁중 음식을 방짜 유기에 담아 격조있는 상차림을 제안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젊은 감각으로 실용적인 쓰임새를 더한 ‘놋그릇 가지런히’의 유기 그릇으로 상차림을 해 공예품이 일상생활과 동떨어져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색다른 한식을 제안하는 모던 한식 레스토랑 콩두는 숨 쉬는 그릇인 옹기를 사용한다.
궁중 기록화를 품은 그릇 윤가명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법.” 세계 미식가들이 인정하는 미슐랭 가이드 별 두 개를 받은 한식당인 도쿄의 ‘윤가’를 본점으로, 최근 롯데 에비뉴엘에 문을 연 윤가명가의 상차림을 보면 이 말이 실감 난다. 옛것을 보존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직접 주문 제작한 그릇의 특징은 궁중 기록화를 새겨 넣은 것. 조선 정조대왕의 행차도가 그려진 그릇에 정갈하게 한식을 담은 상차림을 보면 한국 역사와 문화가 오롯이 느껴진다. 음식에 담아내고자 한 옛 선조의 해학과 철학을 표현하기 위해 권오학 작가와 함께 만든 그릇이 돋보였던 공간이다.
故 황혜성 궁중음식기능보유자의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는 궁은 나뭇결이 살아 있는 테이블 위에 유기 그릇을 놓았다.
단단함과 접착성, 광택이 뛰어난 옷칠을 입힌 컵은 박강용 옻칠장의 작품.
투박하지만 멋스러운 옹기 콩두
콩은 한식의 근간이 되는 발효 음식과 장을 만드는 기본 식재료다. 한식의 맛을 좌우하는 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다양한 한식 메뉴를 선보이는 모던 한식 레스토랑이 바로 콩두다. 옹기는 미세한 기공을 통해 온습도를 조절하는 효능이 있어 음식의 신선도를 오랫동안 유지해준다. 콩두의 상차림이 인상 깊었던 것 또한 바로 이러한 옹기에 음식을 담아냈기 때문이다. 투박하다고만 생각한 옹기를 정갈한 상차림으로 풀어낸 감각이 돋보였다.
목공예 작가의 가구와 도예 작가의 그릇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볼거리가 쏠쏠했던 공예가 맛있는 커피&차 전시관. 향긋한 커피도 시음하면서 쉬어갈 수 있어 큰 인기를 끈 공간이다.
음식디미방을 재현하다 석계종가
<음식디미방>은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에 살던 장계향 선생이 조리법을 정리해 엮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다. 1600년대 조선 중기 경상도 양반가의 조리, 저장, 발효, 식품 보관, 술 빚는 법 등 1백46가지 조리법을 소개하는 지침서로서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한국의 대표 종갓집 중 하나인 석계종가의 13대 종부 조귀분 씨는 지난 4월 대구에서 열린 ‘제7차 세계물포럼’에서 <음식디미방> 속 음식인 대구껍질누르미, 섭삼산, 전복찜을 그대로 재현해 주목을 받았다. 그 당시 상차림을 이번 <공예가 맛있다>에서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테이블 위를 가로지르는 연못과 꽃 센터피스 그리고 이세용 작가의 도자, 유기 커틀러리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기품 있는 상차림이 돋보였다.
지금은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옹기의 쓰임새를 고민한 옹기 전시관.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옹기장들의 작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옹기가 만든 맛의 비밀
숨 쉬는 그릇이라 불리는 옹기는 통기성과 저장성, 발효성이 뛰어나다. 그런데 생활과 주거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도시에서 장독대가 있는 풍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 기획관 1 ‘맛의 비밀, 숨’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옹기의 현대적 쓰임새를 고민한다. 투박한 장독이라고 여긴 옹기에 작가의 손길이 더해져 감각적 디자인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서울시 무형문화재 배연식 옹기장이 내놓은 ‘푸레도기’는 푸르스름한 도기라는 뜻의 궁궐용 발효 저장 용기로, 현대 생활양식에 어울리는 독특한 조형미로 눈길을 끌었다. 또 안시성 작가는 다양한 기능과 디자인을 가미한 항아리ㆍ그릇ㆍ저그 등을 통해 일상생활에서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 옹기를 제안했고, 칠량봉황옹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정영균 작가는 붉은빛이 도는 독특한 형태의 옹기를 선보였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목공예 작가로서 우직한 길을 걷고 있는 서기열 작가는 대중적인 감수성을 반영한 소반을 선보였다.
공예가 맛있는 커피와 차
멋스러우면서도 실용적 쓰임새가 돋보이는 공예품이 커피와 차와 만났다. 기획관 2 ‘공예가 맛있는 커피&차’에서는 원목 가구&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메도유두의 테이블과 1인 소파, 비스트럭쳐의 철제 스툴 등 다양한 목공예품으로 카페 공간을 꾸몄는데, 실용성과 디자인을 두루 갖춘 젊은 작가의 그릇도 눈에 띄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아 거칠거칠한 겉면이 매력적인 현상화 작가의 머그잔,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오래된 커틀러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든 티 포트와 접시ㆍ머그잔을 선보이는 김하윤 작가의 작품, 놋그릇 가지런히의 저그, 디저트 접시 등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직접 써보고 싶은 공예품이 가득했다. ‘길 따라 인연 따라’의 다도실에서는 작약과 연잎차 등을 찻잔에 따라 마셔볼 수 있는 다도 체험도 함께 진행했다.
1, 2 백자 고유의 단아한 멋을 잘 보여주는 이기조 작가의 주전자와 유연한 곡선미가 돋보이는 김선미 자가의 접시와 하늘색 볼.
문턱을 낮춘 작가의 공예품
공예품의 대중화와 생활화를 위해 공예 작가 열한 명의 작품으로 꾸민 ‘작가관’ 역시 주목받았다. 작품은 으레 화려하거나 웅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공예품이 생활 속에서 실용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여실히 드러났다.
1 김수영 유기장 - 젊어진 유기 그릇
안성유기공방을 이끌어나가는 김수영 장인은 놋그릇을 한층 젊게 디자인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유기로 만든 찬합에 검은색을 옻칠해 세련되면서도 모던한 감각이 돋보였다.
2 저집 - 새 옷을 갈아입은 젓가락
식탁 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젓가락이 작가의 손길을 거쳐 멋진 공예품으로 탄생했다. 젓가락 갤러리 저집은 젓가락 위에 물방울 자개, 꽃 자개, 나전 패턴 등을 입혀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느낌을 살렸다.
3 도예가 이기조 - 백자의 향연
이기조 작가는 조선백자의 전통을 살리되 현대적 미를 더한 백자를 선보였다. 유백색을 띠는 매끈한 표면이 정갈하고 단아한 느낌을 준다. 현대식 생활에 맞추어 도자기 형태와 두께를 바꿔나가며, 같은 그릇이라도 깊이와 크기를 달리해 실용성을 높였다.
4 금속공예가 허명욱 - 금속공예와 옻칠의 만남
허명욱 금속공예가는 동판을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 독특한 질감을 낸 뒤 옻칠로 마무리한다. 빈티지한 느낌을 자아내면서도 옻칠의 색감이 고급스럽다.
5 빈콜렉션 - 패브릭의 우아한 변신
상주명주, 한산모시, 풍기인견 등 우리나라 고유한 소재를 활용해 멋스러운 이불, 조각보 등을 만드는 빈콜렉션 강금성 대표의 작품. 은은한 빛을 띠는 단아한 색상이 멋스럽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최정철 원장
공예품은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음식과 공예는 많은 점이 닮았습니다. 모두 만든 이의 손맛과 정성이 깃들어 있지요. 이번 전시를 통해 공예품과 음식의 관계를 재조명하면서 공예는 이미 우리 생활 속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공예가 맛있는 집’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참여한 식당들은 공예를 식기에 한정하지 않고 음식을 완성하는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곳이지요. 음식 종류와 식당의 분위기, 상차림의 성격에 맞는 식기를 엄선해 사용하는 것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공예의 가치와 음식을 잘 접목해 운영하는 식당을 선정해 공예가 맛있는 집이라는 특별 제작한 명판을 수여하면서 건강하고 풍요로운 식문화를 조성해나 갈 예정입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김보경 프로젝트 매니저
공예는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공예 작가 작품은 값비쌀 거란 인식이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전을 기획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공예품의 가치를 적극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작년 전시와 달리 올해는 ‘맛’에 더 집중했지요. ‘공예가 맛있는 집’에 참여한 식당의 실제 상차림을 그대로 옮겨오고, 커피&차 전시관에서는 가구와 젊은 작가들의 공예품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노력했습니다. ‘저렇게 테이블 위에 그릇을 올려놓으면 되는구나. 나도 따라 해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도록 공예품의 쓰임을 보여주며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지요. 공예와 식문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예요. 그릇을 사용할 때 깨지지 않고, 편한 것도 중요하지만, 그 가치를 알고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하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훌륭한 작가가 많은데, 작가라고 해서 무조건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 공예가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 이번 전시의 목적이었습니다. ”
- 공예, 일상에 스며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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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5일부터 6월 9일까지 문화서울역 284에서 전이 열렸다. 도자와 옻칠, 옹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3백여 명의 작가와 장인이 참여한 이번 전시에서 공예품은 더 이상 다가가기 어려운 대상이 아니다. 보는 공예에서 쓰는 공예로, 멋과 쓰임을 두루 갖춘 생활 예술품으로 그 존재감을 확고히 드러냈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7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