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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 아뜰리에의 새로운 도전 계동별곡
계동의 한적한 골목, 1백 년 묵은 나무 대문 너머 옷을 짓는 남자가 있다. 위빙 작가인 어머니가 손수 베틀로 짠 원단은 남자가 짓는 옷의 특별한 재료가 된다. 세상에 하나뿐인 옷감과 디자인으로 완성한 디자이너 허유의 맞춤옷과 옷감을 짓다 예술이 된 정영순 선생의 위빙 아트워크. 서로 영감을 주고 받으며 진정한 협업의 가치를 보여주는 램LAMB 아뜰리에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았다.

삼청동과 계동에서 패션 편집매장과 아틀리에를 운영한 램의 허유 대표와 위빙 작가로 활동하는 어머니 정영순 선생. 얼마 전 작은 한옥을 개조해 아틀리에로 꾸민 모자는 이 작은 공간에서 태피스트리, 초 만들기 등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색이 있는 숍을 발견할 때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걱정이 앞선다. 13년 전 삼청동 골목에 오픈한 간판도 없는 패션 편집매장 램LAMB을 삼청동이 아닌 계동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그런 기분이었다. 이탈리아로 그림 유학을 떠났다 패션으로 전향한 디자이너 허유가 북적이는 삼청동을 떠나 한적한 계동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트렌드와는 거리가 먼, 느린 패션을 지향하는 그의 고집이 반영된 결과. 소량이나마 직물을 직접 짜서 자신만의 작업을 해보고 싶던 그는 취미로 태피스트리tapestry를 짜는 어머니에게 자신만의 원단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했고, 아예 쇼룸 옆에 직조 공간인 램 아뜰리에를 오픈했다. 하나뿐인 옷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하루 종일 베틀이 돌아가는 램 아뜰리에와 묵묵히 활동하는 신진 디자이너의 패션 아이템을 소개하는 편집매장 램. 따로 또 함께하던 두 공간이 이제 계동의 자그마한 한옥에 합쳐졌다. 무엇보다 패션과 위빙, 전통한옥과 현대 디자인, 주거와 아틀리에, 배움과 나눔 등 진정한 협업의 의미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이다.

패션과 위빙, 머리가 아닌 손으로 얻는 지식
직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패션 디자이너에게 마음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재료에 대한 탐구, 램 아뜰리에의 시작은 이런 단순하면서도 정직한 생각이 단초가 되었다. “보통 디자인을 한 후 디자인에 맞는 원단을 찾는데, 딱 이거다 싶은 원단을 찾지 못할 때가 많아요. 제 디자인에 더 가깝고 독창적인 원단이 없을까 고민하다 아예 직접 실을 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취미로 태피스트리를 하는 어머니께 의복용 원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1 직조를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만큼의 실을 감은 다음 베틀에 연결해야 한다. 감은 색실을 그릇에 넣어두었을 뿐인데 자체로 오브제가 된다. 
2 코스터는 허유 대표가 태피스트리를 배우면서 처음 만든 작품. 네팔 여행에서 산 양 오브제, 정영순 선생이 짠 북 커버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온기를 더한다. 
3 공간 곳곳에 펼쳐진 직물 조각들은 램의 옷에 어울리는 원단을 만들다 얻은 의외의 수확물이다. 코스터를 만들다 쭉 연결하니 족자처럼 기둥을 감싸는 작품이 되었다. 

어머니 정영순 선생은 아들을 위해 기꺼이 서양식 직기를 이용해 직물을 짜는 법을 배웠다. 전통 태피스트리가 수직 판에 날실을 걸고, 씨실로 덮어 무늬를 짜 넣는 방식이라면 위빙weaving은 베틀에 필요한 만큼의 실을 감은 다음 작은 구멍에 실을 일일이 끼워 씨실을 마련하고 여기에 날실을 엮어 문양과 조직을 만드는 수평 직조 방식이다. 피아노만큼 큰 베틀에 실을 차곡차곡 엮어 면을 넓혀나가고 씨실과 날실을 요리조리 엮어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 넣는 일은 고된 과정만큼 희열이 크다. 물론 창작 과정에 이르려면 기술 이상의 무엇이 필요한데, 정영순 선생은 이미 당신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을 정도로 감각과 솜씨가 남달랐다고 한다. 간호사로 일하면서도 틈틈이 뜨개를 배우고 간호 과장이 되면서 여유가 생기자 태피스트리를 섭렵한 그는 램만의 독창적 원단을 짜기 위해 못다 한 위빙 기법까지 사사를 받았다. 여기에 어릴 때부터 옷을 만들어 입던 손재주까지 더해졌으니 그가 짠 원단은 기술도 기법도 가히 창작품에 가깝다. 그는 한 가지 색깔의 실과 고정된 방식으로 무늬를 만들지 않는다. 허유 대표가 입던 셔츠를 결대로 잘게 찢어 실로 사용하기도 하며, 실 대신 나뭇가지를 툭 넣거나 창문처럼 비워두기도 한다. 아들이 유학 시절 그린 그림을 위빙으로 표현해 내기도 했는데, 이처럼 손에 밴 감각을 위빙 아트로 승화한 것은 모두 ‘사장님’의 교수법 덕분이라고 한다(정영순 선생은 아들 허유 대표를 ‘사장님’으로 존칭한다).

그런가 하면 허유 대표는 요즘 태피스트리를 배운다. 어머니가 취미로 짠 태피스트리 작품을 보기만 할 때는 예쁘다는 느낌 정도였는데, 직접 짜보니 창작 욕구가 샘솟는 것은 물론 문양 하나하나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마치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의 작품처럼 손바닥만 한 코스터 한 장에도 온 우주가 담겨 있는 느낌이랄까. 직물이 꼭 옷으로 만들어지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오브제가 되고, 손으로 하는 작업이 인정받기를 기대하는 마음. 처음에는 쇼룸으로 구상한 한옥을 손으로 만드는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는 ‘아틀리에’로 완성한 것은 이 때문이다.

1, 4 램의 디자인에 한층 가까운 의복용 원단을 만들기 위해 위빙 작업을 시작한 정영순 선생. 날실과 씨실을 엮어 자신만의 문양을 만드는 과정에서 창작의 기쁨이 크다. 
2 오픈 하우스 때 선물 받은 꽃을 허유 대표가 재구성해 꽂았다. 평소 쓰지 않는 빈 병에 담아 장식한 감각이 돋보인다. 
3 한옥 특유의 깊은 방은 정영순 선생의 방. 오른쪽 벽면에 장을 짜 넣어 살림을 깔끔하게 수납했다.

전통과 현대, 감각은 시대를 초월한다
허유 대표가 3년 전 구입한 작은 한옥은 방 두 개와 ㄱ자형 마루, 부엌, 마당과 장독대로 구성한 구옥이었다. 낡아서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따스한 햇살이 주는 안온한 느낌이 좋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는 그는 이곳에 살면서 언젠가는 리모델링해 숍이나 아틀리에로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단다.

“삼청동, 계동 모두 공사를 진두지휘했을 정도로 공간에 대한 애착이 컸어요. 밑그림은 물론 동선, 자재 선택까지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리니 공사가 더뎌질 수 밖에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좀 놓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전통 주거 공간을 현대 생활의 쓰임에 맞게 바꾸는 일이라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고, 젊고 생각이 참신한 디자이너를 찾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인연이 참 재미있는 게, 비슷한 시기에 이런저런 자리에서 마주친 디자이너가 바로 그라브의 남궁교, 이병익 디자이너예요.”

디자인을 맡은 그라브의 두 실장이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옛것과 새것의 조화다. 한옥은 내부 목재의 구조미가 드러나 있고 일정한 크기로 공간이 분절되어 본연의 이미지가 강렬하기에 기존 한옥과 새로운 공간의 괴리감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선 오랜 시간의 상징이요, 한옥만의 아이덴티티인 서까래와 보는 최대한 살렸다. 지붕선 아래 공간은 단순한 구조와 하얀 벽면으로 기본 틀을 잡고, 형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의 채광을 확보하기 위해 천창을 시공했으며, 기존 한옥의 천장고가 낮아 자칫 답답해 보일 수 있는 우려는 거실 한쪽의 통창으로 보완했다. 또 공사를 시작하기 직전까지 쇼룸인지 아틀리에인지 혹은 쇼룸 겸 아틀리에인지 용도가 뚜렷하게 정해지지 않은 터라 그야말로 여지를 남겨둔 ‘융통성’ 있는 공간 구성이 관건이었다. 두 실장은 기존 한옥과 확장하는 공간의 조화에 중점을 두면서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담아낼 수 있는 중립적 공간을 완성하기 위해 단순한 컬러와 물성을 활용했다.

1 햇살 좋은 날,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작은 마당. 옛 한옥을 보존하며 현대적 쓰임새를 더하기 위해 마당 일부를 확장하고 천창과 통창을 시공했다.
2 주방에서 바라본 거실. 

우선 작은 방과 부엌은 하나로 확장해 널찍한 부엌과 다이닝 공간으로 완성했다. ㄱ자형 마루는 삼각형 형태로 확장하고 확장한 만큼 천창을 시공해 햇살 가득한 거실이 되었는데, 현재는 위빙 작업장으로 활용한다. 방 하나를 제외하고 주방과 거실이 벽과 문 없이 오픈된 구조로 주방에 하얀 타일을, 거실에 마루재를 시공해 공간을 시각적으로 자연스럽게 분할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은 한옥이지만 답답해 보이지 않고, 하나로 트였는데도 산만해 보이지 않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가지. 통창 너머 담벼락에 무심히 놓인 ‘L’ ‘A’ ‘M’ ‘B’ 라는 조형물은 사실 이전 쇼룸에서 쓰던 간판이다. 장독대로 사용하던 광을 철거해 생긴 담벼락의 낡은 흔적 역시 그대로 두었는데, 지인들이 어떻게 저런 질감을 만들어냈느냐며 흥미를 보인단다. 고물상에서도 주워가지 않을 간판을 굳이 가져온 이유, 한옥의 흔적을 지킨 것처럼 램의 철학과 초심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리라.

배움과 가르침, 누구에게나 영감이 된다
그야 말로 ‘융통성’ 있게 완성한 한옥은 현재 위빙을 비롯해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는 아틀리에로 열려 있는 공간이다. 정영순 선생이 기거하는 거실 한쪽의 길쭉한 방은 허유 대표의 의상을 소개하는 작은 쇼룸이자 게스트룸으로 활용할 수 있는 가변적 공간. 태피스트리 전문가를 초빙해 한달 특강을 진행하며 자신 역시 태피스트리의 매력에 푹 빠진 허유 대표는 초 만들기 워크숍도 기획했다.

3 허유 대표의 그림을 모티프로 짠 정영순 선생의 태피스트리 작품. 
4 이웃 한옥의 지붕을 볼 수 있도록 담장의 일부를 털어냈다. 광을 뜯어낸 자리와 계동에서 떼어온 간판이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5 직조하면서 동시에 패턴을 만든 옷은 어머니 정영순 선생의 작품.

“평소 아끼는 이 빠진 그릇에 소이 왁스를 부어 만드는 컨테이너 캔들, 천연 밀랍으로 만든 핸드 디핑 캔들, 한 땀 한 땀 실을 엮어 완성한 컵 받침, 북 커버 등은 모두 소소한 물건이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성취감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죠. 수고를 더하며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해 완성하는 수작업의 가치를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요.” 이곳에서 진행하는 태피스트리, 위빙 워크숍은 실 선택부터 색상 조합까지 모두 창작에 맡긴다. 꼼꼼하게 잘 짜든 들쑥날쑥 짜든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다. 어떤 그림이나 문양을 보고 똑같이 짜는 것보다 풍경이나 사진을 보고, 혹은 TV의 한 장면을 보고 문득 느껴지는 자신만의 감상을 일기 쓰듯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렇게 창작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들뜬 마음이 안정되고, 복잡한 생각을 비울 수 있다. “처음 취미로 태피스트리를 할 때는 심리적 안정감, 힐링이 되는 점이 좋았어요. 위빙을 배우고 처음 커튼을 짤 때 사장님이 답답하게 짜지 말고 창을 내면 어떠냐고 한마디 툭 던지셨는데, 그 말 한마디에 세상 어디에도 없는 디자인의 제 첫 작품이 탄생했죠. 힐링 그 이상, 창작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었죠. 사장님은 제 아들이지만, 예술적 관점으로 조언을 해주는 훌륭한 선생님이기도 해요.”

패션이나 디자인에 문외한이지만 태피스트리에서는 전문가인 어머니는 아들에게 디자인적 자극을 주고, 아들은 어머니의 잠재된 예술적 재능을 알아봤으니 그야말로 환상의 호흡 아닌가. 나이나 관계를 떠나서 서로 존중하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모자의 아름다운 협업. 손으로 하는 작업의 가치를 알아보는 공통된 취향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램 아뜰리에’를 응원하는 이유다.

글 이지현 기자 | 사진 박찬우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4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