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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와지붕 아래 뉴질랜드 아가씨와 고양이 두마리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서울 지국장 아나 파이필드 씨가 한국에 온 것은 2년 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서른한 살의 금발 아가씨는 뜨끈뜨끈한 온돌에 열광하고 된장찌개를 끓여 먹는 경지에 이르렀다. 고양이 치치, 코코와 함께 가회동의 작은 한옥에 살고 있는 그는 전생에 자신이 한국 사람이었을 것이라며 확신에 찬 미소를 건넨다
한옥에는 모름지기 진돗개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무 대문이 삐그덕 열리면 손님을 향해 짖는 멍멍 소리에 익숙해진 탓일까? 때문에 두 마리의 고양이가 조용히 어슬렁거리는 아나 파이필드Anna Fifield 씨의 가회동 한옥에 들어섰을 때 묘한 이질감이 공기 속에 흐르는 듯했다. 아나 씨는 뉴질랜드 태생으로 스물네 살 때 영국 런던으로 옮겨가 살았고, 2년 전에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inancial Times의 서울 지국장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세계를 두루 체험해보는 것이 꿈이라는데, 이런 그의 집에는 지구본만 여섯 개. 이 같은 성향을 지닌 덕분인지 그는 한국의 문화와 생활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툴지만 그간 배운 한국말도 곧잘 하고, 한국 음식도 즐겨 먹는데다가 결정적으로 한옥에 보금자리를 마련했으니, 한국에서의 생활은 이제 단순한 체험을 넘어선 듯하다.

평소 경복궁과 창덕궁, 삼청동과 가회동 일대를 오가며 기와지붕의 선, 돌과 기와로 쌓은 담 등 한옥의 멋에 반하고, 한옥마을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참 매력적이라고 느꼈던 아나 씨. 급기야 원래 살던 이태원의 빌라를 정리하고 가회동 한옥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회사인 종로 수송동과도 지척이니 금상첨화. 하지만 새 집과 인연 맺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더구나 이제 갓 정을 붙이기 시작한 이국에서 전통 가옥을 구하기란 만만치 않은 노릇이었다. “거의 1년 동안을 찾아다녔어요. 말도 잘 통하지 않았지만 가회동과 삼청동 일대 부동산을 찾아다니며 내놓은 한옥을 일일이 가서 봤지요. 있는 그대로 운치가 있으면서 또한 살기 편하게 현대적인 설비가 갖춰진 한옥이 흔하지 않더군요. 결국 기존 한옥을 레노베이션 해서 살게 되었어요. 그렇게 어렵게 발견하고 완성한 집이 바로 이곳이지요.”

(위) 아담한 마당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아나 파이필드 씨. 그는 까만 얼룩무늬 고양이 코코, 노란 고양이 치치와 함께 산다. 담 아래로는 소박하게 꾸민 화단이 펼쳐진다. 대문 옆 나무문은 신발 수납장으로 아나 씨가 이 집에서 특히 마음에 들어 하는 부분이다.
1 대문 너머로 보이는 작은 마당과 장독.
2 고양이 코코가 툇마루에 앉아 마당 감상이 한참이다. 마당을 어슬렁거리며 바깥 공기와 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은 고양이 식구들에게도 행복한 일이다.
3 댓돌 위에는 아나 씨가 전통 문화 축제에 참가했을 때 받은 짚신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빨간 꽃잎이 바람에 떨어진 모습이 그대로 기분 좋은 그림을 이룬다.

모던 소파에 앉아 운치 있는 마당을 바라보다 꼬불꼬불한 언덕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타나는 이 한옥은 아담한 마당을 끼고 있는 ㄷ자형이다. 그는 집을 개조하면서 무엇보다 겨울 추위를 대비해 안쪽 창호지를 유리로 교체하는 데 신경을 썼다. 그런데 단순히 찬바람을 막기 위한 이 조치가 의외의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종이 창호일 때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이 덤으로 딸려온 것. 이중 창호의 바깥 종이 창호는 열고 안쪽 유리 창호만 닫아놓으면 바람은 차단되면서도 나무 창살 사이로 마당이며 담이며 하늘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온다. 마당의 바닥에는 맷돌이며 자연석이 곳곳에 깔려 있고 한쪽 담 아래로는 기와로 경계를 만든 작은 화단도 있다. 그 너머로 장독 몇 개도 놓여 있다. 서양 아가씨가 장독으로 과연 무엇을 할까, 호기심에 뚜껑을 열어보니 된장, 고추장이 발효되는 대신 가드닝 도구가 보관되어 있다. 장 담글 일은 없다지만 화단 옆의 수납공간을 놀리기 싫었던 아나 씨의 탁월하고도 기발한 선택. 본래 용도에 개의치 않고 필요대로 소품을 이용하는 센스가 빛난다.


1 검박한 선비가 썼을 법한 작고 낮은 책상 위에 놓인 것은 아나 씨의 노트북. 안으로 숨긴 책장은 치치가 낮잠 장소로 애용하는 곳.
2
간결하고 모던한 디자인의 소파와 식탁은 창으로 환히 들어오는 햇빛, 서까래 천장과 의외의 조화를 이룬다.
3 안방에는 침대 프레임 없이 바로 매트리스를 놓았다. 이곳에서 아나 씨는 온돌의 따뜻함을 만끽하며 책이나 최신 잡지를 읽는다.
4 중국 앤티크 장 위에 놓인 지구본들. 아나 씨는 세계를 두루 체험해보는 것이 꿈이다.

집안은 그의 스타일대로 현대적이고도 편안하게 꾸며놓았다. ㄷ자형 구조를 따라 침실, 거실, 부엌, 옷방, 화장실이 차례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미혼인 그가 사용하기에 실용적일 듯한 심플한 가구들과 우연한 기회에 호기심 반, 필요 반으로 구입한 동양 앤티크 장이 공간을 채운다. 수십 개의 서랍이 달린 중국 앤티크 약장은 액세서리와 잡다한 소품을 보관하는 데 그만이란다. “주방과 화장실도 현대식으로 꾸며놓았고, 벽면 속에 숨긴 서랍장에 수납공간을 마련해서 살기 편하답니다. 이렇게 아늑하고 아름다운 집에 살 수 있는 기회가 어디 그리 쉽게 오겠어요? 때로는 마치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빠지기도 해요.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그리고 동네가 도심 가운데에 있지만 소음 없이 조용하고 한적한 것도 마음에 들고요.” 아나 씨의 집에 놀러오는 외국인 친구들도 대들보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고 다니면서도 부러움을 금치 못한다고. 본지 10월호에 소개되었던 갤러리 고색 박정아 대표는 한국인 친구로서 그에게 한옥 꾸밈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하는 사이. “한옥과 모던한 가구의 스타일이 서로 부딪히지 않도록 잘 꾸며놓았어요. 우리 한복 천으로 만든 복주머니, 쿠션 등을 매치하면 멋진 포인트가 되겠죠.” 한옥에 걸맞은 분위기를 한국 사람 못지않게 근사하게 연출한 아나 씨에게 격려 차원에서 작은 복주머니를 선물하기도 했다.

5 한때 영국에 살았던 박정아 씨와 영국에서 온 아나 씨가 오랜만에 담소를 나누고 있다.
6 앤티크장 위에 놓인 향 주머니는 박정아 씨가 선물한 고색 제품.

뜨끈한 아랫목이 좋아 매트리스를 바닥에 깔다 하지만 아무리 아나 씨가 한옥의 멋과 운치를 그처럼 좋아한들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몸을 지지는 맛까지 알 수 있으랴. 물어보니 웬걸, 이제 온돌 없이는 못살겠단다. 바닥부터 뜨끈하게 올라오는 온기가 좋아 침대도 프레임을 버리고 매트리스만 깔아놓았다. 어디에선가 땅을 가까이 할수록 자연의 기氣를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이 온돌 바닥 바로 위에서 잠을 자며 그런 기분을 느낀다고 전한다. “안방의 온돌뿐만 아니라 한옥에 산다는 것 자체가 땅의 기운을 받는 일 같아요. 단순히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도 몸이 좋아지고 있답니다. 마감에 쫓기는 기자라는 직업상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언제나 피곤하게 마련인데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후로는 한결 안정이 돼요. 몸과 마음, 모두 다요.”

한옥으로 이사와 흡족해하는 것은 아나 씨만이 아니다. 그의 둘도 없는 식구인 코코와 치치 또한 마찬가지. 답답한 빌라에서 실내에만 갇혀 살다가 마당과 집안을 자유자재로 드나들게 된 두 마리의 고양이는 이 집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고, 아마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전했을 것이다. 아나 씨가 낮고 작은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있으면 앞쪽 벽체 안 책꽂이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치치가 슬며시 나와 머리를 비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을라치면 쪽마루 위에서 햇볕 쬐며 앉아 있던 코코가 창을 타고 넘어와 식탁 위에 발자국을 내면서 집안으로 들어온다. 금발 머리 아가씨와 두 마리 고양이가 이루는 태평스러운 한옥 풍경이다. 아나 씨는 된장찌개, 계란찜, 감자전과 같은 한국 음식을 좋아해 곧잘 집에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아직 한국 사람에게 그 맛을 검증받은 바는 없으나 자신이 먹어보기로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전한다. 가끔 전생에 자신이 한국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곤 하는데, 한국 생활이 자신에게 잘 맞고 즐거운 것뿐만 아니라 연신 ‘빨리빨리’를 외쳐대는 급하고 괄괄한 자신의 성격만 봐도 다시 한 번 깊은 확신이 든다고. 앞으로 2년 정도 더 한국에 있을 예정인데 상황이 허락한다면 계속 머물러 있고 싶단다.

1 부엌 공간은 작지만 실용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각종 조리 도구와 소스, 양념통이 선반을 따라 줄지어 진열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한국 음식부터 이탈리아, 영국 음식까지 동서양을 오가는 다양한 요리가 완성된다. 나란히 놓은 귀여운 그림 액자는 주방을 더욱 생동감 있게 만든는 요소. 그에 더해 주방 서까래 천장 아래로는 여러 병의 와인이 고이 쌓여 있고, 냉장고에는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부터 러시아 인형, 원더우먼, 마오쩌둥 모양 자석까지 개성 있게 장식되어 있다.
2 투명한 유리 식탁 위에 과일 그릇이 놓여 있고 그 너머로는 마당 한가운데의 나무가 내다보인다. 마치 한 폭의 정물화를 연상시킨다.

‘신토불이’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다. 제 땅과 몸은 둘이 아니라는, 제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를 먹어야 더욱 건강하고 이롭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집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서양의 주택 양식을 이미 우리의 집으로 받아들인 것처럼, 아나 씨도 한옥을 편견 없이 마음으로 받아들였기에 평온한 일상을 채워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코즈모폴리턴에게는 지구 전체가 곧 자신의 땅이며, 지구 위의 집이 모두 자신의 쉼터일지 모른다. 그런 코즈모폴리턴인 아나 씨는 추운 겨울을 오히려 기대감 속에 기다리고 있다. 눈이 오면 두 마리 고양이와 함께 대청마루 소파에 앉아 한옥 돌담과 마당에 소복소복 눈 쌓이는 풍경을 처음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손영선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06년 1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