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중심에 있는 사랑방은 엄마 수녀와 아이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사랑방 문 앞에 선 마을 이장 안 셀레나 수녀.
집집마다 나무가 자라고 있다. 감나무, 사과나무, 대추나무, 무화과나무… 여덟 채의 집 앞에는 언젠가 대롱 대롱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유실수가 한 그루씩 심겨 있다. 이곳 이름은 수국마을. 나무 수樹 자와 나라 국國 자로 이루어진 ‘나무가 자라는 나라’다. 수국마을은 1960년대 알로이시오 슈월츠 신부가 전쟁으로 혼자가 된 아이들을 위해 설립한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한다. 마리아수녀회는 한국에서만 지금까지 1만 2천 명 아이를 보살펴왔는데, 부산 암남동에 있는 수국마을에는 현재 중ㆍ고등학교 여학생이 약 1백 명 살고 있다.
1 수국마을에는 경사가 높은 곳에 지은 윗집과 낮은 곳에 지은 아랫집 두 가지 형태의 집이 있다. 이곳은 윗집 2층에 있는 주방. 칠판에 그린 그림은 감나무집 아이들의 작품이다.
2 왼쪽부터 건축가 우대성 소장, 마을 이장 안 셀레나 수녀, 마리아수녀회 대표 정말지 수녀.
3 윗집에는 옆집과 통하는 ‘비밀의 문’이 있다.
“이 집 좀 어떻게 해주세요”
오퍼스건축사사무소의 우대성 소장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아이의 대부이자 후견인으로 마리아수녀회와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던 중 2011년 마리아수녀회의 특별한 부탁을 받았다. 중ㆍ고등학교 여학생 1백여 명이 지낼 수 있는 집을 다시 지어달라는 것. 아이들이 살던 기숙사형 건물을 지금보다 좋게 바꿔달라는 얘기였다. 당시 아이들은 사생활이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공간에서 음식을 배급받아 먹었고, 당직을 선 수녀는 기숙사 사감처럼 아이들을 감시해야 했다. 1960년대에는 훌륭한 아동 보육 시설의 표본으로 주목받았지만, 50여 년간 이어온 운영 방식을 이제 바꿔야 했다. 수녀들은 세상이 달라지는데 50년 전과 똑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웠다. 거기에 맞물려 생활실 1실당 세 명 이하로 제한하고 시설 종사자가 아니면 그 집에 함께 살 수 없게 법이 개정되면서 변화는 필수가 되었다.
“이 집 좀 어떻게 해주세요.” 마리아수녀회가 우대성 소장에게 요청한 것은 단 한마디였다. 이 집을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에 빠진 우대성 소장은 “그저 깨끗하고 예쁜 집을 짓는 게 전부인가?” 스스로 질문했다. 기존 건물을 그대로 두고 공간만 작게 쪼갤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아이들이 지금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겠지만, 실제 삶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건축적 이야기와 삶에 관련한 이야기, 두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사실 건축을 하면 서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삶이 설계 전체를 좌지우지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집을 짓는 행위보다 삶의 패턴을 먼저 생각할 일이 없거든요. 집 형태나 공간의 구성 정도만 따지죠. 그런데 수국마을에서는 그런 게 의미가 없었어요.” 그러던 중 우 소장은 부산 ‘소년의 집’의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담은 책 한 권을 읽었다. “가명이지만 저와 동명이인인 대성이 이야기가 나와요. 휴일에 일을 하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대성이의 방을 저자인 수녀님이 정리하던 중 아이가 자기 힘으로 방 하나를 마련하느라 생애 마지막 2년을 힘들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그 작은 방이 사회에 던져진 대성이에게는 ‘꿈’의 종착지였던 거예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홀로 사회에 던져질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꿈을 심어줄 수 있을까. 건축으로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에 휩싸인 우 소장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며칠 밤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처럼 번쩍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 밤이었어요. 성탄 전야 미사 전에 <내 마음의 건축 2>를 읽고 있었는데, 찰스 무어의 시 랜치 콘도Sea Ranch Condominium의 모티프가 된 몬테프리오Montefrio 마을 조감도를 보고 번개를 맞은 듯한 영감을 받았어요. ‘바로 이거다!’했죠.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 같았어요.” 큰 집 한 채가 아니라 단독주택 여덟 채로 이루어진 마을. 누군가의 감독 아래 있는 게 아니라 가정의 구성원이 되어 아이가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집. 영감이 떠오르자 계획을 세우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 소장은 대구, 서울, 부산 등 아동 보육 시설을 돌아다니며 설문 조사를 했고 50년간 아이를 키워온 엄마 수녀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 소장은 수녀들이 자립 속에서도 다소 통제된 공간을 원한다는 걸 알았지만 감시나 통제를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의견 차를 좁히기 위해 수녀들과 오랜 시간 토론하고 설득했다. 다행히 마리아수녀회의 대표인 정말지 수녀가 우 소장의 계획에 공감했다. “소장님이 많은 이야기를 해준 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죠. 의도와 의향을 충분히 설명해주어 마음을 나눌 기회가 많았어요.” 그렇게 7개월이 지난 2012년 8월, 우 소장의 머릿속에만 있던 마을 모습이 조금씩 현실화되었다.
수국마을은 변화를 수용한 마리아수녀회가 있었기에 탄생할 수 있었다. 일반 사람보다 삶의 속도가 느린 수도자에게는 정말 어마어마한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수녀님들이 과연 이런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50여 년간 아이들을 키워온 노하우로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던 것 같았어요. 수국마을은 건축가의 힘으로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저는 단초를 제공한 것일 뿐 그걸 수용한 수녀님들과 아이들이 수국마을을 완성한 거예요. 특히 50년간 살아온 방식을 바꿔야 한 엄마 수녀님들은 공사 기간 동안 어떻게 마을을 운영할지 교육까지 받으셨어요.” 공공 기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녀들의 퇴직금을 당겨 받아 공사 비용을 해결한 것도 일이 척척 진행된 원동력이었다.
1 아랫집에 있는 아이들 방. 사용하던 캐비닛과 책상을 그대로 쓴다.
2 아랫집 1층에는 서재를 겸한 계단식 거실과 주방이 있다.
최고를 누려봐야 최고를 꿈꿀 수 있다
마을은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렸다. 원래 있던 팽나무도 그대로 두고 주변 작은 집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소박하게 설계했다. 경사가 높은 곳엔 집을 2층으로 쌓고 낮은 곳은 지하로 내렸다. 이장 수녀님이 방송을 하는 사랑방, 운동을 하거나 다 같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윗마당과 아랫마당을 만들었다. 윗마당이 있는 가운데 길을 사이에 두고 윗집, 아랫집 두 가지 형태의 집 여덟 채가 양쪽으로 줄지어 들어섰다. 약 264㎡(80평)인 집 한 채에는 엄마 수녀와 중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9~12명의 여자아이가 산다.
우 소장은 거실과 엄마 수녀 방을 집의 중심에 두고 아이 세 명이 함께 사용하는 방 서너 개를 만들었다. “졸업생 1만 2천 명이 서로 잘 알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끈끈하면서 느슨한 관계죠. 선배도 후배도 많지만 정말로 서로를 챙겨줄 사람이 없어요. 수국마을에서는 또래끼리 같은 방을 쓰니 서로 가까워지고 같은 집에서 함께 살아온 언니 동생과 친자매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지속적인 관계를 만들어주고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수국마을 집은 보통 가족에게도 꿈 같은 집이다.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널찍한 마당과 동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옥상이 있고,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계단식 거실에서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쾌적하고 넓은 주방에서는 편하게 요리할 수 있다. 게다가 혼자 있고 싶을 때 숨어 있을 방이 있다는 건 아이들에게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우 소장은 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을 떠난 아이들이 왔을 때 하룻밤 지낼 수 있는 작은 다락방도 만들었다. 이 집이 명절 같은 날 아이들이 언제든지 다녀갈 수 있는 친정 같은 곳이 되길 바랐다. 엄마 수녀 방과 아이들 방은 의도적으로 떨어뜨려놓았다. 곁에 있으면 감시하긴 좋지만, 아이들이 스스로 행동하게 하려면 물리적으로 멀리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그건 아이들을 신뢰하기에 가능했다. 수녀들은 아이들을 믿고 어느 정도 포기하는 법도 터득했다.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수녀회 내부는 물론 주변에서 부정적 의견도 많았다. 정말지 수녀는 그런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해 설명했다. “해줄 수 있을 만큼 해주고 싶은 우리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살다가 졸업 후 혼자가 될 아이들이 느낄 좌절감은 어떻게 할 거냐는 사람도 있었죠. 하지만 저희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어요. 최고를 누려봐야 최고를 꿈꿀 수 있다는 것을요. 내 집이 여기다, 이곳에서 행복했다,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아이들에게 그런 꿈을 길러주고 싶었어요. 꿈이 있다면 아이들이 더 노력해서 살지 않을까요?”
1 아랫마당에서 바라본 사랑방. 수국마을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있던 팽나무 가지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2 아랫집인 모과나무집과 대추나무집.
3 길 건너에서 바라본 수국마을 전경. 경사진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 주변에 있는 작은 집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소박하게 설계했다.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왼쪽이 아랫집, 오른쪽이 윗집이다.
독립을 위한 자립
하지만 겉모습만 ‘자립’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삶의 시스템을 바꿔야 했다. 정말지 수녀는 집집마다 이름을 지어 아이들이 소속감을 느끼게 했고 생활비를 1/n로 나누어 아이들이 자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빨래를 하는 모든 것이 아이들 몫이 되었다. 이 집은 아이들이 많이 움직여야 하는 불편한 집이기도 하다. 빔 프로젝터를 설치한 것도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이야기하고 합의하도록 한 의도였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알게 모르게 서열이 있기 때문에 조금 불편하더라도 서로 부딪치고 대화하며 자립적으로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기대한 대로 아이들이 이 집에 살면서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설거지, 요리, 빨래, 청소 등 당번을 정했고 남에게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맡은 일에 책임을 다했다. 용돈으로 공과금을 내고 직접 장을 봐야 하니 수도나 전기를 아껴 썼고 파뿌리 하나도 쉽게 버리지 않았다.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 ‘자립적’ 삶은 수국마을 밖에서도 일어난다. 마리아수녀회와 우 소장은 어느 후견인이 기증한 합천 땅에 ‘외갓집’이라는 작은 수도원을 지었다. 은퇴한 수녀들이 생활하는 이곳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도피처다. 사춘기에 찾아오는 반항기 때문에 학교나 집에서 갈등을 빚은 아이들은 일주일 정도 외갓집에서 머문다. “때로는 집에서 잠시 떨어져 자기 성찰을 할 곳이 필요해요. 외갓집에는 휴대폰, 인터넷, 텔레비전도 없어서 새벽 기도를 하고 할머니 수녀님을 도와 농사도 짓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죠. 사고뭉치 아이들도 돌아올 때는 엄마 수녀한테 고구마 하나라도 더 주려고 챙겨와요.” 아이들은 용돈을 들여 스스로 외갓집에 찾아가야 한다. 항상 또래와 지내는 아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혼자가 되는 순간. 온전히 혼자가 되어 두려움을 느껴보고, 그렇게 그 시기를 견딘다.
매년 수국마을 아이들은 살아온 이야기를 프레젠테이션하는 발표회를 연다. 어떻게 생활했고 얼마큼 절약했는지 자랑하는 자리다. 지난 발표회에서 정말지 수녀는 아이들이 1년 동안 모은 돈으로 쌀을 구입해 독거노인을 찾아간 일을 알았다. “정말 놀랐어요. 삶이 달라지니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 거겠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정말 대견스러웠어요.”
마리아수녀회가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수국마을은 변화의 물꼬가 되었다. 수국마을이 아동 보육 시설의 성공 사례로 떠오르면서 마리아수녀회는 마을의 운영 방식을 담은 ‘자립 매뉴얼’까지 만들었다. 정말지 수녀는 국내는 물론 멀리 싱가포르나 이탈리아에 있는 건축학교에서도 수국마을을 보러 온다고 말했다. 우 소장은 보육 시설 원장들에게 수국마을처럼 시설을 바꿔달라고 부탁을 받는다. 50년 전 그때처럼 새로운 보육 시설의 기준이 된 셈이다. “사람은 건축을 만들고 건축은 사람을 만든다는 처칠의 말이 와 닿아요. 수국마을이 아이들을 변화시켰고 더 나아가 보육 시설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심어주었으니까요.”
수국마을을 설계한 건축가 우대성은 1999년 ‘천년의 문’ 설계 경기에서 당선해 주목받은 오퍼스건축사사무소 (조성기, 김형종, 우대성)의 공동대표. 가회동성당과 중동교회, 예원교회 등 종교 건축과 배상면주가 느린마을 양조장, 가마 광주요 등 브랜드의 공간 디자인을 맡았다. 부산 암남동에 위치한 수국마을은 ‘2014 부산다운건축상’ 금상과 ‘2014 한국건축가협회상’ 올해의 베스트7을 수상했다.
- 부산 암남동 수국마을 꿈이 자라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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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이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아동 보육 시설 수국마을은 이 질문에 명쾌한 답을 내놓았다. 건축의 본질은 공간을 나누고 구조를 세우는 게 아니라 삶을 개선하고 생각을 바꾸는 것. 비로소 진정한 집에서 살게 된 부산 수국마을 아이들은 이곳에서 독립을 위한 ‘자립’을 배운다.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5년 2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