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역 앞에서 찐빵 장사로 시작해 대전의 역사이자 문화로 자리 잡은 성심당. 국내 제과점 최초로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됐으며, 올 초 본점 옆 건물을 레노베이션하고 케이크 부띠끄를 열어 구도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왼쪽부터 롯데백화점점 파티시에로 근무하는 아들 대혁, 성심당의 법인 로쏘주식회사 마케팅 담당 김미진 이사, 임영진 대표, 케이터링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큰딸 임선 실장.
어릴 때 대전에서 자란 기자에게 ‘대전’ 하면 떠오르는 한 가지 기억이 있다. 할머니 생신이 있는 12월이면 늘 엄마 손을 잡고 사람이 북적이던 시내 제과점에 가서 2단 생크림 케이크를 샀는데, 새하얗고 동그란 모양이 꼭 눈사람 같아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떤 날은 진짜 눈이 내리기도 했는데, 툴툴거리는 엄마와 달리 동생과 나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맛있는 케이크도 먹고, 눈사람도 만들 수 있겠구나!
30년 후, 그 빵집을 대전역에서 다시 만났다. 기차표를 구입하려는 줄보다 빵을 사려는 줄이 훨씬 길지만 나도 모르게 진공청소기처럼 빨려 들어가 줄 맨 꽁지에 섰다. 기차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명절 차표보다 구하기 힘들다는 ‘튀소(튀김 소보로: 곰보 빵 안에 팥을 넣고 튀긴 것)’ 대열에 합류하려니 눈 내리던 그 겨울, 툴툴거리던 엄마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아 대체 튀소가 뭐라고….”
1 창밖으로 예수성심상이 보이는 임영진 대표의 서재. 임선 실장이 선물해준 간이침대와 트렁크 테이블로 간소하면서도 재밌는 휴식 공간을 완성했다.
2 리빙페어에서 첫눈에 마음에 들어 구입한 콘크리트 테이블과 벤치, 스툴. 벽면의 성경 구절은 30년 전 선친이 집을 고치면서 적은 글귀로 성심당의 모토이자 가훈이다.
응답하라 1956
골목까지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서면서 언젠가부터 동네 빵집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좋은 재료, 건강한 빵, 착한 가격을 내세워도 사람들의 발걸음은 스마트한 서비스, 카페 같은 세련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대형 프랜차이즈 빵집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도 전국구 동네 빵집이 있으니 대전의 성심당이 대표적이다. 2012년 대전역점 오픈 이후, 대전의 상징이 된 성심당. 성심당 창업주 故 임길순 선생은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고향 함경도에서 배를 타고 경남 거제까지 내려왔다.
전쟁이 끝나고 1956년 서울로 향하던 중 기차가 고장나서 대전에 멈춰 섰고, 대전역 앞에서 찐빵 장사를 시작했다는 일화는 지역에서는 꽤 유명하다. 본점 외에 분점을 내지 않기로 유명한 성심당이 대전역점을 낸 것도 그곳이 뿌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픈하자마자 역사 전체에 빵 냄새가 진동하고, 줄 서서 사는 ‘튀소’ 때문에 기차를 놓치는 등 진풍경이 벌어진다. 부산까지 가는 승객이 대전역 성심당에서 빵을 사기위해 환승한다는 소문도 있다. 1인당 여섯 개라는 수량 제한 때문에 갓난 아이를 업고 두 명분을 달라는 아이 엄마의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대전역 앞 찐빵 가게 성심당이 지금 본점이 있는 은행동으로 자리를 옮긴건 이른바 부흥기가 시작된 1970년대 초반이다.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어느 동네든 ‘빵집’은 미팅 장소 1순위로 꼽힐 만큼 인기가 높았다. 성심당 역시 뭘 해도 되는 시기였다. 공대 출신 임영진 대표가 2대 경영을 맡으며 메뉴 개발과 마케팅에 활력이 붙었다. 포장 빙수 개발, 각종 기념일 행사 등을 모두 이때 도입한 것이다. 대전 동양백화점에서 성심당의 어린이날 이벤트를 벤치마킹했을 정도다. 그뿐인가. 1980년대 초반 뉴욕제과가 대전에 진출하면서 성심당 본점 옆에 오픈했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총괄 마케팅을 맡은 아내 김미진 이사는 자신이 카운터에 앉지 않았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3 선화동 자택 2층 거실. 캐주얼한 데님 소파가 박공 구조와 소담하게 조화를 이룬다.
4 김미진 이사와 딸 임선 실장이 위아래층을 사이좋게 나눠 쓰는 작업실. 거실과 서재, 작은 응접실, 현관, 침실, 부엌까지 가벽 하나로 집의 모든 요소를 들였다.
“보통 동네 빵집은 남편이 빵을 굽고 아내가 카운터를 보는 풍경이 익숙해요. 카운터에 있으면 돈을 좇지만, 한 걸음 떨어져 있으면 스스로 객관화할 수 있지요. 하지만 성심당이 늘 잘되기만 한 건 아니에요. 대전에 신도시가 생기고 대전역 주변의 원 도심 상권이 하락하면서 10년 전에는 본점에 화재까지 났죠. 창업 50주년을 앞둔 시점이었어요.”
김미진 이사는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절절히 실감했단다. 성심당의 경쟁력, 의미, 색깔, 본질을 깊게 생각하게 된 그 시점에 부부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과연 성심당다움이 무엇일까?” 한창 프랜차이즈 빵집이 성행했고, 서울에 다른 일을 보러 가서도 다른 빵집만 찾아다닌 시절이었다. 성심당보다 좋은 빵이 있을까 봐, 또 그걸 보는 순간 조급함이 생기곤 했는데, ‘성심당다움’을 고민하다 보니 자신감이 채워졌다. 재오픈은 성공했고, 지방 빵집의 성공 모델로 서울과 부산 등의 백화점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쯤 되니 서울에 입성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직원 3백 명의 웬만한 중소기업 규모인데 은행동 본점&케이크 부띠끄, 성심당 대전역점, 롯데백화점 대전점 세 곳뿐이다. “우리가 빵 장사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점포를 늘리고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빵은 단순히 도구일 뿐이죠. 규모가 커지면 지금처럼 일하지 않아도 지금보다 많은 돈을 벌겠지만, 성심당의 가치를 잃을 게 뻔하지요. 잘될 때일수록 매출을 늘리기보다 문화나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양질의 방법을 고민해야 해요.”
5 한옥 대문을 옥상 계단 문으로 활용한 아이디어가 재밌다.
6 목공사 때 제작해 도장한 초록색 다이닝 테이블과 카펫, 빨간색 의자로 포인트를 준 다이닝룸.
최고가 아닌 최선의 빵
성심당은 이름 그대로, 정성을 다해 빵을 굽는다는 뜻이다. 신앙심이 깊던 임 대표의 선친은 피란할 때 말이 통하지 않는 미국 선교사에게 묵주를 보여줬고 그 덕에 마지막 배를 탈 수 있었단다. 바다를 건너며 평생 남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한 선친은 자신도 어렵게 찐빵 장사를 하면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찐빵을 나눠줬다. 임영진 대표도 선친의 뜻을 이어받아 58년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웃을 위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단 하루, 폭설로 대전에 차가 다니지 못한 날만 빼고). 그래서 남을 걸 예상하면서도 늘 4백~5백 개씩 더 굽는다(이는 웬만한 제과점 하루 판매량이다).
“생각해보면 성심당 빵 맛의 비결은 아주 간단해요. 빵 기술이 특별하지 않던 시절, 어제 남은 빵 팔지 않고 아침마다 새로 구워내니까 맛있을 수 밖에요. 많은 사람이 맛있게 먹으면서 나눔이 기쁨이요, 소통이 되는 것, 그게 성심당 빵의 본질이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성심당의 포장 빙수가 한국 테이크아웃의 효시라면 믿을까. “1980년대 초, 냄비 들고 와서 빙수를 담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포장 빙수는 순전히 고객의 니즈에 의해 탄생한거죠. 남편은 그때부터 링거 수액을 넣던 스티로폼 박스에 빙수를 넣어 흔들어보기도 하고, 지붕에 매달아 언제 녹는지 실험도 해봤어요. 세 시간 정도 얼음 상태를 유지한다는 걸 알았어요. 그때 고속버스가 생겨서 서울과 대전을 두 시간 정도면 오갈 수 있었죠. 서울 가는 사람이 이 빙수를 사 가지고 간 거예요. 지금은 빙수 시장이 카페로 넘어갔지만, 그때만 해도 성심당의 포장 빙수는 전국으로 팔리던 히트 상품이었답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갈 때 어떻게 안전하게 승차할지 고민도 많이 했다. 기술자가 대부분인 빵집에서 감성적 부분을 채우기란 쉽지 않았을 터. 김미진 이사는 연애편지를 쓸 때의 두근거림으로 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한다. 간단하다.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준비하듯 누군가 빵을 살 때의 기분, 빵 봉지를 열었을 때의 느낌을 상상하며 반죽하고, 굽고, 정성스럽게 싸면 된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어떤 일이든 설렘으로 다가가면 결과는 그 이상의 감동으로 돌아온다.
복고풍 여고생 캐릭터가 귀여운 ‘판탈롱 부추빵’, 몽블랑 데니시를 패러디한 ‘보문산 메아리’ 등 빵의 특징을 잘 살린 네이밍과 패키지 디자인 모두 그의 애정 어린 결과물이다. “왜 요즘은 핵가족, 싱글 세대가 많아서 빵이 작아져야 한다고들 해요. 하지만 성심당은 여전히 크고 재료도 듬뿍 넣은 빵을 고수해요. 해마다 빙수 회의를 하죠. 이 맛을 추가하자, 이 재료로 바꾸자, 디자인이 달라져야 한다는 등 갑론을박이 펼쳐지지만 결론은 늘 ‘작년과 똑같이’ 예요. 크기도, 가격도 그대로. 트렌드가 순간순간 바뀌는 시점엔 기준 자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그럴 때면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고요.”
손맛이 빵 맛을 좌우한다는 사실. 튀김 소보로와 판탈롱 부추빵은 좋은 재료를 듬뿍 넣어 만드는 성심당의 베스트셀러다.
모든 것은 뿌리에서 시작된다
이번 취재는 케이크 부띠끄 설계를 맡은 건축가 이성란 소장이 성심당 대표 부부가 얼마 전 집을 레노베이션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진행됐다. 오래된 주택을 동네 목수랑 토닥토닥 고쳤는데, 언뜻 봐도 솜씨가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자개장을 리폼해 만 든 문, 아기자기한 부엌 세간 사진을 보는 순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과연 손때보다 더 아름다운 장식이 있을까?
“부모님을 모시고 30년간 살았고 한때는 일곱 식구가 복작복작 살던 집인데, 막상 이사하려니 서운하더라고요. 큰딸 솔레가 왠지 친정이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차 싶었죠. 아버님이 출퇴근하면서 마당 한쪽 예수성심상 앞에서 꼭 기도를 하셨어요. 어느 순간에 보니 저희가 그렇게 하고 있고, 또 우리 아들도 출근할 때 기도를 하더라고요. 이 집을 떠나고, 이 집이 없어지면 지난 30년간 자연스레 쌓인 가족의 역사, 문화, 정서, 교육도 모두 사라지는 거잖아요.”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의 말처럼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단순히 지나간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이 담긴 공간이다. 석 달 동안 작업실에서 지내면서 진행한 레노베이션은 버려진 것, 지나간 것, 잊히기 쉬운 것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며 기존 건물에서 읽을 수 있는 삶의 흔적들, 곳곳에 디테일이 묻어 있는 오래된 기억까지 꼭 간직할 만한 시간이 무엇인지 꼼꼼히 들여다보고 가치를 읽어내는 일로 점철됐다. 인테리어도 화려함보다는 이 집의 본래 분위기를 살리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1980년대에 지은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마감재와 계단 골조를 그대로 살린 것도 그 때문이다.
1 산책길에 발견한 소담한 이층집이 자꾸만 눈에 밟혀 덜컥 세를 얻은 김미진 이사는 딸과 함께 쓰는 작업실로 꾸몄다. 2층 창가에 앉으면 마음에 잔잔한 평화가 찾아온다고.
2 세계 곳곳 빵 투어의 추억이 담긴 사진들.
3, 7 시어머니가 쓰던 자개 화장대의 거울을 떼어 문짝에 달고, 장식용 문손잡이로 활용했다.
4 구두 속에 넣는 종이 틀에 신발 끈을 묶은 소품은 김미진 이사가 만든 것. 사용해보니 에폭시가 생활 공간에 비교적 편리하게 잘 어우러져 집 바닥도 에폭시로 도장했다.
5 부엌 창가에 신주 봉을 달고 소쿠리, 체, 수세미 등을 걸었다.
6 자연 감성 오브제가 마음을 끄는 현관 데코. 9 임선 실장의 케이터링 작업실 ‘오븐 스토리’의 한켠. 유럽 빈티지 가구와 집을 공사하면서 나온 손때 묻은 물건들로 꾸몄다.
자개장을 리폼해 만든 문짝도 인상적이다. 거실벽의 성경 구절은 선친이 30년 전 집을 고치며 만든 목재 아트월에 가훈처럼 적은 글귀로 레노베이션하면서 성경 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패널은 떼어내 선반처럼 연출했다. 선반 위 20년 전 친구 아들딸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은 이제 손주 차지가 되었다. 부분적으로 원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생동감을 불어넣기도 했다. 다이닝 공간의 초록 테이블은 공사할 때 직접 페인트칠해서 리폼한 것. 살림하기 편하도록 시스템화한 부엌은 임선 실장의 놀이 공간이기도 하다. “워낙 친정에 자주 놀러 와요. 어떨 땐 저 혼자 이 집을 지킬 때도 있으니까요. 부엌이 넓어서 제가 일하기 좋거든요(그는 파티&케이터링 스튜디오를 운영 중이다). 이번에 집 고치면서 엄마랑 같이 가구 보러 다니는 재미가 컸어요.
거실 콘크리트 테이블과 주방의 시스템 장은 리빙페어 구경 갔다가 득템한 제품이죠.” 케이터링도 사명감을 갖고 한다는 솔레 씨. 그는 성심당 손녀로 보낸 학창 시절,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았고 부모는 그 혜택에 무척 엄격했다. “용돈 1만 원 달라고 하면 튀김 소보로에 스물다섯 번 인사하고 가라고 했으니까요. 대학도, 유학도 모두 빵 팔아서 다니는 거니 늘 고맙게 생각해라, 그리고 꼭 나눠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그래서 제가 하는 케이터링에도 성심당이라는 자부심과 소명감이 담겨 있어요. 제가 성심당에서 배운 걸 ‘파티’라는 문화로 나누고 싶은 욕심도 있고요.”
1 묵묵히 빵을 빚는 임영진 대표와 아들 대혁 군.
2 본점 2층 계단에 붙어 있는 각종 상패를 보니 왜 성심당을 대전의 문화라 하는지 알 것 같다. 성심당의 법인명 ‘로쏘Rosso’는 이탈리아어로 ‘빨간색’이라는 뜻. 빨간색을 비롯해 주황색(자부심), 노란색(법 준수), 남색(자기 개발) 등 성심당의 무지개 프로젝트를 상징한다. 올해는 빨간색의 해로 재화를 효율적으로 아껴 사용하자는 메시지를 실천 중이다.
대전의 역사, 대전 빈티지
성심당은 올 초 본점 옆에 케이크 부띠끄를 오픈했다. 60주년을 준비하기 위한 도약으로 프로젝트를 위해 외식업계 컨설팅의 드림팀이라 불리는 비마이게스트 김아린 대표와 캘리타 최성희 대표, 이건축연구소 이성란 소장이 나섰다. “케이크 부띠끄 자리가 원래 본점이 있던 곳이에요. 지금까지의 58년을 포용하면서 앞으로 60년이 지나도 어색하지 않은 것이 디자인이 모토였죠. 인테리어도 트렌디한 게 아니라 편안한 것, 보편타당한 것, 오래갈 수 있는 것을 테마로 했고요. 성심당스러운 ‘대전 빈티지’에 집중했다고 보면 맞아요.”
파벽돌과 징크 소재로 외벽을 감싼 빨간 벽돌집을 연상케 하는 케이크 부띠끄는 편안한 티타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빵 문화의 선진국은 블랑젤리와 파티시에가 엄연히 구분되지만 우리나라는 같이 판다. 우리에게 케이크는 1년 열두 달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연 분리하는 게 맞는지 우려되었다. 하지만 빵 문화가 한층 성숙하려면 디저트 문화가 발전해야 한다. 성심당 같은 큰 빵집이 성공하면 후발 빵집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겠다는 사명감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세련되기만 한 케이크가 아닌 성심당다운 케이크를 만드는 게 바로 케이크 부띠끄의 목표다.
힘들게 일하는 직원들에게 미안해서 빵 하나도 그냥 집어 먹는 일이 없는 가족은 한 달에 가장 많이 쓰는 돈이 빵값이란다.
“성심당다운 것은 정통과 우리 스타일을 함께 가는 거예요. 정통이 될 수 없으면서 정통이라 우기는 대신 우리 스타일로 재해석하는 게 중요하죠. 곡물빵을 만들 때 대나무 잎 가루를 넣는다거나, 딱딱한 바게트에 찹쌀을 넣어 식감을 살리는 식이에요.” 김미진 이사는 충청도에서 많이 나는 부추를 주재료로 사용하는 판탈롱 부추빵처럼 지역 산물을 재료로 활용한 빵을 많이 개발하려고 노력한다. 나 혼자만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를 고민한 결과다. 성심당은 2년 후면 60주년을 맞는다. 곧 성심당과 같은 나이가 되는 부부에게 오래전부터 꿈이 있다. 성심당 60주년 기념 책을 만들고, 성심당 스토리관을 만들어 아이들이 성심당을 추억하고 체험하게 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로 문화가 채워지고 다음 세대 역시 ‘성심당다움’을 잃지 않는 발판이 마련된다면 충분히 해볼 가치가 있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