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으로 보면 예술가들에게 관대한 프랑스의 정책 덕분이겠지만, 프랑스인들의 예술에 대한 애정은 빈곤과 고독을 일상으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품어내기에 충분한 것 같다. 덕분에 파리 곳곳에는 예술가들이 점령하다시피 차지한 아틀리에 건물들이 적지 않다. 그중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 바로 센 강 옆에 위치한 레 프리고Les Frigos 아틀리에라고 할 수 있다. 1971년까지 철도청 소속의 냉동 창고였던 이곳은 1985년 잠시 비어 있는 사이 예술가들이 무단으로 들어와 아틀리에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20년 동안 예술의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고 있다. 70여 명의 작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는 레 프리고 외관은 마치 붕괴 직전의 건물처럼 버려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정 하나로 자신만의 개성이 담뿍 담긴 비밀의 방을 가꿔가고 있는 다양한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레 프리고에서 가장 유명한 로프트 아틀리에의 주인장, 파올로 칼리아Paolo Calia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타고난 열정과 감성을 예술로 표현해내는 특별한 예술가이다.
‘하늘과 맞닿은 신비로운 공간’,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고 불리는 그의 로프트 아틀리에는 외부로부터의 빛을 모두 차단, 마치 한 예술가가 캔버스 위에 그려낸 가상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20년 전 이탈리아를 떠나 이곳에 왔을 때 여긴 마치 폐허 같았어요. 그냥 버려진 우울한 곳이었죠. 그래서 베니스에서의 즐거움을 옮겨오고 싶었습니다.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하듯 이곳에 저만의 세계를 만들게 되었죠.” 그는 베니스 아카데미 보자르를 졸업한 재원이었지만, 1985년 파리의 매력에 이끌려 이곳에 정착을 하였다. 로마에서 영화 <카사노바>의 데커레이션을 담당하기도 했던 예술가 펠리니Fellini의 조수로 일한 파올로는 스승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펠리니를 정신적 아버지로 여겨온 그는, 파리에 오자마자 마치 영화 세트 같은 ‘로마의 분수’라는 제목의 작품을 파리 현대미술관에 설치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미술계의 관심을 얻었다. “주로 영화 세트 같은 무대 장치에 관심이 많아요.
이를 무대로 사진 촬영을 하는 게 제 작업이죠. 그래서 오페라 가르니에가 끝난 이후 무대 세트를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했고, 에르메스Hermes의 크리스마스 데커레이션이 철거될 때 이를 얻어와 특별한 방을 만들기도 했죠.”
그의 아틀리에에는 천사 라파엘이 로마의 분수 주변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올 법한 양탄자와 쿠션들이 가득하다. 이곳에 2백 개의 양초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하면 파올로의 아틀리에는 여름 한낮에도 겨울밤이 찾아드는 신비로운 매력을 발휘한다. 이런 분위기 덕분에 이곳은 세계적인 잡지 화보나 영화 촬영에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파올로의 아틀리에는 연말마다 마돈나, 보이 조지, 모나코의 왕자 등 유명인들이 참석하는 파티가 열리는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 파올로 아틀리에의 욕실과 침실 사이에 있는 복도는 마치 로마시대 신전 기둥을 축소한 듯한 벽장식과 대리석 플로어, 대리석 콘솔과 은빛 가구들이 고급스러운 느낌을 연출한다. 2 유럽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크림 빛 벽 마감과 동양적인 금빛이 잘 조화된 이곳에서는 아틀리에 입구의 동양적인 느낌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3 1985년부터 예술가들이 점령하다시피 입주,아틀리에로 사용되는 레 프리고 건물.
1 크림색 화장대와 테이블 세트는 이탈리아에서 애완동물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여동생 마리아를 위해 디자인했다. 주로 귀족들의 애완견의 초상을 그리는 여동생은 1년 중 반을 파올로와 함께 지내고 있다.
2 극장 무대를 옮겨놓은 듯한 발코니에 서면 어디에선가 오페라 한 소절이 들려올 것만 같다. 그 앞에 놓인 의자들은 파올로가 앤티크 시장을 다니며 구입한 가구들로, 아틀리에에 어울리도록 프레임을 다시 페인팅하거나 패브릭을 교체하여 색다른 분위기로 변신시켰다.
“폐허가 된 냉동 창고를 이렇게 만들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어요. 그래서, 나 혼자보다는 누군가와 함께 즐기면 더 좋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초대했어요. 설마 했는데 유명인들이 선뜻 초대에 응했죠. 식상한 클럽이나 레스토랑보다는 더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의 공간이 유명세를 얻게 되면서 파올로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비자Ibiza의 엘 디비노 클럽 같은 멤버십 클럽에서 크리스찬 디올 등 유명인들의 주거 공간까지 파올로의 바로크식 데커레이션을 선호하는 이들이 그의 고객들이다. 그는 자신의 인테리어 세계를 동양과 서양의 매력이 공존하는 ‘퓨전 바로크 양식’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그의 아틀리에 초입에서는 마치 천사 라파엘이 페르시안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닐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복도를 지나 침실로 들어서면 은색의 향연이 시작된다. 에르메스에서 크리스마스 장식품으로 썼던 침대를 이곳으로 옮겨와 그가 직접 은색으로 도색을 하고 은색 침구와 커튼을 만들어 완벽한 실버 베드룸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예술을 논할 때 아주 심오하죠. 하지만 화병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꽃이나 평범한 전구가 달린 크리스마스 트리도 때로는 예술이 될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제 아틀리에에 있는 모든 것은 작품이지요.”
그의 아틀리에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곳은 필립 스탁의 스타일을 풍자하는 뜻에서 꾸민 욕실. 세계적 디자이너인 필립 스탁의 디자인을 재현하면서 동시에 이를 패러디한 공간을 창조해낸 것이다. 냉동고인 건물의 기계 장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를 동양적이고 에로틱한 공간으로 해석해 낸 파올로의 센스는 언론으로부터 ‘파리에서 가장 에로틱한 욕실’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하얀색 변기를 둘러싼 인도식 목재 장식은 파올로가 가장 아끼는 것으로 실재로 필립 스탁의 사인이 새겨져 있으며 덕분에 이곳은 ‘필립 스탁 화장실’이라는 멋진 애칭까지 갖고 있다.
“개인적으로 1평도 안 되는 프랑스식의 작은 화장실을 싫어해요. 그래서 욕실과 함께 있는, 문이 없는 화장실을 만들었죠. 그리고, 오래된 나무 색을 싫어하기 때문에 썩은 나무들로 가득한 욕실을 모두 흰색으로 칠했어요. 하지만 냉동고의 기계 설비들은 욕실과 너무 잘 어울려서 그대로 살렸습니다.”
초현실주의적인 실버 톤의 풍경과 동서양을 자유롭게 오가는 그의 감각은 때로는 지나치게 과감한 면을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된 시적인 감성을 품고 있다.
마치 코믹 영화의 주인공인 듯한 외모와 특유의 이탈리아 발음이 섞인 프랑스어 때문일까,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에도 자꾸만 피식, 웃음이 나온다. 1년 내내 이곳에서는 축제가 열린다는 그의 말처럼 파올로의 일상은 언제나 열정으로 가득하다. 삶의 무게가 힘겨워 잠시나마 이를 잊어보려는 친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영감을 얻으려는 디자이너들이 즐겨 찾는다는 파올로의 로프트. 이곳에서 그들은 마치 오아시스처럼 달콤한 파올로의 열정을 고스란히 옮아가고 있다.
1 파올로의 침실은 금색 조각상과 거울, 벨벳 커튼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덕분에 패션 화보 촬영을 위해서 자신의 침실까지 내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2 이탈리아 조각상과 다양한 페르시안 쿠션들이 쌓여 있는 거실은 파티를 열 때 가장 인기가 높은 장소다. 3 파올로의 로프트 아틀리에에서 유일하게 하늘이 보이는 곳이다. 비록 그가 벽화로 표현한 하늘이지만 한줄기 빛도 들지 않는 이곳에서는 숨통을 트여주는 부분이다.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의 하늘을 그려넣은 것으로 파리의 실제 하늘보다 더 밝고 화사하다. 4 작은 박스 모양의 의자는 루이 14세가 음악을 감상할 때 사용하던 앤티크이다. 머리 부분 양쪽에 고전적인 스피커가 달린 의자를 구입, 파올로가 다시 페인트 작업을 한 그의 작품이다. 5 물랭루주의 출연자 대기실에서 가져온 듯한 조명이 달린 거울과 테이블 세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