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E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작은 집에 산다는 것>에는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집을 지어 사는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등장했다. 큰 집에 살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대출금과 이자를 갚으며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하면서 ‘집의 노예’로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내용이었다. 비용적, 지리적, 구조적 측면을 바탕으로 본다 하더라도 작은 집에 대한 조명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그렇다면 작은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종로구 인사동 창의물류갤러리 낳이에서 지난 11월 4일까지 진행한 <최소의 집>전은 최근 현저히 움직이고 있는 집에 대한 이해와 가치를 공유하고자 마련한 자리다. 의도치 않게 작은 집을 몇 채 설계한 연유로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는 건축가 네 명에게 ‘최소의 집’에 대해 들었다.
스튜디오 ANM 김희준 소장
최소의 단위 방房으로 시작하는 집
1 강원도 평창 깊은 숲 속에 자리한 이곳은 최소한의 기능만 갖춘 암자다.
2 2년의 실무 경험 후 지금까지 개인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ANM의 김희준 소장.
3 집의 네 면이 자연과 맞닿아 있는 것이 독특하다.
4 반듯한 방을 기본으로 두고, 필요한 추가 공간을 늘려나가는 방식의 ‘방’은 김희준 소장이 제안하는 최소의 집 프로토 타입 모델이다.
스튜디오 ANM의 김희준 소장에게 방房은 집의 원형이다. 방은 최소의 집이자, 집을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일종의 유전자처럼 집 전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필수 요인이라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집은 누군가가 만들어 수동적으로 전달하고 소비되는 완제품이 아닙니다. 그 집에 사는 사람과 주변 관계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집에 대한 생각과 삶의 가치를 담는 곳이지요.” 집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진 김희준 소장이 선보인 ‘최소의 집‘은 강원도 평창 산 깊숙이 자리한 암자다. 수도자를 위해 지은 이곳 ‘정・방’은 넓이 18㎡, 높이 6m 크기로, 전기도 수도도 부엌도 없는 기존 암자 옆에 현대식으로 지은 공간이다. 가로세로 2.7m 크기의 방을 중심으로 앞뒤에 툇마루, 좌우에 주방과 화장실을 두었다. 천장은 높이가 6m로 다른 부분보다 돌출되어 있는데, 돌출된 틈새로 띠 창을 둘러 빛과 외부 풍경이 빗겨 들어오도록 했다. 전시 주제인 최소의 집에 대한 김희준 소장의 해석이 담긴 모델은 ‘방房’이다. 그는 집을 조직하는 기본 인자인 방이야말로 최소의 집이라 정의했다. 그래서 공간을 최소화한 방을 프로토 타입으로 만들어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수직이나 수평으로 확장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 또한 방 내부가 미리 짠 계획에 따라 구획되고 거실, 침실, 화장실 등으로 그 기능이 고정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비움의 상태로 방을 구상해 사용자가 생활하면서 스스로 공간의 기능을 결정하고 쓰임새에 따라 변화시킬 수 있도록 했다. 사진 김용관
스튜디오 아키홀릭 정영한 소장
건축가의 개입을 줄인 최소의 집
1, 2 유리온실을 중심으로 여닫이 유리벽을 설치한 9X9 실험주택.
3 현재 설계중인 ‘6X6 주택’ 은 계단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집의 외부와 내부를 오가는 방식이 독특하다.
4 정영한 소장은 2002년 스튜디오 아키홀릭을 열고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5 ‘9X9 실험주택’은 뚫린 천장으로 자연의 변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스튜디오 아키홀릭의 정영한 소장은 ‘최소’가 꼭 물리적 의미만 뜻하는 단어가 아님을 강조했다. “제가 생각하는 최소의 집은 건축이 최소한으로 개입한 공간입니다. 집에 최소의 기능만 콤팩트하게 넣고 나머지는 건축가가 아닌, 사용자가 직접 정의하는 집을 일컫는 말이지요.” 정영한 소장이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집들은 기하학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근대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흉흉하게 쓰던 반듯한 기하학을 이용해 3X3, 5X5, 6X6, 9X9의 집을 제안한 것. 그중 가로 9m, 세로 9m, 높이 6m의 ‘9X9 실험주택’은 70대의 여류 화가를 위해 지은 최소의 집이자 작업 공간 겸 갤러리다. 경기도 양주에 위치한 이곳 1층에는 주차장과 작업실, 갤러리를 두었고, 2층에는 기둥이 없는 형태의 주거 공간을 마련했는데 이 2층이 바로 ‘9X9 실험주택’의 핵심인 셈이다. 유리 온실을 중심으로 나눈 작은 공간 네 개는 여닫이 유리벽을 가변적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어떤 가구를 두는가에 따라 공간의 용도를 유연 하게 결정할 수 있다. 예컨대 필요에 따라 TV를 열면 거실이 되고, 책상을 열면 스터디룸으로 연장되는 식이다. 가구로 공간이 정의되는 전형적인 방식을 피하고자 정영한 소장이 고안해낸 아이디어다.
그는 ‘9X9 실험주택’을 토대로 최근 최소의 집인 ‘6X6 주택’을 작업 중이다. 가로 6m, 세로 6m, 높이 9m의 손 바닥만 한 이 집에는 부부와 골든 리트리버 두 마리가 살 예정이라고. 집의 단면적을 줄인 대신 3층 높이로 쌓아 올리고, 외피 대부분을 유리로 감쌌는데, 집 중앙에 사각형의 퍼니처 코리도furniture corridor(가구 복도)를 두고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가구, 계단, 수납 등을 배치할 수 있 도록 했다. 퍼니처 코리도가 집 가장자리에 있던 ‘9X9 실험주택’과는 정반대의 설계다. 1층은 개들과 공유하는 마당으로, 2층으로 올라가면 거실 공간, 테라스, 방 등이 나오고 2층과 3층 사이에 주방과 식당이, 다시 계단을 오르면 욕실과 파우더룸, 방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집의 외부와 내부를 경험하는 것이 재미있다. 또 이들과 연장선상에 있는 두 채의 집도 설계 중이다. ‘3X3 주택’은 가로세로 3m의 공간 세 개를 연결해 개 여덟 마리와 3대가 살 계획이다.
이 집은 전체적으로 바닥에서 1m 가량 떠 있는 형태인데, 개들을 집 안에 들이지 않으면서도 항상 같이 지내고 싶다는 주인의 소망을 담았다. 곧 시공 예정인 ‘5X5 주택’은 가로세로 5m의 공간 두 개를 연결해 만든 공간인데,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고 싶다는 60대 부부의 집이다. ‘남자의 방, 여자의 방’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공간은 사실상 두 채가 연결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며 살 수 있도록 거실 위에 여자의 방을, 주방 위에 남자의 방을 배치하는 센스가 돋보인다. 각자의 방은 고정된 벽을 두지 않고 프레임만 설치했는데, 쓰임새에 따라 가변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사진 김재경
작은 집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첫 단추 자신의 입맛을 정확히 파악하라 ‘내가 원하는 집’의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돌아보며 꼭 필요한 공간을 짚어볼 것. 또 공간 내부에 배치하려는 가구의 구조와 용도도 세부적으로 구상하는 것이 좋다. 시공자와 협업하라 건축 공사비를 절감하기 위해서는 시공자와 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초기에 시공자를 정하고 재료 선정과 공법을 검토하면서 설계를 진행. 시공자가 공사비 범위 내에서 가능한 재료를 추천하면 이를 검토해서 설계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예산을 넘기지 않도록 한다. 수납 문제를 해결하라 결국 집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은 가구와 짐을 놓을 수납공간. 이 부분이 짜임새있게 해결되면 면적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
가온건축 임형남·노은주 소장
불필요한 것은 빼버린 최소의 집
1 간디학교 맞은편 산자락에 위치한 금산주택은 모던한 느낌의 서양식 경골 목구조 방식을 사용했다. 여기에 공간 개념과 요소들은 전통 한옥에서 끌어들여 전통과 현대의 느낌이 공존한다.
2 빛이 좋은 오전에는 대청마루에 앉아 앞쪽에 펼쳐진 진악산을 보며 휴식을 취하기 좋다.
3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며 집에 대한 생각을 설파하는 가온건축의 부부 건축가 임형남, 노은주 소장.
4 금산주택의 입면도.
“최소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이에요. 어떤 사람은 단 4평만으로도 충분하다 느낄 수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50평이 최소의 공간이라 여길 수도 있습니다. 자기 생활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 필수적인지는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요.” 가온건축의 임형남ㆍ노은주 소장이 이야기하는 최소의 집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요소를 갖춘 적정한 집을 의미한다.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주최한 한국공간디자인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해 화제를 모은 가온건축의 ‘금산주택’은 여러 가지 조건이 6백 년 전의 철학자 이황의 집 ‘도산서당’을 떠올리게 한다. 동서로 긴 일자 형태로 면적은 43㎡, 약 12~13평 정도. 철학자 이황이었기에 가능한 집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소박하고 작은 공간이지만 사랑방, 화장실, 부엌, 보일러실, 심지어 다락방까지 ‘있을 건’ 다 있는 알찬 공간이다. 실제로 침실, 사랑방, 처마, 대청마루 등 구조가 한옥과 닮았는데, 우리나라 땅에 맞게 몇천 년 동안 최적화된 것이기에 주저 없 이 한옥의 요소들을 차용했다고 한다. 대청마루 형태의 야외 덱에 서면 진악산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데, 특히 해가 뜨고 지는 장면이 장관이다. 불필요한 것을 버리고 간소하게 살았더니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을 발아래 얻은 셈이다.
‘산조散調의 집’ 또한 임형남 소장과 노은주 소장의 작은 집 중 하나다. 한자 이름대로 흐트러진 가락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70대의 화가를 위해 지은 곳이다. 건축주는 젊은 시절 이 땅을 구해 틈 나는 대로 이곳을 찾아 땅의 서쪽에 자리한 무등산 연봉의 경관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30여 년 만에 이곳에 집을 짓기로 결심했고, 결과적으로 무등산국립공원 안에 자리한 15평 크기의 작은 집을 완성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곳이 주거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각지에 떨어져 사는 가족들이 모일 수 있는 리유니언 하우스 개념의 공간이라는 점. 리유니언 하우스란 각자의 생활에 맞게 흩어져 사는 가족들이 주말이나 휴일에 함께 모일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을 뜻하는데, 별장과 달리 관리하기 쉽고 비용 부담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작게 짓는 것이 포인트다.
임형남 소장은 이 또한 현대인이 자기 삶을 반영한 새로운 형태의 ‘최소의 집’ 이라 이야기한다. “최근에 결혼을 앞둔 예비 신혼부부가 8천만 원을 들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적은 예산으로 그에 맞는 ‘작은 집’을 짓고 싶다는 거였죠. 이들은 신부 쪽 본가가 쓰던 창고를 개조해 한정된 금액에 맞춘 25평 정도의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건축가가 지은 집은 무조건 비용이 많이 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 비용이 적게 든다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겠지요. 하지만 준비한 금액에 맞게,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집을 지을 수 있다면, 조금 규모가 작더라도 살기에는 편리하고, 가치 있는 집이 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기 삶에 맞는 집에서 산다면 이야말로 작은 집 열풍의 순기능 아닐까요?” 임형남 소장과 노은주 소장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최소의 집’은 가로·세로·높이가 각각 3m 크기의 ‘퍼펙트박스’. 사용자가 스스로 고민해 가구를 배치하기 때문에 용도와 형태가 달라진다. 집을 확장하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식구 수, 용도에 따라 집을 늘리고 싶다면 크기가 같은 박스를 붙이고 쌓거나 지붕을 씌우면 되니까.
1 산조의 집은 서쪽 풍경을 좋아하는 건축주의 바람대로 서쪽으로 창을 낸 작은 집이다. 집은 15평 정도지만 이 공간이 좁게 보이지 않는 것은 산언저리에 바위 조각이 흩어져 있듯 펼쳐진 넓은 마당 덕분이다.
2 가온건축이 제안한 이상적인 최소의 집 모델인 ‘퍼펙트박스’. 가로세로높이 3m의 박스를 목적에 따라 확장할 수 있다.
3, 4 집 구조와 외관은 단순하고 깔끔하며, 나무 덱을 이용해 무등산 자락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게 했다.
이렇듯 건축가들은 자신만의 견해와 해석을 거쳐 ‘최소’를 정의하고, 이에 따른 궁극적인 주거 모델을 제안했다. <최소의 집> 전시는 단순히 건축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실제로 생활할 수 있는 집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지난 11월 4일, 세 팀을 시작으로 한 첫 번째 전시는 마쳤고 앞으로 건축가 서른 명을 발굴해 전시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사진 박영채
자료 제공 가온건축(02-512-6313), 스튜디오 아키홀릭(02-762-9621), 스튜디오 ANM(02-732-0389) 취재 협조 창의물류갤러리 낳이(02-745-7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