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해주세요.
본문 바로가기
강화도 전등사 무설전 현대적 미감으로 지은 미술관 옆 법당
깊은 고요를 흔드는 독송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나팔꽃 모양의 건물 입구다. 석가모니불과 연등이 있는 걸 보면 법당이 분명한데, 한쪽으로 전시 그림을 감상하는 이들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강화도 전등사의 새로운 법당 ‘무설전無說殿’에서 만난 풍경이다.


무설전 전경. 배흘림기 둥 너머 석가모니와 협시불이 나란히 앉아 있다.

서운 갤러리. ‘만卍’ 자를 새긴 인두를 손수 찍어 만든 목탑은 이정교씨의 작품이다.


“올라가서 참배하세요.” 사시 독송을 읊는 스님의 고무신이 회랑 한가운데 단정하게 놓여 있고, 그 옆에 표지판이 보인다. 디딤돌에 신발을 벗고 행여 거친 소음이 들릴까 조심스레 발을 살포시 내려놓던 대웅전과는 다른 풍경이다. 사람들은 한쪽 벽면에 전시한 작품들을 관람하고 반대편 출구로 나가기도 하고, 박물관의 미술품을 바라보듯 한참을 들여다보는 이들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통 사찰에서 보던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다. 황금빛이 아닌 백옥처럼 새하얗고 생김새도 기존에 보아온 부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초파일을 앞두고 대웅전 앞마당에는 불자들이 염원을 담아 손수 만든 연등이 파도처럼 흔들리는데, 무설전 천장에 매달린 연등은 현대식 LED 조명등이다. 대체 어떤 법당이기에!

강화도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있는 전등사는 우리나라 불교 역사가 시작될 시기인 381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대웅전을 비롯해 약사전과 범종까지 보물로 지정된 귀한 역사 유적이자 불교의 상징적 건물인 것. 이렇게 오랜 전통을 지닌 사찰에서 전통 가람 건축과 다른 공간의 변화를 시도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그 중심에 ‘창작단’이라 불리는 네 명의 예술가가 있다. 전등사의 회주 장윤 스님과 주지인 범우 스님의 지휘 아래 미술 평론가 윤범모 씨가 총괄 기획을 했으며 불상은 조각가 김영원 씨, 벽화와 신중탱은 동양화가 오원배 씨, 전체 공간과 연등 디자인은 공간 디자이너 이정교 씨가 각각 맡았다.

“대부분의 한국 사찰이 신라시대 가람의 복제 형태를 띱니다. 무설전은 전통의 위엄을 존중하면서 현 시대상을 반영한 법고창신의 정신을 품고 있어요. 이를 계기로 법당의 문이 활 짝 열려 많은 사람이 불교를 친근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창작단’을 이끈 미술 평론가 윤범모 씨는 전등사에 오는 사람들이 이웃집에 마실 가듯 무설전을 찾기를 바란다며 무설전 건립의 의미를 전했다. 사실 그랬다. 산에 가면 으레 만나는 것이 사찰인데, 대웅전 앞에만 가면 꽃살무늬 창살 너머를 기웃거리다 돌아선 것이 한두 번인가. 석가모니불 앞에 앉아 그 기운을 느끼는 경험도 불자가 아니라면 선뜻 하기 어렵다. 법당에 항상 있는 후불벽화도 가까이 들여다볼 기회가 없고, 위로받고 싶어도 법당이 내뿜는 위엄은 종종 발걸음조차 포기하게 만든다. 하지만 무설전은 얘기가 다르다. 회랑을 두어 신발을 신고 자연스레 법당에 들어올 수 있게 했다. 무설전은 법당인 동시에 미술관이며 누구에게나 활짝 열린 문화 공간이다. 불교의 존위와 전통을 지키면서 동시대 정신을 확장한 사유의 결과다.


석가모니불과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후불벽화.


벽화, 시대정신을 반영하다 “석가모니불이 자리한 공간은 곡선이 아름다운 돔 형태예요. 후불탱화 대신 파리 유학 시절에 작업하던 프레스코 기법을 도입해 벽화와 천장화를 그렸습니다. 석회 반죽과 공기가 만났을 때 화학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비율을 철저하게 지켜야 해요. 그래야지 색채가 완벽하게 벽과 합일을 이룹니다. 무설전이 전통 목조 건물이었으면 불가능한 작업이지요.” 동양화가 오원배 씨가 동료 10명과 함께 후불벽화 현장 작업에만 한 달을 매달렸다. 프레스코 기법의 후불벽화는 국내 사찰에서는 유일하게 무설전에만 존재한다.
돔 안으로 들어가 벽화를 훑어보니 불화의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천장화가 하늘을 상징하듯 도상이 공중을 유영하는 것처럼 입체적이다. 부처님 양옆에는 문수, 보현 보살이 아닌 부처의 제자 아난과 가섭을 전면에 두었고,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했다. 기존 탱화에서 보던 기형적인 인체 비율도 평범한 우리 모습과 비슷하게 그렸다. 후불벽화와 함께 그가 작업한 신중탱을 들여다보자. 붉은색 바탕에 은선銀線으로 윤곽을 그린 홍탱紅幀으로 베레모를 쓰고 현대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작품의 예술적 가치를 강조해 예배 대상으로서의 존엄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편안하게 불화를 마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종교적 가치와 벽화 고유의 예술적 가치를 조화롭게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대정신의 반영이에요. 전통에서 완벽히 벗어날 수는 없어요. 고민을 많이 했지요. 막연히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어떤 방향으로 이어갈 것인가, 그것이 늘 화두입니다.”


1 불자들의 염원을 담은 천불.
2 (왼쪽부터) ‘창작단’을 이끈 이정교, 김영원, 윤범모 씨, 범우스님, 오원배 씨.

불상, 이웃에게 위로받듯이 무설전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흰색 불상이다. 한가운데에 모신 석가모니불 좌상은 큰어른답게 당당하며 우람하다. 청동 주물 작업에 백색 도료를 입혔지만, 그 백색이 발산하는 우아한 기운이 황금빛보다 화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영락없는 깨달은 인도자의 모습이다. 양쪽에 앉아 있는 4대 협시불도 마찬가지다.

“백색은 모든 기운을 받아들이는 색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채색은 세상의 모든 색깔을 받아들이지요. 홍탱도, 천장화도, 붉은 연등도 백색과 조화를 이룹니다. 그것은 인간 본래의 색이기도 합니다.” 주불을 맡은 조각가 김영원 씨에게도 이번 작업은 새로운 경험이자 도전이었다. 오원배 화가의 제안으로 ‘창작단’에 합류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모든 경계를 없애라”라고 말한 부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고 싶었다. 4대 협시불을 가까이에서 찬찬히 들여다보면 불상 각각의 개성이 오롯이 드러난다.

문수보살이 멋진 식스팩을 자랑하는 남자 아이돌을 닮았다면, 연꽃을 우아하게 들고 있는 보현보살은 늘씬한 몸매와 사랑스러운 미소를 뽐내는 여자 아이돌이다. 후덕한 인상의 이웃집 아낙네 같은 관세음보살은 어떤 고민을 늘어놓아도 자상하게 위로해줄 것 같다. 푸근한 옆집 아저씨 같은 지장보살까지! 색깔이 분명한 불상 뒤에는 불자의 염원을 담은 천불이 빼곡하게 박혀 있다. 달항아리 같은 그림자가 데칼코마니처럼 떨어지니 그 수가 배가된다. 누구라도 친근하게 불상에게 먼저 말을 걸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김영원 씨의 고민이 투영됐다.

무설전, 누구에게나 열린 무한한 공간 공간 디자이너 이정교 씨는 무설전이 전통 사찰의 개념을 벗어나 불교 문화, 교리를 ‘전달’하는 광장이 되길 바랐다. 안으로 들어서면 회랑을 사이에 두고 불교와 관련된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서운 갤러리를 만난다. 법당과 갤러리의 경계가 따로 없다. 불자가 아니거나, 법당에서 참배를 하지 않는 사람은 조용히 그림을 감상하며 그대로 출구로 나가면 된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기호와 문을 단순화해 누구든 편안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했어요. 편안하게 들어오지만 법당 안은 진중하게 참배하고 정진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갤러리가 함께 있기 때문에 수분을 잘 흡수하는 황토 벽돌로 내부 벽을 마감했어요. 특히 나무를 많이 사용해 방음장치가 따로 필요 없답니다. 관현악기처럼 소리를 묵직하게 흡수하거든요.”

9백99개의 연등은 모두 LED 조명등을 사용했다. “마지막 1개의 등은 각자 자신의 마음의 등이에요. 그것이 9백99개의 연등과 합일해 1천 개의 등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사찰에 오면 각자 가슴 깊이 염원하는 것이 있잖아요. 연등을 싸고 있는 네모난 프레임은 그 염원을 담는 내면의 세계입니다.” 연등이 박힌 천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큰 설치 미술 작품처럼 보인다. 널찍한 법당은 거의 농구장만 한데 그만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현재 위패가 놓인 벽면은 바퀴가 달린 이동식 무대로 변신이 가능해 공연이나 낭독회 등 다양한 문화 이벤트를 열 예정이라고. 전통 사찰의 양식에서는 불가능한 시도지만, 뜻을 함께 나눈 전문가들의 미래 지향적인 재해석이 있었기에 무설전에서는 가능하다.

무설전으로 오세요 무설전은 오행사상이 잘 반영된 공간이다. 석가모니불이 자리한 곳은 북쪽으로 과거 주개천이 흐르던 곳. 정방위에 해가 뜨니 불(火)과 물(水)이 만나는 격이다. 지하 구조라 흙(土)을 타고났고, 주재료인 나무(木)와 부처의 청동(金)이 만나니 공간 자체가 ‘조화’를 상징한다. 전등사의 주지이자 이번 프로젝트를 이끈 범우 스님은 무설전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조화라고 강조했다.
“스님과 일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무 설전은 사람들이 쉽게 찾고, 만나는 공간이 되어야 해요. 그럴 수 있는 프로그램도 많이 만들 거예요. 결국 조화를 통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지혜로운 것이기도 하지요. 종교와 상관없이 편안하게 들러주세요. 무설전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입니다.”

취재 협조 전등사 

글 신진주 기자 | 사진 김동오 기자
디자인하우스 (행복이가득한집 2013년 5월호) ⓒdesign.co.kr, ⓒdesignhous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